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태호 상병이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그의 눈은 변을수 일병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마침내 변 일병도 고개를 끄덕였다. 개미허리가 배신하기 전에 먼저 그를 배반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유일하게 사는 길이었다.
미친 듯이 불어오는 강풍에 나뭇가지들이 몸부림을 치며 울부짖었다. 바람은 광란하는 파도와 같았다. 밀림의 우거진 숲들을 갈기갈기 찢어놓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탄약고를 지키는 보초에게 접근을 시작했다. 강풍이 두 사람의 접근을 은폐 시켜 주고 있었다.
보초는 바람을 피해 나무 밑에 움츠리고 있었다. 바람에 발자국을 숨긴 임태호 상병이 고양이처럼 접근하여 적병의 목을 팔로 조이며 대검으로 늑골을 찔렀다. 보초가 쓰러지자 임태호 상병이 수신호를 보냈다. 변을수 일병이 수류탄을 까서 탄약고에 던졌다. 꽝! 하는 폭음과 함께 지축이 흔들렸다.
꽝꽝!
밀림을 갈가리 찢어 놓는 폭음과 함께 천지를 진동하는 폭음이 계곡을 무섭게 흔들어 놓았다. 버섯 모양의 검은 연기가 원시림을 뚫고 밤하늘 높이 솟아올랐다. 산더미처럼 야적 된 포탄과 탄약들이 축제날의 불꽃놀이처럼 꽝꽝 소리를 내며 연달아 터지기 시작했다.
변을수 일병은 탄약고가 폭파되는 순간, 강렬한 충격으로 뒤로 벌렁 나가 떨어졌다. 그와 동시에 눈앞에 강렬한 섬광이 휘하고 지나갔다. 그는 두 손으로 눈을 가리며 비틀거렸다. 캄캄한 어둠 외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한편 개미허리는 낮은 포복으로 연료 저장고에 접근을 시작했다. 짙은 어둠 속에서 개미허리는 정신을 집중하며 적이 설치한 조명탄의 인계 철선을 조심스럽게 밀어내었다. 인계 철선은 거미줄처럼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초속 30미터가 넘는 강풍을 동반한 가랑비가 후드득 소리를 내며 얼굴 위에 떨어지고 있었다.
드디어 개미허리는 연료 저장고에 무사히 도착했다. 연료 드럼통이 숲 속에 교묘하게 은폐되어 있었다.
개미허리는 반듯하게 누워 탄띠에 차고 있던 표창을 뽑아 가슴 위에 나란히 늘어놓았다. 강한 빗방울이 얼굴을 때리며 지나갔다.
흘깃 야광 시계를 바라보자 어느새 0시 5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20분 뒤에는 드럼통을 공격하여 저장고를 폭파해야 했다. 그는 누워서 저장고에 수류탄을 투척한 후 어떻게 여기를 빠져나갈 것인지를 세밀하게 마음속에 그려 보았다.
먼저 그는 성곽처럼 어둠 속에 버티고 있는 저 절벽 위로 기어 올라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곧장 남쪽으로 방향을 잡아야 할 것이다.
그가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2명의 보초가 나타났다. 개미허리는 가슴 위에 놓여 있던 표창을 양손에 하나씩 잡고 손끝을 세웠다. 그리고 잠든 사람처럼 가만히 누워 있었다.
저벅저벅.
발자국 소리와 함께 잡초를 헤치며 보초들이 가까이 다가왔다. 개미허리는 입술을 깨물며 손끝에 힘을 주었다.
“얍!”
개미허리가 몸을 일으키며 짧은 기합 소리와 함께 표창을 던지자 두 개의 흰 섬광이 강풍을 가르며 날아갔다. 두 명의 월맹군이 힘없이 쓰러졌다.
그때였다. 꽝! 하는 폭음과 함께 계곡 전체가 심하게 흔들렸다. 계곡은 마치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출렁거렸다. 개미허리는 화들짝 놀라 시계 바늘을 바라보았다. 야광 시계 바늘은 01시 1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무엇인가 일이 크게 잘못되고 있었다. 탄약고가 약속 시간보다 5분이나 먼저 폭파되었다. 기습 조가 발각된 것일까?
탄약고는 마치 불꽃놀이라도 하듯 폭죽처럼 연달아 터지고 있었다.
그런데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밀림 속에서 갑자기 강력한 섬광이 쏟아져 나왔다. 8천만 촉광의 강력한 제논 서치라이트의 불빛이었다. 그 불빛은 탄약고를 향해 쏘아졌다.
임태호 상병과 변을수 일병이 덫에 걸린 토끼처럼 강력한 불빛 속에 멍청하게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두 사람은 도망을 치려했으나 방향을 잡지 못하고 허우적거리기고 있었다.
두 사람은 눈이 보이질 않는 것 같았다. 짧은 거리에서 쏜 8천만 촉광의 강력한 서치라이트는 눈의 각막을 순간적으로 태워 버린 것이다. 그들은 폭발하는 탄약고를 배경으로 두 손으로 눈을 비비며 대사를 까먹은 무대위의 배우처럼 우두커니 서 있었다.
개미허리는 눈을 감았다. 심장의 피가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 최악의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수많은 월맹군들이 두 사람에게 증오에 찬 욕설을 퍼부으며 접근하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눈이 먼 두 마리의 토끼를 수많은 사냥개가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적의에 차서 울부짖는 소리와 같았다.
사냥개가 토끼를 물어뜯기 시작했다. 월맹군은 두 사람을 대검으로 찌르기 시작했다. 고통을 주어 천천히 죽일 심산인 것 같았다. 두 사람은 순식간에 피투성이가 되었다.
변을수 일병이 오른쪽 어깨를 감싸 쥐고 비틀거리며 나동그라졌다. 임태호 상병이 총알이 떨어진 M16 소총을 거꾸로 잡고 미친 듯이 휘두르며 울부짖었다.
“야, 이 새끼들아! 한꺼번에 덤비라. 전부 때려 직이 뿔끼다. 죽으면 한 번 죽지 두 번 죽나. 야! 덤벼, 어서 덤벼. 생쥐같이 숨어 있지만 말고 한꺼번에 덤비라.“
시력을 상실한 임태호 상병은 한 손으로는 변을수 일병의 어깨를 감싸 안고 다른 한 손으로는 미친 듯이 총대를 휘두르고 있었다.
“변 일병, 겁내지 마라! 내가 안 있나. 걱정하지 마라. 이 새끼들은 내가 전부 때려 직이 뿔기다.”
여전히 그는 허세를 부리며 수많은 월맹군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는 조금도 기가 죽지 않고 있었다.
월맹군들은 악에 바친 임태호 상병이 총검을 휘두를 때마다 조금씩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사냥개들은 오래 기다리지 않았다. 그들은 곧 토끼를 물어뜯기 시작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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