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천지 도수(天地 度數)

제령봉(帝令峰)에 서기(瑞氣)가 내리고-2
경건한 마음으로 제령봉을 우러러보던 용화는 가방에서 디지털 카메라를 꺼냈다. 증산의 행적지 방문 때마다 찍어두는 사진이었다. 충전한 지 오래된 배터리가 경고등을 깜빡거렸다. 찍히든 말든 제령봉을 향해 셔터를 눌렀다. 다시 한 번 눌렀지만 이번엔 카메라 전원이 들어오질 않았다.
그렇게 제령봉을 뒤로 하고 집에 돌아온 용화는 수집했던 자료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어! 이게 뭐지?”
찍어온 사진을 점검하던 용화는 컴퓨터 모니터 화면을 보며 갸우뚱했다. 마지막 사진인 제령봉 장면에 전혀 생각지 못한 풍경 때문이었다.
제령봉 정상에서부터 번개처럼 흰 빛줄기가 위에서 아래로 힘차게 내리 뻗어 있었다. 서설이 내린 제령봉에 서기가 내린 장면이 틀림없었다.
“정말 기이하네.”
이렇게 혼자 중얼거리면서도 내심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상서로운 징조였다. 문홍 선생에게 증산의 유서를 받아온 날 이런 서기가 내렸으니 말이다. 마지막 미륵 도수를 풀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래도 용화는 혹시나 하고 사진 파일을 사진관에 들고 가서 감정을 요청했다. 요모조모 살펴보던 사진사는 먼저 용화부터 훑어보았다. 점잖은 사람이 거짓말을 할 것 같아 보이진 않았다.
“음… 카메라 메모리 고장이라면 저장된 사진 전체가 못쓰게 되었을 것이고, 그렇다고 디지털 카메라가 중간에 빛이 들어갈 리가 없고요… 필름 카메라라 할지라도 사진 중간에 이렇게 교묘하게 노출될 수는 없는데….”
사진사는 다시 한 번 용화를 위아래도 쳐다보면서 신중하게 감정을 마쳤다.
“혹시 뽀샵을 했을 수 있지만… 직접 메모리칩을 가져 오셨으니…. 제 생각엔 분명 사진에 찍힌 빛줄기네요.”
기이한 일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집에 돌아온 용화는 인터넷 검색어에 ‘제령봉’을 쳤다. 최신 칼럼 하나가 올라와 있었다. 제령봉에 관한 이야기가 언급된 칼럼이었다. 키보드 방향키를 내리며 칼럼을 읽던 용화는 화들짝 놀랐다. 모니터 앞으로 눈을 바짝 갖다 댔다.
“이럴 수가!”
그는 입을 다물 수 없었다. 글의 칼럼니스트가 제령봉을 다녀갔다고 했는데, 바로 그 날짜가 자신이 방문한 날짜와 일치하는 게 아닌가. 간발의 차이도 서로 엇갈렸던 모양이었다. 참으로 기막힌 우연의 일치였다. 한날 제령봉의 서기가 두 사람에게 내렸으니 보통 인연이 아니었다.
용화는 칼럼의 작자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차진길’.
익히 들어본 이름이었다. 용화는 진작부터 특출한 예언가로서 익히 차진길 법사의 명성을 들어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그의 이름 뒤에 붙은 ‘법사’란 호칭에서 증산과는 먼 불교에 조예가 깊은 인물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문홍으로부터 입수한 증산의 유훈에 쓰여 있던 다음과 같은 구절에서 턱 걸렸다.
佛之形體 仙之造化 儒之凡節. 天文 陰陽 政事 (불지형체 선지조화 유지범절 천문 음양 정사)
즉, 미륵은 불도의 형체를 하고, 선도의 조화를 부리고, 유도의 범절을 갖추었으니, 그 모든 음양정사가 천문에 들어 있다는 뜻이었다. 증산의 친필 ‘미륵탄생공사서’에는 향후 미륵이 어떤 형태로 강림할 것인지 명시하고 있는 대목이었다.
“불도의 형체라….”
용화는 깊은 생각에 빠졌다.
‘무슨 계시일까? 차경석이 살던 마을에 나타난 차진길이라….’
용화는 증산 유훈 해석에 혼신의 힘을 기울이는 한편 차진길의 행적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용화는 문홍 선생이 건네준 천문(天文)의 마지막 퍼즐을 맞추기 위해 밤잠을 설쳐가며 연구에 연구를 거듭했다.
마침내 스승도 풀지 못했던 미륵의 정체가 출생년도는 물론 성씨까지 용화의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증산이 설계한 천지공사 도수를 모두 풀었다는 확신이 들었다. 다가올 미래를 훤히 내다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차올랐다.
