김영수 장편소설 제 11회 천 문
김영수 장편소설 제 11회 천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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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11-15 16:34
  • 승인 2010.11.15 16:34
  • 호수 864
  • 48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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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천지 도수(天地 度數)
일러스트: 나은진

중생 면담-2

“그리고 어렵다고 할머니 제사 건너뛰지 마세요. 손자가 이런 걸아시면 얼마나 슬퍼하시겠어요.”
“네 알겠습니다. 저를 참 많이 귀여워하셨는데….”

할머니 영가의 표정이 한결 밝아져 있었다. 몇 번이고 차법사를 향해 허리를 굽혀 감사의 표시를 했다.
다음에 들어온 면담자는 기품 있는 여교수였다. 차법사는 그녀를 보자마자 가슴이 턱 막혔다. 역시나 단아한 몸가짐과는 달리 그녀는 청문회에 온 듯 질문을 연발했다.

“법사님, 저는 저명한 고승들 아래서 법문을 듣고 전 세계 종교경전도 연구했어요. 과연 저의 연구가 제대로 된 것인지 점검하러 왔습니다. 법사님께서는 죽음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사후에는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또한 도란 무엇인가요?”
“교수님께서 지금 물으신 것은 인터넷에서 검색하면 다 나올 텐데요. 이곳은 버리는 자리지 채우는 자리가 아닙니다. 번지수를 잘못 찾으셨네요.”
“왜요? 인터넷은 얕은 지식에 불과해요. 법사님께선 저승과 이승을 넘나들며 수십 년간 구명시식을 하셨잖아요.”

인터넷보다 생생한 고급정보를 알고 싶다는 뜻이었다. 차법사는 여교수에게 물었다.

“미국사람이 한국의 ‘묵은지’ 맛을 알까요?”
“물론 모르겠지요.”
“삭힌 홍어 맛을 알까요?”
“저도 아직 그 맛도 모르는데요. 호호.”
“묵은 지를 책으로 자세히 설명하고, 비디오로 찍어서 보여준다고 그 맛을 알까요?”
“모르죠.”
“맞아요. 그런다고 맛을 알 리 없겠죠. 만약 책 설명에 ‘오렌지만큼 시다’고 해설해 놓으면 묵은 지를 먹어보지 않은 미국인은 ‘오렌지 맛이 난다’ 하고 평생을 기억할 것이고 남에게도 그렇게 전하겠지요. 그것이 전해지고 전해져서 ‘묵은 지는 오렌지같이 시다’고 할 것 아닙니까?”
“그렇겠지요.”
“그게 지식입니다. 교수님께서 직접 맛보세요. 진리, 도, 인생, 영혼을 남에게 전해 들어서 어떻게 아시겠어요.”
“어떻게 모든 것을 경험합니까? 지식으로 확장하는 것이지요. 그런 방식으론 경험론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잖아요.”
“교수님, 자신이 무엇을 모르는지 모르면서 어떻게 남에게 묻습니까?”
“…….”

차법사는 어리둥절해하는 여교수에게 친절하게 해설했다.

“지금 묻고 있는 죽음, 도를 모르는데 제가 해설한들 어떻게 알겠어요. 묵은 지 설명과 뭐가 다르겠습니까. 부모가 되어 봐야 부모 마음을 알 수 있고, 그 사람이 되어봐야 그 사람 마음을 알 수 있지 않을까요? 죽는 사람 심정을 산 사람이 얼마나 알 수 있겠습니까. 스스로 겪어도 힘든데 저한테 물어서 어떻게 알겠어요. 직접 맛보고 들어와 보시면 될 텐데.”
“법사님 말인 즉, 배워서 알 수 있는 건 없다는 결론이네요.”
“무엇을 모르는지 아는 자가 가장 많이 아는 자가 아닐까요?”
“…….”
“허허허, 아는 자는 알기에 말이 없고, 모르는 자는 몰라서 말이 없는 겁니다.”

뭔가 골똘히 생각하던 교수는 다시 질문 공세를 시작했다.

“그래도 저보다 많이 아실 것 아닙니까? 어떻게 맛을 보는지 방법을 알려주셔야지요.”
“왜 에베레스트 산을 고생고생하며 올라가겠어요. 헬기로 휙 갔다 오면 되는데. 자기 발로 자기 인생을 살아야 자기 인생이지요. 사금을 캘 때 수많은 물과 흙을 버리잖아요. 버리는 건 지식이고 남는 건 지혜입니다.”
“하지만 스님들도 ‘이 뭐꼬?’ 하며 공안 수행을 하지 않습니까?”
“허허허.”

마음으로 듣지 못하고 머릿속 논리로 파고드는 여교수의 습성은 갈수록 태산이었다.

“한 가지만 알려드릴 게요. 아니 힌트라고 해두죠. ‘이 뭐꼬?’란 남에게 묻는 게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에게 묻는 겁니다.”
“그런가요?”
“교수님께 딱 맞는 ‘이 뭐꼬?’ 수행법이 있긴 있습니다만….”
“그게 뭐지요?”

