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천지 도수(天地 度數)

증산이 남긴 유서-3
“상제께서 남긴 말씀 중에 세계유의차산출(世界有意此山出)이라는 글이 있는데, 세계가 뜻이 있어 만든 산이라는 의미이지요. 여기에서 이 산은 곧 모악산을 비롯한 오로봉을 의미한 것입니다.”
“권위 있는 산이라뇨?”
“다섯 봉오리의 산신(山神)들은 곧 신선(神仙)들을 뜻하는데, 그 이유는 이곳이 천지공사의 핵심기지이기 때문이지요.”
책으로만 보다가 직접 현장에서 확인을 하니 그동안의 공부가 옹색함이 그지 없었구나 하는 한숨이 나왔다. 용화는 문홍의 말을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고 바짝 귀를 기울였다. 이 노인은 증산에 대해서 무언가 깊은 비밀을 아는 것 같았다. 선생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상제께서 남기신 시문(詩文) 중에는 이런 글도 있지요. ‘삼인동행칠십리(三人同行七十里) (3인이 동행하여 70리를 가고), 오로봉전이십일(五老峰前二十一) (오로봉 앞에서 21자가 내려온다). 여기에서 오로봉이 나오는데, 구릿골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5개의 산들을 뜻하는 것이지요.”
“3인이 동행하여 70리를 간다는 뜻은 무업니까?”
용화가 진지하게 물었다.
“그건 아직 나도 모르겠어요.”
모르겠다고 이실직고 하는 문홍 선생의 진솔한 성품에 용화는 더욱 믿음이 갔다.
“이 시문은 상제께서 남기신 현무경 중의 신장공사도(信章公事圖)라는 그림을 설명하는 것이겠지요. 21수리도 아직 수수께끼지요.”
그의 입에서 현무경(玄武經)이란 말이 처음 나왔다.
문홍의 설명은 끝이 없을 것 같았다. 도대체 이 노인이 언제 그렇게 공부를 많이 했는지 용화는 놀랍기만 했다.
간소하게 내온 저녁을 물리자, 문홍이 어디선가 야생 열매주를 내왔다. 두 사람은 주거니 받거니 하며 밑도 끝도 없는 도담(道談)을 나누기 시작했다. 밤이 깊어 가는데 두 사람의 술잔은 주거니 받거니 끊이질 않았다. 술이 들어가자 조심스런 마음도 없어지고 취기가 돌아 호기로운 마음이 생겼다. 용화가 불그스레한 얼굴로 당당하게 질문을 하였다.
“그런데 증산께서 옥황상제님이란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나요? 정말로 증산께서 하느님이란 말입니까?”
문홍이 결심한 듯 몸을 일으켰다.
“내가 아무에게도 공개하지 않았던 문서를 하나 보여주지요. 아마 당신이 인연인 것 같소.”
문홍이 열쇠를 채운 다락방 벽장문으로 다가갔다. 귀중품을 보관하는 두터운 철제 금고가 보였다. 철걱 소리를 내며 열쇠가 입을 벌렸다. 차곡차곡 쌓인 오래된 문서들이 얼굴을 드러냈다. 문홍이 두개의 두루마리 족자를 꺼냈다.
문홍이 조심스럽게 작은 족자를 벽면에 걸어 펼쳤다. 노란색의 한지에 쓴 가지런한 한문 족자는 ‘기초동량(基礎棟梁)’이란 글로 시작하고 있었다.
“이게 뭔지 알겠소?”
용화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한자라도 놓치지 않으려 눈을 부릅떴다. 그러나 고개를 갸우뚱할 뿐이었다.
문홍이 이번에는 큰 족자를 걸었다. 족자는 과감하게 아래로 떨어져 펼쳐졌다.
“앗!”
용화는 순간 숨이 멈추는 줄 알았다. 다시 한 번 자기 눈을 의심했다. 자기도 모르게 떨리는 목소리로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읽었다.
“증·산·선·생·유서(甑山先生遺書)!”
더 이상 말이 나오지 않았다. 문홍 선생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스쳤다.
“두 눈으로 보다시피 천문(天文)이지요. 상제님의 유서란 말입니다.”
“이런 게 어떻게….”
인류 최초로 원한 맺혀 죽은
영혼, 단주(丹朱)-1
생전에 증산은 부적이나 현무경을 그려서 천지공사를 보았으나, 무슨 이유에선지 공사가 끝나면 그 자리에서 모두 불태워 없애게 했다. 알려지기로는 제자인 차경석에게 남겨진 현무경 묶음은 한권뿐이고, 이마저도 멸실되고 흩어져 세간에 돌아다니는 30여장의 현무경은 늘 진위논란에 휩싸이곤 했다.