그러나 곧이어 거대한 허탈감이 파도처럼 몰려왔다. 앞일을 미리 안다고 생각하니 세상 살 맛이 나질 않았던 것이다. 점점 깊은 허무의 늪으로 빨려 들어갈 뿐이었다.
‘아무리 천기누설이지만 나만이 알고 있어야 한단 말인가. 하늘에서 내게 이 천문 해석을 내린 이유가 있을 텐데….’
그는 천문해석까지 인연이 된 것은 증산의 천지공사를 완성케 하는데 자신을 일꾼으로 쓰려는 징조라고 생각하자 막중한 사명감이 들었다. 그리고 그날 밤 금산사 방등계단에 청룡이 내려오는 꿈을 꾼 것이다.
“아, 도수가 다 찼구나. 상제님의 열 석자가 시작된 게야. 때가 다 되었어. 그들을 찾아야 해.”
용화가 지난 기억에 잠겨 있던 그 시간, 차진길 법사는 시간에 쫓기며 선원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시간이 늦어 바삐 오르고 있는 차법사 눈에 작달막한 키의 50대 아주머니가 눈에 들어왔다. 고급스런 핸드백을 끼고 두리번거리고 있던 아주머니는 차법사를 보자 기다렸다는 듯 말을 걸었다.
“아저씨, 여기가 법당 맞소?”
아주머니는 차법사를 몰라보고 있었다.
“네, 여기가 법당입니다.”
아주머니는 상대방이 더 말을 건넬 틈도 주지 않고 기관총 쏘듯 불평불만을 갈겨댔다.
“아니, 무슨 법당이 간판도 제대로 안 걸고 장사를 하고 그려. 그래도 절이라면 기와집을 짓던가, 아니면 새 빌딩을 하나 지어서 손님을 끌어야지. 목탁도 두들기고 새끼 중들도 서빙해서 손님을 안내해야 할 거 아냐. 백화점도 안 가보나. 다 쓰러져가는 건물에 이게 뭐야.”
아주머니는 미안스런 표정으로 눈만 끔뻑이는 차법사를 아랑곳하지 않고 떠벌렸다.
“아예 주차장도 없어. 차법사인가 뭔가, 하도 신통하다길래 몇 달을 기다려 찾아왔더니 이 모양이네그려. 손님은 왕인데 이렇게 엉망으로 장사를 해도 되는 거야. 어떻게 할라고 그래. 그런데도 사람들이 줄서는 거 보면 참 신통하긴 하나보네. 그런데 아저씨, 아저씬 여기 뭣 땜에 왔수? 마누라가 바람이라도 났수? 보아하니 신수가 훤하고 빙글빙글 웃는 걸 보니 작은 마누라라도 생겼나?”
아주머니는 차법사 관상까지 읊어댔다.
차법사는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보지 못해 실수하는 일에는 익숙해 있다. 앞날을 귀신처럼 알아맞히고 영혼과 소통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고 소문을 들은 사람들은 허연 수염 쓰다듬고 도포자락을 휘날리는 나이 지긋한 노도사가 근엄하게 앉아 있을 거라고들 생각했다.
한번은 장안동에 살 때, 지방에서 올라왔다며 한 노인이 찾아왔다가 떠꺼머리총각 차법사를 보고는 ‘아버님 어디 가셨냐?’ 하고 물어서 ‘출타했다’고 하니, 한참을 기다리다 되돌아간 적도 있었다.
차법사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지갑에서 명함을 꺼내 아주머니에게 건넸다.
‘차진길.’
아주머니는 명함을 앞뒤로 돌려보더니 또 입방아를 찧었다.
“차진길? 이 절의 주지스님 차씨하고 성씨가 같네. 그런데 어떻게 회사이름도 없고 전화번호도 없이 달랑 이름 석자뿐이유? 무슨 사업을 하슈?”
“그냥 이것저것…….”
“아, 사채업하슈? 손도 솥뚜껑 만해 가지고……. 내가 아는 깍두기 아저씨들도 명함이 이렇더만.”
아주머니는 핸드백에서 자신의 명함을 꺼내 차법사에게 건넸다.
‘애영실업 대표 최옥자’
“내가 각종 옷감을 남대문시장에 대는 일 하고 있고, 빌딩도 몇 개 있수. 옷감 싸게 맞추려면 나한테 연락하쇼.”
차법사는 그러마 하고 아주머니를 앞세우고 선원문을 열었다. 기다리던 선원식구들이 차법사를 알아보고 공손히 합장을 했다.
아주머니는 웬일인가 싶어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엉거주춤하게 차법사를 바라봤다.
“혹시, …에구머니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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