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느새 그의 몸은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옷은 갈기갈기 찢어져 넝마가 되었고 오른 팔은 어깨에서부터 절단이 되어 떨어져 나가고 없었다. 상처에서는 붉은 핏줄기가 분수처럼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그는 도살장에서 도끼를 맞은 돼지처럼 괴상한 목소리로 울부짖었다.
“지혜야 살려줘.”
그는 울부짖으며 피투성이 손을 내밀어 그녀의 옷깃을 거머잡았다.
“으악!”
지혜는 비명을 지르며 잠에서 깨어났다. 온 몸이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그녀는 겁에 질려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손끝 하나도 까딱할 수가 없었다. 방안은 이해할 수 없는 음산한 냉기와 요사스러운 기운으로 가득 차 있었다. 푸른 달빛이 창호지 문의 중간에 걸려 있었다. 그녀는 하얀 창호지에 어리는 달빛에 눈이 부신 듯 손으로 눈동자를 비볐다. 그리고 손을 떼는 순간, 무서운 비명 소리를 질렀다.
창호지 문에 검은 그림자가 떠오르고 있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앙상한 감나무 가지 사이로 또렷이 내비치는 검은 그림자. 그것은 방금 본 변을수의 모습이었다.
조금 전 꿈속에서 피투성이가 된 채 그녀의 옷깃을 거머잡던 을수가 문종이 위에 그림자로 천천히 떠오르고 있었다. 을수는 철모를 쓰고 오른쪽 팔이 절단된 채 지혜를 마주보고 서 있었다. 그녀는 깜짝 놀라 책상 위에 놓인 괘종시계를 바라보았다. 시계 바늘은 자정이 지나 어느새 1시 24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을수야!”
지혜가 목이 메여 울부짖었다. 둥근 보름달이 조금씩 기울자 창호지 위에 비치는 을수의 그림자는 점점 위쪽으로 올라가기 시작 했다. 드디어 을수의 그림자가 창호지 문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을수야!”
그녀는 방문을 걷어차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리고 을수의 그림자를 찾았다. 텅 빈 마당에는 하얗게 파도만 밀려오고 있었다. 그녀는 바닷가에 우두커니 서서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쟁반같이 동근 보름달 위로 음산한 한 조각의 구름이 외롭게 떠돌며 지나가고 있었다. 그녀는 왈칵 울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이내 땅바닥에 다리를 쭉 뻗고 앉아 통곡을 했다.
그녀가 목숨을 바쳐 사랑하던 사람이 마지막으로 어둡고 먼 태평양 바다를 건너 그녀를 찾아온 것이다. 그리고 그녀 곁을 영원히 떠나 버린 것이다. 그것은 시공을 초월한 한 남자의 사랑이 하얀 달빛이 되어 연인에게 작별의 인사를 하기위해 멀고 먼 겨울 밤바다를 건너 온 것이다. 그들은 오직 남녀 간의 지극한 사랑의 힘으로 찰나에 비밀의 문을 열고 서로 사랑하는 사람을 볼 수가 있었다.
그날 밤 같은 시간에 멀고 먼 태평양 바다 건너 낮선 이국의 땅, 킬러밸리에서 변을수 일병은 적의 정글도를 오른쪽 어깨에 맞고 팔이 절단 된 채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그는 7중대가 킬러밸리 입구, 매복 전투에서 전사자로 처리된 후에도 개미허리 김이수 하사, 임태호 상병과 함께 29일 동안을 더 살아 있었다. 그러나 오늘밤 이 시간, 01시 24분에 킬러밸리 월맹군 38연대 탄약고 부근에서 적의 정글 도를 맞고 전사하였다. 월남전 파병은 1964년 월남정부의 군사적인 지원 요청에 의해 제44대 국회 본 회의에서 해외 파병 동의안이 가결됨에 따라 시작되었다. 1964년부터 1973년 3월 23일 마지막 철수 시 까지 8년 8개월 동안 연인원 372,850명이 참전하였다.
그리고 참전자중 한국군 5,077명이 사망하였고 10,960명이 부상을 당했다. 그리고 미군들이 살포한 고엽제에 7만 여명이 피폭을 당하여 지금도 투병 생활을 하고 있다. 1964년에는 비전투 부대인 의무부대와 비둘기 부대가 월남으로 갔다. 그러나 주월 한국군 사령부가 월남에 창설됨에 따라 맹호부대, 백마부대, 청룡부대, 십자성 부대, 백구부대, 은마부대 등 전투부대가 파병되었다.
병사들은 자기들을 강제로 낮선 이국의 전쟁터로 보낸 부산의 제4부두를 ‘노여움의 나루’라고 불렀다. 제4부두(노염의의 나루)에서 월남으로 파병된 372,850명의 장병들 중에 5,077명은 그곳에서 전사하여 귀국선을 타지 못했다. 그들은 한 때 자기들을 그곳으로 보낸 조국으로부터 용병이라고 비난을 받으며 박대를 당했었다. 대한민국 근대화의 초석이 된 그들을 과거 정부는 용병으로 매도하며 배신을 했다. 그러나 병사들은 조국의 이름으로 하나뿐인 자신의 소중한 생명까지 받치며 국가에 대한 충성을 다했었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물질적인 풍요와 선진 한국의 경제적 부는 낮선 이국에서 자신의 소중한 생명을 조국에 받치며 산화한 이름 모를 병사들의 피와 눈물이 이룩한 것이다.
잊지 마오 조국이여! 아직도 귀국선을 타지 못 한 5,077명의 병사들은 조국을 향해 밤이면 푸른 중대기를 앞세우고 군화소리도 요란하게 진짜사나이를 부르며 어둡고 먼 태평양 바다를 건너오고 있다.
도깨비 같은 놈
개미는 허리힘으로 산다
풋갓 비행장 경비대 소속, 19번 해안도로 순찰대는 가랑비를 맞으며 해안선을 수색하고 있었다. 19번 해안도로는 넓은 들판을 지나 태평양 연안을 끼고 북쪽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수색대는 통상적인 순찰 업무였기 때문에 수색은 건성으로 하고 지난밤 P. X에서 비밀히 상영한 이태리 산 포르노 영화에 대해 킬킬거리며 야한 농담을 하고 있었다. 갑자기 분대장 덴 스미스 하사가 허쉬(쉬)! 하고 속삭이며 갈대밭에 엎드렸다. 그리고 파도가 끊임없는 밀려오는 해안의 모래톱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해안은 태풍의 영향으로 높은 파도가 치고 있었다. 파도는 하얀 물거품을 일으키며 해변으로 밀려들어오고 있었다.
19번 해안도로가 지나는 이곳 해안은 내륙에서 흘러내린 강물이 킬러밸리를 통과하여 태평양 바다와 합수 되는 지점이었다.
<다음호에 계속>
기자
저작권자 © 일요서울i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