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천지 도수(天地 度數)

제령봉(帝令峰)에 서기(瑞氣)가 내리고-3
“아까 명함 드렸는데….”
“그람 처음부터 ‘여기 주지입니다’ 하고 묵직하게 무게를 잡고 목소릴 깔아야지, 그리 히죽히죽 웃어 싸면 어찌 안다요. 그나저나 이걸, 이걸 어째쓰까, 잉.”
“제가 여러 가지 일을 하긴 하는데 사채업은 안합니다, 최여사님.”
차법사는 안절부절못하는 아주머니를 진정시키고 모인 사람들에게 공손히 인사했다.
“자리가 협소해서 죄송합니다. 보통의 법당이나 선원은 신도들에게 개방 되어 있지만 이곳은 저의 수행도량이기 때문에 크게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저만의 도심 속의 암자입니다. 오늘은 단지 면담신청자들을 위해 한 달에 몇 번만 날을 잡아 개방한 날입니다. 저는 신도들이 모이는 걸 꺼려하는 병이 있으니 양해 바랍니다.”
그는 윗 양복을 벗고 병풍 뒤로 자리를 잡았다.
뒤쪽에서 용화가 유심히 차법사의 면면을 관찰하고 있었다. 6척이 넘은 키에 떡 벌어진 어깨, 두툼한 손이 천상 무골(武骨)이었다. 약하게 쌍꺼풀진 부드러운 눈매에 주먹코가 우뚝하고 입술은 두툼했다. 선이 굵고 모나지 않는 관상이었기에 언뜻 동네에서 자주 마주치는 쌀집 아저씨 같았다. 단지 목소리가 큰 강물 흐르듯 웅장한 울림이 있고 청명한 쇳소리가 묻어나는 것이 특이하다면 특이했다.
용화의 예상은 또 한 번 무참히 빗나간 것이다. 비바람을 부르고 귀신을 부린다는 차법사 명성이라면 초탈한 눈빛으로 긴 수염에 나이 지긋하며 흰 도포자락을 휘날리는 기풍은 갖추어야 하지만 근엄한 허연 수염의 도인은 눈을 씻고 둘러보아도 찾을 수 없었다.
용화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저렇게 평범한 사람에게 대체 무엇이 신통해서 차법사, 차법사 하는 것일까? 차법사에 대한 언론기사들과 평판은 모두 사실일까?’
중생 면담-1
20평짜리 선원은 속속 도착한 사람들로 얼추 100명쯤 북적거렸다. 넓게 쓰기 위해 벽 없이 탁 트인 원룸이었지만 1백 명이 뿜어내는 탁한 공기 때문에 가슴이 답답했다.
병풍 뒤의 차법사는 한 중년 가장의 하소연을 들어주고 있었다.
“법사님 집 좀 팔게 해주세요.”
그는 무리한 주식투자로 은행 빚을 지게 되어서 물려받은 마지막 재산인 집을 팔아 부채를 갚으려 했지만, 집이 통 팔리지 않아 은행이자와 원금 독촉에 차압통지서를 받은 상태였다. 경매로 집이 팔린다 해도 은행 빚을 모두 갚을 수 없는 처지였다.
차법사는 혀를 끌끌 찼다.
“어쩌다 그랬어요. 어린 자식이랑 모두 거리에 나앉아야 하잖아요.”
가장은 아이처럼 뚝뚝 눈물을 떨어뜨렸다.
“제 몸 하나 옥살이하는 건 상관없습니다. 허나 처와 어린 자식들이 무슨 죄가 있습니까. 어떻게 해서든 갚아야 할 제 빚인데요.”
“내가 한 2억 빌려줄테니, 급한 빚 갚고 작은 월세라도 얻어 새로 시작하세요.”
2억이란 말에 가장은 눈이 동그래졌다.
“고맙습니다, 법사님. 꼭 갚겠습니다.”
“대신 현금으로 주는 건 아닙니다. 영계(靈界)에서 주는 보이지 않는 돈이에요. 집 팔리고 돈이 들어올 겁니다.”
반신반의했지만 돈이 생긴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예, 잘 알겠습니다.”
“잊지 말세요. 이 돈은 은행돈보다 무서운 돈이에요. 당신 복(福)이 아니라 빌려온 운(運)이니까 돈 생기면 나중에 꼭 불사하세요.”
현금이나 채권이 오간 건 없었다. 그저 차법사의 구두 약속뿐이었다. 그렇지만 중년의 가장은 그 말을 굳게 믿었다. 보이지 않는 돈을 빌린 그는 큰 절을 하고 물러갔다.
30대 초반의 회사원이 차법사 앞에 주저앉듯 무릎을 꿇었다. 다른 사람처럼 조급하거나 울상으로 사정하지 않았다. 회사원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차법사의 눈이 매처럼 번뜩였다.
회사원 뒤에 누군가 따라 들어와 있었다. 웬 할머니 영가였다. 할머니는 애가 타서 차법사에게 사정했다.
‘법사님, 제 손자놈 좀 살려주세요.’
