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대장의 편지를 읽은 지혜는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오빠는 아직 죽지 않았어. 오빠가 죽었다면 내가 모를 리가 없지. 넌, 영혼의 존재를 믿지 않니? 난 오빠가 월남으로 떠난 후 이곳으로 와서 매일 밤 저 바다를 보며 기도를 했어.”
그녀는 벌떡 일어나 작은 창문을 열었다. 파도 소리와 함께 비릿한 갯바위 냄새가 코를 찔렀다. 파도는 지혜가 거처하는 자취방의 마당 앞까지 밀려오고 있었다.
“세란아, 내가 왜 여길 온지 아니? 오빠 때문이야. 저 바다를 바라보고 있으면 오빠를 보는 것 같아. 수평선 저 멀리서 오빠가 내게 손짓을 하는 거야. 여기선 오빠가 훨씬 더 가깝게 느껴져. 바다 끝이 보이지? 저긴 월남이야. 나는 바다 건너 저편에 있는 오빠와 밤 새워 이야길 했어. 지난밤에도 늦도록 오빠와 대화를 했지.”
그녀의 얼굴에는 광기가 어려 있었다. 확신에 찬 단호한 표정과 믿음은 세란이를 무섭게 했다. 남녀 간의 사랑은 신비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중대장이 전사했다는 편지까지 보내왔는데도 지혜는 믿으려 하지 않았다.
“지혜야, 정말 오빠가 살아 있을까?”
세란이가 지혜의 눈동자를 마주 바라보며 물었다
“오빠는 아직은 살아 있어. 난 알 수 있어. 오빠에게 무슨 일이 있었다면 내가 어떻게 오빠와 대화를 나눌 수가 있었겠니? 중대장님이 을수 오빠가 죽었다고 편지에 쓴 날 밤은 잠을 잘 수가 없었어. 눈만 감으면 악몽에 시달렸지. 그러나 죽진 않았어.”
지혜는 확신에 차서 말했다.
“오빠가 살아 있다면 얼마나 좋겠니.”
“세란아, 오빠는 안 죽었어. 어딘가 분명히 살아 있을 거야.”
세란이의 얼굴 표정이 밝아졌다. 그녀는 변을수의 전사 소식을 전하고 바로 저녁차로 서울로 올라갔다.
12월의 겨울 바다는 어둠 속에서 차갑게 밀려오고 있었다. 바다 위에는 이제 막 둥근 보름달이 두둥실 하늘 높이 떠오르고 있었다. 지혜는 변을수의 전사 통지를 믿을 수가 없었다. 을수가 죽었다면 그녀가 모를 리가 없었다. 아직도 그녀는 변을수의 죽음을 믿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지금도 변함없이 매일 한 통씩 월남으로 편지를 보내고 있었다. 한참 동안 엎드려서 편지를 쓰던 그녀는 일어나 백열등 스위치를 비틀어 불을 끄고 담요를 덮고 누웠다. 하얀 달빛이 작은 창문으로 살며시 기어 들어왔다. 그녀는 하품을 길게 하고는 눈을 스르르 감았다. 지혜는 을수와 함께 종로 3가에 있는 감상실에서 음악을 들으며 따끈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그녀는 마주 앉은 바보 같은 사내의 해맑은 눈동자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론니 아임 미스터 론니…’
요즘 한창 유행하는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을수의 눈동자는 지혜에게 무엇인가 애원을 하고 있었다. 그의 새까만 눈동자는 자신의 감정을 숨기는 법이 없었다. 언제나 말보다 눈동자가 더 솔직하게 말하고 있었다. 그의 눈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지혜야 그만 여길 나가자. 숨이 막힐 것 같아. 동작동 국립묘지 잔디밭에 앉아 밤이나 구어 먹자.’
지혜는 자신이 어떻게 을수의 마음을 읽었는지 스스로도 신기했다.
“여기서 나가고 싶지, 그치? 국립묘지에 가서 모닥불에 알밤을 구어 먹고 싶지? 을수야, 니 눈동자가 그렇게 말하고 있어.”
“어떻게 알았어?”
변을수가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눈동자가 그렇게 말하는 걸.”
두 사람은 감상실에서 나와 흑석동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그리고 흑석동 시장에서 햇밤을 산 다음 동작동 국립묘지로 갔다. 국립묘지는 일부만 묘지로 사용하고 나머지는 울타리도 없이 갈대만 수북이 욱어져 있었다. 묘지 부근에서 조금만 외곽으로 나오면 잡초가 욱어진 갈대밭으로 아이들의 놀이터도 되고 연인들의 데이트 장소이기도 했다. 동작동에 도착하자 을수는 소풍가는 소년처럼 신이 나서 좋아했다. 지혜는 그가 좋아하는 모습을 보며 동작동으로 오기를 잘했다고 생각 했다. 당시만 해도 동작동 국립묘지를 찾아오는 사람은 아주 드물었다.
그리고 그곳에 근무하는 사람들의 눈길이 미치지 않는 곳도 많았다. 두 사람은 그곳에 잠들어 있는 병사들의 묘비명을 구경하며 뒤편 언덕으로 올라갔다. 그곳에는 많은 전사자들이 누워 있었다. 전쟁터에서 죽은 병사들의 이야기는 두 사람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남의 이야기였다.
묘지를 지나서 넓은 갈대밭으로 갔다. 하얀 갈대가 깃발처럼 춤추는 언덕에서 을수는 나뭇가지를 줍고 지혜는 모닥불을 피웠다. 그리고 알밤을 모닥불에 집어넣었다.
탁탁 소리가 날 때마다 노란 밤알이 톡 튀어 나왔다. 두 사람은 노란 밤알을 주어먹으며 사랑을 속삭였다.
갑자기 불똥이 탁탁 소리를 내며 높이 튀어 올랐다. 그 불똥이 을수의 옷깃에 옮겨 붙었다. 당황한 을수는 깜짝 놀라 옷깃을 털며 불을 끄려 했으나 불길은 어느새 몸 전체에 옮겨 붙어 버렸다. 을수는 불길에 휩싸이며 처참하게 울부짖었다.
“살려줘, 지혜야!”
<다음호에 계속>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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