킬러 밸리 제 80회
킬러 밸리 제 80회
  •  기자
  • 입력 2009-09-15 14:59
  • 승인 2009.09.15 14:59
  • 호수 803
  • 56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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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중대는 순식간에 무너져 철수 지점으로 퇴각을 했지요. 아, 그런데 철수 헬기까지 적의 로켓포에 맞아 떨어 졌습니다. 퇴로가 봉쇄되자 우리들은 사방으로 흩어 졌습니다. 어둠 속에서 정신없이 튀었지요.”

“어디로?”

“그냥 도망쳤지요, 어딘지도 모르고……. 칠흑 같은 어둠 속을 정신없이 달렸지요. 더구나 가랑비까지 내렸어요. 짙은 밤안개로 한치 앞도 볼 수가 없었지요. 생지옥이었지요. 거긴 우리가 처음 보는 곳이었습니다. 정말 미칠 지경…….”

“사단장님께 받들어-이-총!”

“맹호!”

이제야 겨우 연병장에서 식이 시작되는 모양이었다. 두 사람은 대화를 중단하고 창 밖에서 들리는 구령 소리에 귀를 기우렷다. 연병장은 잠시 동안 조용하기만 했다.

“도원경? 그게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야, 무릉도원 말인가? 세상에 그런 게 어디 있어? 말도 안 돼는 소리, 에헤헤…….”

“정말로 있습니다, 그런 게 있었어요. 카펫 같은 푸른 초원에 하얀 대리석 건물, 정원에는 붉은 넝쿨 장미들이 만발했고 집 앞으로는 청록색 강물이 그림처럼 흐르고 있었지요. 그리고 예쁜 여자들도…….”

“꿈같은 소릴 하는군. 정말 여자들이 있었어? 정말이면 나도 좀 가 보게…….”

“본인은 이제 장병 여러분들의 전공과 무한한 노고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이번 작전에서 본 사단은 적 사살 27명, 포로 208명, 소화기 218정, 로켓포 8문, 박격포 12문을 노획하였습니다. 본 사단의 혁혁한 전공은 월남에 파병한 어떤 우방국들보다도 더 위대한 전공을 거두었습니다.

에-또, 본 사단은 대민 지원 사업에 더욱 분발하여 교량 3개소, 학교 5개소, 마을 회관 2동을 건립…….”

사단장의 치사가 고성능 마이크를 타고 연병장 가득히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계속해 보게, 김 하사.”

“도원경을 떠나 강물을 타고.”

“잠깐, 그렇게 좋은 곳을 왜 떠났나? 나 같으며 그곳에 눌려 앉아 살겠네.”

“킬러밸리에 큰 화재가 발생했습니다. 강물에 유입된 기름으로 도원경까지 불길이 번졌어요. 그래서…”

“본인은 맹호 A호 작전에서 용감히 싸우다 전사한 전우들과 부상을 당한 병사들에게 진심으로 애도와 위로의 마음을 전합니다. 앞으로 본 사단은…….”

“이보게 김 하사, 그게 정말이야? 참말로 연대나 사단 규모의 정규군들이 킬러밸리에 주둔하고 있었단 말이지? 이건 공식적인 질문하고는 관계없는 이야기야. 정말 그렇게 많은 병력을 봤어? 내가 궁금해서 그래…….”

우영진 소령은 새로 신탄진 담배 한 개비에 불을 댕기며 물었다. 김이수 하사는 우 소령이 건너 준 16절 갱지에 연필로 자세히 약도까지 그려가며 병력 주둔 상황을 세밀하게 설명 했다. 그리고 월맹군 38연대가 그들의 공격으로 탄약고와 연료 저장고가 폭발 하며 괴멸되는 과정을 자세히 설명을 했다. 탄약고가 폭파되었을 때 원인을 알 수 없는 B52 비행기의 폭격에 대해서도 말했다. 마지막으로 김이수 하사는 킬러밸리에서 끝까지 행동을 같이했던 임태호 상병과 변을수 일병의 비참한 최후를 담담하게 말했다.

“지축을 울리는 폭음과 함께 탄약고가 폭발했어요. 순간,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왜, 두 사람이 약속 시간 보다 5분간이나 먼저 탄약고를 공격했는지, 이해 할 수가 없었지요. 폭음과 함께 밀림 속에서 갑자기 강력한 서치라이트가 두 사람을 잡았습니다. 교차되는 조명 속에 걸린 두 사람은 살 맞은 노루처럼 멍청하게 그 자리에 서서 손으로 눈을 가리더 군요. 8000룩스의 조명을 1초만 정면으로 받아도 각막은 순식간에 타 버려요. 우두커니 서 있는 변 일병을 향해 그들은 벌떼처럼 달려들었어요. 그리고 대검으로 도살장에 소를 잡듯 내리쳤습니다. 눈이 보이지 않는 변 일병은 돼지처럼 비명을 지르며 나동그라졌지요. 변 일병이 쓰러지자 임 상병이 M16 소총의 개머리판을 미치듯이 휘두르며 변 일병을 가로막았습니다.”

“잔인하군. 그만하게.”

우 소령은 침울한 얼굴로 신탄진 담배 연기를 가슴 깊숙이 빨아 드리며 말했다. 두 사람은 한동안 할 말을 잃고 서로를 쳐다보기만 했다.

“1대대 3중대 병장 백정기 화랑무공훈장, 1대대 2중대 하사 윤영식 화랑무공훈장, 앞으로!”

“도라-지 도-라-지 백-도라지…….”

악대가 흥겨운 도라지 타령을 연주하자 박수 소리가 연병장을 가득 채웠다. 연병장은 사단장의 치사가 끝나고 어느새 훈장 및 부대 표장이 수여되고 있었다. 호명이 된 병사들은 사단장님께 경례를 하고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 채 훈장을 받고 있었다.

“저는 더 이상 처참한 몰골을 볼 수가 없어 밀림 속에 은폐된 연료 드럼통에 수류탄을 던졌습니다. 드럼통이 터지면서 시커먼 불길이 원시림을 뚫고 하늘로 치솟아 올랐지요. 그리고 불이 붙은 휘발유가 벙커와 진지를 덮쳤습니다. 진지는 불길에 휩싸이며 거대한 용광로처럼 꿇어 올랐어요. 저는 두려움에 떨며 절벽을 기어 올라갔지요. 그런데 갑자기 B52 한 대가 상공을 지나면서 우박처럼 폭탄을 쏟아 부었어요. 저는 그 충격으로 정신을 잃고 절벽에서 떨어졌습니다. 의식을 잃었지요. 그리고 눈을 떠보니 미군 부대의 막사 안이었습니다. 그게 전붑니다.”

김이수 하사가 말을 마치고 우 소령을 담담하게 바라보았다.

“믿을 수가 없어. 우연치고는 너무해, 누가 그런 말을 믿겠나?”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귀관은 금년에는 우기 대공세가 없다고 생각하겠지?킬러밸리에서 적의 정예 연대가 괴멸 당했으니……. 아무든 조금 더 두고 보면 알겠지? 그러나 이거 하나만은 분명해. 아무도 귀관의 말을 믿지 않는다는 사실말이야.”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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