킬러 밸리 제82회
킬러 밸리 제82회
  •  기자
  • 입력 2009-10-06 17:27
  • 승인 2009.10.06 17:27
  • 호수 806
  • 40면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급수차는 19번 도로를 쏜살같이 달려 공병대 앞을 지나 비포장 도로로 접어들었다. 비포장 도로는 빗물로 군데군데 패어 노면 상태가 엉망이었다. 들판에는 여기저기서 녹(삿갓)을 쓴 월남 여인들이 밭일을 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잡담을 하며 차를 몰고 급수장 외곽에 있는 좁은 도로로 들어섰다.

“왜, 선임 탑승 없이 그냥 왔나?”

김이수 하사가 궁금한 듯 물었다.

“인사계님이 하사님 더러 선임 탑승을 하시래유.”

“월남 신병인데?”

“글쎄, 그게 요상해유. 저가 한 번 더 물어 보려니까, 요렇게 인상을 팍 쓰시는데 그만 기가 죽어서 기냥 왔시유.”

숲이 우거지고 노폭이 좁은 도로는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급수장은 각부대의 식수를 공급하는 중요한 시설이었다. 한국군뿐만 아니라 미군들과 월남군들도 이곳에 가끔 들려 식수를 얻어 갔다.

급수차가 작은 언덕을 넘어서자 도로가 말굽형으로 굽은 커브 길이 나타났다. 커브 길 안쪽 밭에는 월남 여인 3명이 씨를 뿌리고 있었다. 커브 지점은 빈번한 차량들의 통행으로 바깥쪽의 노면에 흙이 많이 쌓여 안쪽보다 훨씬 더 높아져 있었다.

박 일병이 백미러 보자 두 대의 급수차가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바로 뒤를 따라오던 급수차의 호송병이 길가에 우거진 숲을 향해 ‘따따닥 따다닥’ 하며 위협사격을 했다. 김이수 하사의 차가 급수장 정문으로 들어서자 지하 초소에서 방탄조끼를 입고 손에 M16 소총을 든 땅딸이 중사가 뛰어 나오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개새끼들아, 죽고 싶어? 빨리 손들고 내려, 더 높이 들어 임마!”

땅딸이 중사는 독사처럼 약이 올라 있었다. 레슬링 선수처럼 목이 어깨에 달라붙은 새파란 중사는 M16 소총으로 김이수 하사의 턱을 겨누며 살 맞은 돼지처럼 노려보았다.

김이수 하사는 재빨리 차에서 내리며 경례를 했다.

“맹호.”

“니들이 사격했냐?”

“아뇨, 우린 사격을 안 했어요. 저네들이 위협사격을 했습니다.”

뜻하지 않은 환영에 김이수 하사는 어안이 벙벙해서 대답을 했다.

“뭐야, 저 새끼들이 했어? 저런 죽일 놈들! 저 새끼들이 우리 애들이 매복해 있는 곳에 사격을 했단 말이지, 미친놈들! 애들이 화가 나서 죽여 버리겠다고 길길이 날뛰는 걸 억지로 말렸어.”

중사는 김이수 하사의 급수차를 향해 통과 신호를 한 후 뒤를 따라 미군 급수차가 들어오자.

“까땜 양코야, 죽기 싫으면 당장 꺼져.”

땅딸이 중사는 총으로 위협을 하며 서툰 영어로 너희들이 우리 애들을 향해 사격을 했으니 물을 줄 수가 없다고 야단을 쳤다. 미군들은 ‘아이 엠 쏘리’를 연발하며 물을 달라고 사정을 했다. 그들은 맥주 한 박스를 내밀며 땅딸이 중사에게 매달렸다.

그제야 화가 풀린 중사는 크게 선심을 써서 그들에게 급수를 허락했다. 미군들은 땡큐를 연발하며 급수차를 전진시켰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파랗게 맑았던 하늘에 갑자기 시커먼 먹구름이 끼며 소낙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한바탕 쏟아질 모양이었다. 30분 정도 지나자 소낙비는 언제 그랬냐는 듯 그쳐 버렸다. 그리고 금방 파란 하늘에 햇볕이 쨍쨍 내리 쪼였다. 그 동안 김이수 하사는 급수장 벙커에서 점심을 얻어먹었다. 급수장 권 중사는 조금 전에는 미안했다며 붕어 매운탕과 맥주를 내밀었다. 붕어는 급수장에서 수류탄으로 잡는다고 했다. 급수장 에서는 회식이 있을 때마다 매운탕을 만들어 먹는다고 했다. 소총으로도 고기를 쏴서 잡는데 총에 맞은 고기는 먹을 게 없다고 했다. 그러나 수류탄을 한 방 까면 반 바커스 정도의 고기는 쉽게 잡힌다고 했다.

권 중사는 알파는 그리 먼 곳이 아니니 다음 주에 서로 만나 같이 고기를 잡자고 말했다. 붕어는 뼈가 악 시고 깊은 맛이 덜 했지만 전쟁터에서 붕어 매운탕 맛보기가 어디 그리 쉬운 일인가?

“장님(급수장), 고맙습니다. 맹호.”

김이수 하사가 진심으로 고마워하며 인사를 했다.

“잘 가게 김 하사, 또 보자.”

김 하사의 차가 급수장을 빠져 나오자 조금 전에 야단을 맞았던 14병기 대대의 미군 급수차가 뒤를 따라 나오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소나기가 쏟아졌던 하늘은 거짓말처럼 맑게 개어 있었다. 급수장에서 차가 숲길을 1km정도 빠져 나오자 작은 언덕길이 나타났다. 언덕 위에 올라 조금 전에 지나온 커브 길을 내려다보자 도로에는 그 동안 내린 소낙비로 누런 흙탕물이 질펀하게 고여 있었다. 조금 전 밭에서 일을 하던 여인들은 소나기를 피해 집으로 돌아갔는지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박 일병, 14병기 급수차를 먼저 보내라.”

갑자기 김이수 하사가 서둘러 M16 소총에 탄창을 갈아 끼우며 명령을 했다.

“왜 그런디유, 우리가 먼전디 재수옵게.”

“빨리 비켜 줘, 임마!”

말랑깽이 하사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박찬우 일병은 깜짝 놀라 핸들을 우측으로 돌려 길을 비켜 줬다.

“땡큐!” 영문을 모르는 14병기 급수차가 고맙다고 인사를 하며 위잉 하고 쏜살같이 옆으로 빠져나갔다.

‘성질 한 번 더럽네.’

박찬우 일병은 속으로 하사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차를 몰았다. 14병기 차를 따라 박찬우 일병이 기어를 일단으로 바꾸며 출발을 하려 하자 말랑깽이 하사가 손으로 저지하며 기다리라고 말했다. 그리고 엑스밴드에 걸린 수류탄을 뽑아 무릎 위에 나란히 놓았다.

박찬우 일병은 왜, 월남 신병 하사가 저 지랄을 하는지 몹시 궁금하고 이상했다. 14병기 급수차는 50m 전방의 커브 길을 이제 막 전속력으로 통과하고 있었다.

“꽝!”

“악!”

14병기 급수차의 앞바퀴가 흙탕물이 고인 커브 지점에 들어서자 천지를 진동하는 폭음과 함께 차량은 산산조각이 나며 하늘로 붕 떠올랐다. 미군 병사들의 살 조각들이 차량의 본 넷 위에 우박처럼 떨어졌다.

<다음호에 계속>

 기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