돌아가신 회사원의 할머니였다. 청년은 눈만 끔뻑일 뿐 영가의 존재를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오직 차법사의 영안(靈眼)에만 보이는 영가였다. 차법사는 염력으로 할머니와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할머니 손자세요?’
‘네. 제 하나밖에 없는 손자놈이에요.’
‘그런데 어쩐 일로 이렇게 손자를 데리고 오셨어요?’
‘이 녀석이 글쎄, 빚 때문에 애인도 잃고, 죽을 마음을 먹고 있어요. 약까지 먹으려고 작정을 했어요. 제발 하나밖에 없는 손자 살려주십시오.’
할머니 영가는 넙죽 무릎을 꿇고 눈물로 하소연했다. 청년을 이 자리까지 오게 한 건 할머니 영가였다. 죽어서도 애지중지 손자의 뒤를 봐주고 있었던 것이다.
“처사님, 이제 안주머니에 있는 약봉지 꺼내시지요.”
차법사의 말에 청년은 흠칫 놀랐다.
“어떻게 아셨어요?”
“다 아는 수가 있습니다.”
그는 주섬주섬 수면제 수백 알이 포장된 비닐 주머니를 꺼냈다. 이 약국 저 약국 기웃거리며 며칠간 사 모은 약이었다. 오늘 밤 소주와 함께 들이킬 생각이었다. 그는 눈물을 글썽이며 소리 없이 어깨를 들썩였다.
“법사님, 제 월급은 이백만원인데, 빚은 산더미 같습니다. 제 능력으로는 도저히 갚을 길이 없습니다. 제가 이제 무얼 할 수 있겠습니까?”
“인생은 누구나 실패하게 되어 있습니다.”
“실패하게끔 되어 있다구요?”
“그럼요. 아무리 성공한 사업가라도 결국 죽지 않습니까.”
청년은 곱게 자라면서 성공의 야망을 키워왔다. 좋은 학벌에 승승장구했지만 한 번의 실패에 그만 좌절하고 만 것이다. 성공의 환상에 사로잡힌 결과였다.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를 보세요. 결국엔 뼈만 남은 거대한 물고기를 낚아 올리잖아요. 실패하게 되어 있는 것이 인생의 컨셉이죠. 왜 성공하려고 하는지 생각해보셨어요?”
“떵떵거리고 살려 그러는 거지요.”
“성공이란 자기가 잘 살려고 성공하려는 것이지,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
“나 자신을 위해서 사세요. 성공해도 내 삶이고 실패해도 내 삶이지요. 세상을 살아지지 말고, 살아가세요. 영혼이 있다는 것은 믿으시죠?”
“그럼요. 법사님 책을 보면 육신에 영혼이 들어 있다고 하셨잖아요. 죽어도 끝이 아니라고 하셨잖아요. 그래서 다시 태어날 때 좋은 곳에 태어나게 해달라는 겁니다.”
딱한 양반이었다.
“다음 생에 다시 잘 태어난다고 하셨지만, 삶을 포기한 지금의 과보 때문에 다음 생에는 지금보다 몇 십 배는 더 큰 고통일 텐데요.”
그는 묵묵히 고개를 숙이고 한숨만 쉬었다.
“조금만 더 견디어보세요. 조만간 좋은 일이 있을 겁니다. 그리고 좋은 비방을 하나 가르쳐드릴게요.”
그는 비방이란 말에 금세 환한 표정이 되었다.
“저도 실패를 많이 하는데 그때마다 저도 그렇게 합니다.”
“법사님도 실패하는 게 있습니까?”
“물론이지요. 젊은 시절 꿈인 경찰도 못 되었고, 공무원도 퇴사해야 했고… 제가 이루려는 모든 것은 전부 실패했어요. 오죽했으면 전국을 헤매며 만행(萬行)을 다녔겠어요.”
“법사님, 그게 뭡니까? 그 비방이요?”
차법사는 잠시 간격을 두었다. 그리곤 활짝 웃으며 말했다.
“웃으세요.”
회사원은 다소 실망한 듯 차법사를 바라봤다.
“살고 싶지 않다, 죽고 싶다, 인생이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며 괴로워할 때, 그런 자신을 바라보면서 한번 웃어 보세요. ‘이것이 인생이야.’ 하고 크게 외치시구요.”
“웃을 일이 있어야 웃죠.”
“인생 살면서 웃을 일이 얼마나 되겠어요. 웃을 일이 있어서 웃는 게 아니라, 웃어서 웃을 일이 생기는 겁니다. 내 세상이지 어디 남의 세상입니까? 내가 죽으면 이 세상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그렇긴 하죠.”
“자기가 먼저 웃어야 세상이 밝아지는 겁니다. 억지로라도 웃으세요.”
“하하하, 네 알겠습니다.”
“다시 한 번 조금만 참으면 곧 일이 풀릴 겁니다.”
차법사는 사내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차법사는 사과를 꾹꾹 눌러 기를 넣어 잘라서 청년에게 전해주며 할머니 영가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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