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격이 중지되자 포수들은 포 다리 그늘 밑에 쓰러져 버렸다. 그들은 너무 지쳐 일어날 수가 없었다.
포대장 반복어 대위가 지휘부 상황실에 30분만 점심 식사시간을 달라고 사정을 했다. 곧이어 포대에 20분간의 휴식 명령이 하달되었다.
포대가 주둔한 진지는 벌거숭이 민둥산이었다.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도 없었다. 이곳은 미군들이 고엽제를 살포한 지역이었다. 나뭇잎은 모두 떨어지고 앙상한 가지만 흉측하게 서 있었다. 풀잎 역시 미군이 살포한 고엽제 때문에 허옇게 말라죽어 있었다.
짧은 휴식 시간에도 병사들은 열대의 강렬한 햇빛을 피할 곳이 없었다. 오직 105mm 포 다리 밑에 드리워진 작은 그늘만이 유일한 휴식처였다. 병사들은 포 다리 밑에 병아리 새끼처럼 옹기종기 모여 햇빛을 피하고 있었다.
산 아래 부락에서는 아직도 3중대 병사들이 처절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그 전투는 다음 날까지 계속 되었다.
아군의 승리로 끝났지만 악전고투 끝에 얻은 것이다. 그 전투가 끝난 뒤 얼마동안은 편안하게 지낼 수 있었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왕이 된 졸개
“오뚜기 온다.”
누군가 소리치자 포 다리 그늘에 누워있던 병사들이 슬며시 일어나 앉았다. 산허리를 빙빙 돌던 H21 헬기 한 대가 포대의 진지에 착륙을 했다. 진지는 순식간에 누런 먼지를 흠뻑 뒤집어썼다. 헬기 속에서 우편 행낭과 각종 보급품이 하역되기 시작했다. 뜻밖에도 헬기 속에서 단독 군장을 한 은희용 상병이 훌쩍 뛰어 내렸다.
“어디서 오는 거야? 야, 정말 오랜만이다.”
우편물을 챙기며 신동협 병장이 반갑게 맞았다.
“찰리로 가는 길인디 바로 가는 오뚝이가 없시유. 여거서 하루 밤만 기다리면 내일 오뚝이가 온데유.”
“은 상병, 태권도 교육관에 입소했다며?”
“오늘 수료했잖아요. 열 시에.”
“참, 너 알파 김 하사 알지? 개미허리 김 하사. 어떻게 지내고 있니?”
“이히히! 김 하사님 때문에 태권도 교육관에서 난리가 났시유.”
“뭐야? 난리가 났다고, 왜?”
신동협 병장이 놀라서 물었다. 옆에서 보급품을 수령하던 인사계 남 상사가 인상을 쓰며 비웃었다.
“내가 그럴 줄 알았다, 개미허리가 된 통 사고를 쳤구나. 그 자식은 가는 곳마다 사고를 치네, 망할 자식!”
남 상사가 가래침을 퇘 하고 뱉었다.
“뭔 일이 있었는데?”
신동협 병장이 다시 물었다. 찰리의 은희용 상병은 개미허리보다 1기 앞서 사단 태권도 교육관에 입소했기 때문에 그간의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은희용 상병이 히죽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사병들이 구내식당으로 가려면 반드시 태권도 교육관 앞을 지나가야 하는디 김 하사님이 통행세를 받고 있시유.”
“ 무슨 소리야, 그게?”
은희용 상병이 한참을 웃다가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개미허리는 태권도 교육관 문 앞에 의자를 가져다 놓고 앉아 지나가는 사병들을 불러 쓸데없이 잡담을 한다고 했다. 그러다가 느닷없이 상대방의 어깨나 팔의 급소를 잡아 버린다는 것이다.
개미허리의 독수리 발톱 같은 날카로운 손가락이 급소 혈을 잡으면 아무리 운동께나 했다는 깡패출신 사병들도 너무 아파 오줌을 찔끔 싸며 비명을 지른다고 했다. 사병들은 개미허리가 무서워 배가 고파도 식당에 밥을 먹으로 가지 못한다고 했다. 사단에 공병대 중대장이 태권도 관장에게 엄중한 항의를 했으나 관장은 빙그레 웃기만 했다고 한다.
“개미허리가 너무 맞아 대갈통이 돌았구나, 불쌍한 자식!”
인사계 남 상사가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김 하사님이 돈 게 아니구유. 태권도 관장님이 돌았시유.”
은희용 상병이 정색을 하며 말했다.
“무슨 말이야? 관장이 돌았다는 게?”
인사계 남 상사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참말로 웃기지유, 김 하사님이 태권도 교육장을 묵사발로 만들었시유. 그 뿐만이 아니고요. 지금 교육관에서는 김 하사가 왕이어유, 왕!”
“고거 참 듣고 보니 요상한 야그여. 은 상병, 홀딱 까놓고 시원하게 야그해 보더라고요, 이잉?”
취사반 오중태 병장이 답답한 얼굴로 독촉을 하자 은희용 상병은 혓바닥으로 마른 입술을 축이며 그 간의 사연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주목, 제군들은 오늘부터 피 교육생이므로 본 교육을 수료할 때까지 계급을 몰수하도록 하겠다. 본 교관은 교육대에서도 가장 인정이 많기로 소문이 난 사범, 상병 오원수다. 이곳을 수료하고 나간 많은 교육생들이 나를 보고 죽어도 꼭 ‘원수’를 갚겠다고 벼르는 모양인데 언제든지 환영한다. 단, 본인은 태권도 공인 7단임을 미리 밝혀 두니 명심하기 바란다. 잠시 후에 관장님의 임석 하에 입소식을 거행하도록 하겠다. 그 전에 제군들의 기능 정도를 평가하기 위하여 약속 대련을 갖도록 하겠다. 이것은 앞으로 제군들의 교육에 참고로 하기 위해 기능을 평가하는 것이며 다른 뜻은 없다. 자 그럼 누가 먼저 할까?”
상병의 눈이 쥐를 노리는 고양이처럼 피교육생들을 째려보기 시작했다. 이 열 횡대로 도열한 교육생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목이 움츠려 들었다. 고양이는 어떻게 하면 쥐들을 더 맛있게 요리 할 수 있는 가를 즐기는 것 같았다.
“너, 앞으로!”
사범이 험악하게 인상을 쓰며 앞줄에 서있는 일등병을 지목하자 키가 멀대처럼 큰 병사가 겁을 잔뜩 집어먹고 긴장된 얼굴로 주춤 주춤 앞으로 걸어 나왔다. 오원수 사범의 표정은 ‘요걸 어떻게 요리해서 녀석들의 기를 팍 죽이나’ 하고 음흉스럽게 웃고 있었다.
“자, 덤벼라!”
<다음호에 계속>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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