킬러 밸리 제 83회
킬러 밸리 제 83회
  •  기자
  • 입력 2009-10-13 13:17
  • 승인 2009.10.13 13:17
  • 호수 807
  • 40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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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속 전진.”

말랑깽이 하사가 고함을 지르며 수류탄을 까서 숲 속으로 던졌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조용하고 평화롭던 들판이 순식간에 총소리와 폭음으로 가득 찼다. 급수차가 달리면서 김이수 하사가 던지는 수류탄의 작열음은 한낮의 열기에 졸고 있던 밀림의 새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급수장의 관망대에서 김이수 하사가 전진하는 방향을 따라 LMG 지원사격을 시작했다. 매복해 있던 급수장의 병력이 차량의 전진을 지원하고 있었다.

“더 밟아 임마, 죽기 싫으면 달려, 더 더더!”

말랑깽이 하사가 M16 소총을 난사하며 버럭 고함을 질렀다. 박찬우 일병은 월남에 온지 겨우 20일 만에 죽는구나, 생각하니 기가 차고 정신이 아득했다. 총탄이 비오듯 날아왔다.

그는 정신없이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눈앞에 은영이의 얼굴이 빠르게 지나갔다. 이렇게 다급한 순간에 왜, 부모님의 얼굴은 떠오르지 않고 약혼녀 은영이의 얼굴이 제일 먼저 생각나는지 이해 할 수가 없었다. 미친 듯이 달리는 급수차의 탱크는 이젠 벌집이 되어 살수차로 변해 버렸다. 살수차는 아스팔트 위에 아까운 식수를 잔뜩 뿌리며 정신없이 달리고 있었다. 어느새 코브라 헬기 두 대가 조금 전에 그곳을 로켓탄으로 쑥밭을 만들고 있었다.

“어디까지 도망칠 거야? 정신 채려 임마.”

말랑깽이 하사가 손바닥으로 박찬우 일병의 뒤통수를 내리치자 그제야 그는 정신이 들어 도로 가에 차를 세우고 핸들에 고개를 푹 처박았다.

‘청주시 택시 기사 중에서 그래도 배짱 하나는 알아주던 박찬우였다. 그리고 고등학교 시절에는 규율 부장까지 지냈던 몸이었다. 그런데 전쟁터에서는 이게 무슨 꼴인가? 발길에 불알 차인 똥개처럼 꼬리를 내리고 허둥지둥 도망치는 모습이, 참말로 한심하고 야코가 죽었다. 어디 기가 죽어 여기서 살겠어? 그런데 가만, 저 말랑깽이 하사는 어찌 된 기여? 어떻게 거기에 부비 트랩이 묻힌 걸 알았는감. 조금 전에 우리가 지나온 길인디, 워뜨게 고것을 알았느냐 말이여?

“뭘 그렇게 보냐? 월남 고참님이. 놀랄 거 없어, 이곳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야. 밭에서 일을 하던 여자들이 계속 작업을 했다면 의심하지 않았을 거야. 또 일을 하던 여자들이 비가 그쳤는데도 밭에 나오지 않은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일까? 내가 V. C 라도 그곳에 부비트랩을 묻었을 거야. 오늘 일로 앞으로 저 급수장은 한 달간 폐쇄 될 거야. V. C가 길을 열어 주지 않을걸. 그만 가자.”

말랑깽이 하사가 말을 마치자 급수차는 또 살수차가 되어 19번 도로 위에 귀중한 물을 뿌리며 앙케고개 밑에 있는 알파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반쯤 얼이 빠진 박찬우 일병은 옆 좌석에 선임 탑승을 하고 있는 말랑깽이 하사의 얼굴을 잠깐 훔쳐보았다. 정말 월남 고참을 한 사람 보게 되는구나 생각하면서…….

그러나 하사는 무엇을 그렇게 생각하는지 창 밖 저 멀리 아득히 보이는 검은 산 그림자를 정신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커브 진 모퉁이를 돌 때마다 그는 고개를 길게 내밀고 아쉬운 듯 먼 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 산이 악명 높은 킬러밸리라 말이지. 어떻게 말을 좀 붙여 보려고 했던 박찬우 일병은 마른침을 꼴깍 삼키며 입을 꾹 다물었다.

하사는 억지로 눈물을 참고 있는 것만 같았다.


올빼미의 눈

밤에만 보는 눈

“꽈앙!”

“부관, 어디야?”

“바로 코 옆에 박았는데요.”

쌍안경을 보던 부관 신록 중위가 대답을 했다.

“탱고야, 너 많이 늘었구나. 잘하면 날아가는 파리 좆도 때리겠다.”

포대장 반복어 대위는 기분이 몹시 좋은 듯 탱고라는 별명을 가진 도영남 상병을 치켜세웠다.

“에헤헤, 올빼미 강 병장님을 따라가려면 아직 멀었시유. 족탈불급인디.”

2포 사수 도영남 상병이 기뻐하며 두 팔을 번쩍 치켜들었다.

“좋았어!”

쌍안경으로 앞산의 표적을 노려보고 있던 포반장들이 모두 도영남 상병을 칭찬 했다.

“어이 신 중위, 놀랍잖아? 탱고 놈, 난다 날아. 탱고야, 한잔 받아라.”

포대장 반복어 대위가 맥주 한 캔을 도영남 상병에게 훌쩍 던졌다.

“야아, 탱고 잘했다.”

2포 반장 성호규 중사가 도영남 상병을 번쩍 들어올렸다.

앙케 고개 밑에 주둔하고 있는 A포대는 지금 한창 잔치 분위기가 무르익어 가고 있었다. 105mm 포가 발사될 때마다 포대는 ‘와와’ 하는 함성과 함께 흥겨운 놀이판이 한바탕 벌어졌다. 사단 작전이 종료된 지금, A포대는 내일 쏭카우 해변으로 휴양을 가게 되어 있다. 출발에 앞서 A포대는 이번 작전에 참가한 포반들에게 부상으로 배급된 에스 레이션과 사단장 상품을 걸어 놓고 포반 끼리 시합을 벌이고 있었다.

상품이 많이 나오긴 했지만 그것을 공평하게 나누어 줄 방법이 없었다. 따라서 포대는 작전이 끝이 나면 전 포대를 집합시켜 놓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105mm 곡사포로 시합을 벌였다. 이번 작전에 참가한 포사수들의 사격 솜씨가 얼마나 늘었나, 눈여겨보는 자리이기도 했다.

포탄 한 발 가격이 고국에서는 쌀 한 가마니 값이라지만 그보다 더 비싼 사람의 생명도 파리 목숨처럼 취급되는 전쟁터가 아닌가? 그래서 여기선 포탄을 가지고 장난을 치고 있는 것이다.

시합에는 A포대 나름대로 엄격한 규칙과 룰이 있었다. 표적 명중에 대한 심사는 장교와 포반장들이 함께 하게 되어 있었다.

따라서 평소에 사격을 지휘하던 포반장들은 시합에는 참가하지 못하고 뒷전에서 자기 포반 차례가 되며 속이 타서애만 태우고 있었다. 포반장들이 빠진 105mm 포는 전적으로 사수와 쫄다구들의 솜씨에 달려 있었다. 일체의 관측 장비가 없이 소총을 쏘듯 사수가 어림짐작으로 저 멀리 눈에 가물가물하는 표적을 명중시켜야 하는데, 그게 어디 그렇게 쉬운 일인가?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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