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포대에서 현재 그의 보직은 태권도 교관이었다. 그가 맡은 직책은 병사들이 가장 싫어하는 직책이다. 월남에 온 병사 치고 태권도 안 해본 사람이 어디 있으며 자칭 유단자가 아닌 병사가 어디 있겠는가?
그는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다른 고참들이 늦잠을 즐기는 동안, 포대장 성화에 못 이겨 신병들에게 태권도를 가르쳐야 했다. 전쟁터에서는 사람을 효과적으로 죽이는 무기들이 얼마든지 많은데 왜 태권도를 배워야 하는가? 태권도 교관부터 이런 생각을 하는데 누가 태권도 교육을 좋아하겠는가.
개미허리는 병사들이 모두 술에 취해 곯아떨어진 후에도 SIG(통신방) 벙커 지붕 위에 혼자 앉아 있었다. 어느새 먼동이 트며 새벽이 밝아오고 있었다.
하사의 목검과 장군의 방패
장군은 인간이고 병사는 사람이다
A포대 통신반 신동협 병장은 더위 때문에 자꾸만 짜증이 났다. 오후 5시 이전에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통신반 급여 송금 서류를 서무계 조동기 하사에게 제출해야만 한다. 서무계 조동기 하사는 10분만 지나도 신경질을 내며 짜증을 부렸다. 그런데 벙커 속의 무더위는 작성 중인 송금 서류를 자꾸만 버려 놓았다. 가만히 있어도 흘러내리는 땀방울이 팔뚝을 타고 손목 부근에 흥건히 고였다. 그리고 힘들여 써놓은 송금 서류를 적셔 못쓰게 버려 놓았다. 그는 신경질이 나서 쓰고 있던 송금 서류를 쭉 찢어 버렸다. 그리고 신탄진 한 개비를 입에 물고 목침대 위에 벌렁 누었다.
‘일병 권영남. 주소 강원도 인제군 신남면. 가만, 신남면? 어디서 많이 듣던 이름인데… 이런 바보같이 내가 전에 근무했던 곳이 아닌가?’
신동협 병장은 목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가 월남으로 온 것은 겨우 두 달 전에 일이었다. 그런데 그 두 달 전의 일들이 마치 아득한 먼 옛날의 일처럼 느껴졌다. 고국에서의 일들은 마치 전혀 다른 세계의 삶처럼 생각이 되었다.
그때 개미허리가 벙커 안으로 들어왔다. 신동협 병장은 반가워했다.
“웬 일이야?”
“신 병장, 오늘 온 신병들 신상명세서 좀 보여 주라.”
“건 뭐 하려고?”
“태권도 교관을 넘겨야겠어. 오늘 온 신병 중에 태권도 하는 놈 없나?”
“그 좋은 직책을 왜 넘기려고 하냐?”
“너 임마! 자꾸 사람을 놀릴 거야, 이걸 그냥.”
“3단이 한 명 있는데.”
“이리 줘 봐.”
“내가 포대장 꼬셔 태권도 교관 자리를 다른 사람에게 넘겨줄까? 그럼 넌 편하잖아, 어때? 그런데 한 가지 조건이 있어. 킬러밸리에서 생긴 일들을 솔직하게 털어 놔. 그럼 나도 협조하지.”
포대장은 신동협 병장의 고등학교 선배였다.
“그건 안 돼, 임마.”
“배짱 부릴 처지가 못 될 덴데… 너, 교관 안 하면 늦잠도 잘 수 있다. 어쩔 거여? 비밀은 지켜 주마, 싫어?”
“그렇게 궁금해? 허긴 킬러밸리 일로 떠들썩하니 친구인 너도 궁금하겠지. 그러나 너도 내 말을 믿지 못할 거야. 믿지 못할 말을 내가 왜 떠벌리고 다니겠어? 떠들면 점점 더 구설수에만 오르겠지. 난 그게 싫어.”
“걱정하지 마라, 난 입도 뻥끗 안 할 테니.”
“좋아, 밤에 PX 앞에서 만나자. 넌 내 친구야.”
그날 밤 P X 앞에서 개미허리는 신동협 병장에게 킬러밸리에서 일어난 일들을 상세히 들려주었다. 신동협 병장은 그의 말을 믿었다.
개미허리가 신동협 병장에게 거짓말을 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더구나 개미허리는 그가 가지고 있던 표창 8개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평소 개미허리는 3 자루의 목검과 8개의 표창을 호신용으로 가지고 다녔다. 표창은 그의 분신과도 같았다. 표창은 한시도 그의 몸을 떠나 있은 적이 없었다. 그런데 8개의 표창을 모두 날린 것은 그만치 그가 위험에 처해 있었다는 증거가 아닌가.
그는 3자루의 목검을 장검에서 단검까지 크기 별로 가지고 있었다. 장검은 수련용으로, 단검은 호신용으로 가지고 있었는데 목검 중에서도 똑같은 크기의 단검을 두 자루 가지고 있었다.
그 중 한 자루가 지난번 우기 공세 때 미군들의 브리핑 자료에서 나온 것이다. 그 목검은 킬러밸리에서 표창을 모두 쓴 개미허리가 다급해서 마지막으로 가지고 있던 목검을 던진 것이다. 그리고 그 목검은 월맹군 38연대 치 연대장실에서 미군 수색대가 발견 한 것이다. 두 개의 목검 중 다른 한 자루의 목검은 개미허리가 앙케패스로 떠날 때 신동협 병장에게 정표로 준 것이다.
그러나 목검에 대한 일들은 나중에 밝혀진 것들이며 당시 목검의 소유자인 개미허리는 원대에 복귀한 후 A포대에서 비겁자로 낙인이 찍혀 쪼다로 대접을 받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월맹 군부 중에서 가장 뛰어난 핵심 인재가 킬러밸리에서 한국군 패잔병 3명에 의해 어이없이 공격을 당해 역사의 장막 뒤편으로 사라져 버린 가장 아이러니컬한 사건이었다.
한국군 하사의 목검에 월맹군 정예 장군의 방패가 뚫린 것이다. 그런데 그 당사자들은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그런 일들을 눈도 하나 깜짝하지 않고 태연히 저질러 버렸다. 그게 전쟁터인 것이다.
개미허리가 들려준 킬러밸리 이야기는 먼 후일 신동협 병장이 이 소설을 쓰는 계기가 되었다.
해안을 따라 북상하는 철로와는 달리 19번 도로는 빈케를 지나 앙케 고지를 넘어 닥토로 이어졌다. 이 도로는 남부 월남에서 북부로 가는 가장 중요한 도로였다. 그러나 근간에 와서 북부로 가는 보급 통로가 앙케 고지에서 두절되는 일들이 많아졌다. 앙케고지의 도로는 문경 세재와 같이 험난한 길이었다.
[다음호에 계속]
기자
저작권자 © 일요서울i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