여교수의 눈이 번쩍 뜨였다. 드디어 무언가 하나 건져가겠구나 잔뜩 기대가 부풀었다.

“묵언수행입니다.”
“네에?”
“남에게 묻는 습관을 버리고 자신에게 물으세요.”
“잘 알겠습니다.”
“사실 지금도 또 잃으신 겁니다.”
“네? 알았다고 한 것뿐이었는데요?”
“스스로 물어서 답을 얻은 게 아니라 제 말을 들어서 아셨잖아요.”
“아, 그러네요. 아차차 또… 호호호.”
“달이 어떻게 생겼는지 앞사람에게 묻지 말고 직접 머리를 들어 밤하늘을 보세요.”
“잘 알았습니다. 아니, 이것도 들어서 알았으니 내가 안 것은 아니겠네요.”
“도란 것은 언어가 끊어진 곳, 즉 언어도단의 입정처에서 비롯됩니다. 그러니 도를 소리 내어 묻는 자는 이미 ‘도’를 알 수가 없지요. 도란 글자가 ‘도’가 아니란 걸 알면 이미 ‘도’를 아는 것이기에 물을 리가 없겠지요. ‘도’를 모르기 때문에 도를 묻는 겁니다. 그런데 도를 모르는 자에게 도를 설명한들 어찌 알겠습니까?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하면 모두 헛소리가 아닐까요? 그래서 깨달은 자의 헛소리는 아무리 험한 욕일지라도 진리가 되지만, 깨닫지 못한 자가 아무리 거룩한 법문을 해도 헛소리가 되는 겁니다.”
“…….”
“동서남북은 자기 서 있는 방향에서 결정됩니다. 정답이란 것은 없지요. 각주구검(刻舟求劍)이란 고사성어 아실 겁니다.”
“네, 물론이지요. 움직이는 배에서 칼을 떨어뜨리자 그 자리를 배에 표시해서 찾는다는 뜻이죠.”
“네,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사람의 자리에서 보지 말고 자기 자리에서 보세요. 그러기 위해서 먼저 자기가 선 자리를 알아야겠지요.”
“…….”

여교수는 그 자리를 어떻게 알 수 있느냐는 질문이 목구멍까지 치밀었지만 꾹 눌러 참았다.

“만약 제가 ‘도는 무엇이다’라고 한 마디 던지면 교수님께선 그게 도라고 생각하실 것이고, 그렇다고 내가 침묵하거나 모른다고 쌀쌀맞게 거절한다면 분명 교수님께선 교수님 시각으로 ‘차법사란 사람, 아는 게 없더라’ 이렇게 생각하실 것 아니겠어요. 그러니 말을 해도, 말을 안 해도 이미 도와는 십만 팔천 리 멀어지게 되어 있으니, 제가 무슨 말씀을 드리겠어요. 애초에 그런 질문이 없다면 그런 일이 벌어질 리가 없었을 텐데요. ‘왜요?’ 이 한마디가 얼마나 많은 업을 지은 것이겠어요.”
“…….”
“그래서 부처님은 돌아가실 적에 ‘49년 동안 설한 바가 없었다’고 하며 ‘자등명법등명(自燈明法燈明). 스스로 불을 밝혀 찾아가라’고 하셨잖아요. 자신에게 핀 꽃이 가장 아름다운 겁니다.”
“…….”
“교수님께서는 제가 구명시식을 통해 이승과 저승을 잘 알 것이라고 생각하고 물으셨겠지만, 생(生)을 모르는 자가 어찌 사(死)를 알겠어요. 생사를 맛보지 않은 사람에게 ‘생사일여(生死一如)’란 지식이 얼마나 독이 되겠어요.”
“…….”
“제가 시 한 수 적어드릴 테니, 선지식(禪知識)으로 삼으세요.”

차법사는 종이에 글을 적었다.

고요한 달밤에 거문고를 안고 오는 벗이나 / 단소를 손에 쥐고 오는 이가 있다면 / 굳이 줄을 골라 곡조를 아니 들어도 좋다.
이른 새벽에 홀로 앉아 향을 사르고 / 산창에 스며드는 달빛을 볼 줄 아는 이라면 / 굳이 불경을 아니 외워도 좋다.
아침 일찍 일어나 세수한 물로 화분에 물을 적시며 / 난초 잎을 손질할 줄 아는 이라면 / 굳이 화가가 아니라도 좋다.
저문 봄날 지는 꽃잎을 보고 / 귀촉도 울음소리를 들을 줄 아는 이라면 / 굳이 시인이 아니어도 좋다.
구름을 찾아가다 바랑을 매게 하고 / 바위에 기대어 잠든 스님을 보거든 / 굳이 도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좋다.
해 저문 산야에서 나그네를 만나거든 / 어디에서 온 누구인지 물을 것도 없이 / 굳이 오가는 세상사를 들추지 않아도 좋다.

물끄러미 읽어보던 교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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