그런데 이렇게 친필 유서가 남아 있었다니 도저히 믿기질 않았다. 만약 이것이 진본이라면 현무경을 둘러싼 분분한 해석 논란은 종지부를 찍게 되는 것이었다. 아니 증산의 본뜻이 드디어 온 천하에 온전하게 세상에 드러나는 역사적인 순간이 아닌가. 용화는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작은 족자는 상제님께서 친히 쓰신 유서인데 ‘감결문(甘結文)’ 또는 ‘미륵탄생공사서’라고 하지요. 감결문에는 상제님께서 직접 손가락으로 19군데 혈을 찍으셨지요. 큰 족자는 단주수명서(丹朱受命書)라고 합니다. 상제님이 아니라 수제자인 김형렬이 쓴 것으로 추측해요. 여기 김형렬의 도장인 12지신 인장이 뚜렷이 찍혀 있지요. 경전을 공부했다니 이런 공사를 했다는 구절은 읽어 보았을 겁니다.”
사실이었다. 책에는 갑진년(1904년) 음 10월 8일 증산이 수제자 김형렬의 딸과 혼인한 날 천지공사로써 인연을 맺게 하여 수부공사(首婦公事)에 참여토록 한다고 되어 있었다.
“바로 그날 상제님과 김형렬이 한 자리에서 각각 작성한 천문이지요.”
용화는 홍두깨로 머리를 맞은 듯 멍해졌다. 애써 정신을 가다듬고 믿기지 않는 자신의 의심을 털기 위해 호기심 어린 아이처럼 질문공세를 벌였다.
“그런데 왜 유서가 두 개입니까? 문장의 길이에서 차이가 있는데요?”
“이 두 장의 유서는 한 날, 한 시, 한 자리에서 쓰인 것이지요. 진위를 세상에 공증하기 위해서지요.”
“공증이요?”
“일종의 증인 진술서지요. 상제님은 요점만 쓰고, 김형렬은 구구절절 다 받아쓰고. 하지만 해석은 일맥상통해요. 그러나 도수는 달라요. 상제님께서 각각마다 달리하는 도수를 숨겨 놓았으니까요. 한문 해석은 쉬워요. 문제는 숨겨진 도수지요. 그걸 풀어야지요.”
용화는 한 구절도 놓치지 않으려고 아랫입술을 깨물며 정신을 가다듬었다. 공연히 술잔을 받아 정신이 혼미하게 된 것을 자책했다. 아니 어쩌면 문홍이 정신력을 시험하기 위해서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를 더욱 악물었다.
“자, 여길 봐요. 단주수명서에는 상제님께서 인간 세상에 내려온 사유가 비교적 자세히 나와 있어요. 즉, 현대문명은 물질과 사리에만 정통하여 인류의 교만과 잔폭을 길러내어 천지를 흔들며 자연을 정복하려는 기세로써 모든 죄악을 거리낌 없이 범행하니 신도(神道)의 권위가 떨어지고 사계(四界)가 혼란하여 천도(天道)와 인사(人事)가 도수를 어기었다는 내용이 있지요?”
문홍은 글자를 하나하나 짚어가며 단주수명서를 설명했다.
“그러자 서양사람 마테오릿치 신부가 지상에 있는 모든 신인(神人), 성인(聖人), 불타(佛陀)와 보살들을 데리고 구천(九天)에 올라와서 옥경에 계신 하느님께 고하기를, 인류와 신명계의 큰 겁액을 치료할 일이 시급함을 하소연하므로 상제께서 인간세상에 내려오셨다는 내용이 있어요. 그러자 상제께서 <서천서역 대법국 천계탑>을 통하여 지상에 내려와서 삼계를 둘러보고 천하를 대순하다가 이 동토(東土)에 그쳐 모악산 금산사에 임하여 신미년에 인간의 몸으로 현신하여 오셨던 것이지요.”
“그런데 왜 단주수명서라고 합니까?”
“단주(丹朱)는 인류 최초로 원한 맺혀 죽은 영혼이지요. 단주는 당시에 천하를 대동세계(大同世界)로 만들려는 원대한 꿈이 있었어요. 하지만 모함으로 죽었어요. 그 모함이 아직도 풀리지 않아, 세상 사람들은 아직도 단주 알기를 권력에 눈이 어두워 골육상쟁을 저지른 패륜아로 생각하고 있어요. 상제님께서는 이분을 가장 먼저 해원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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