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바라가 놀라서 소리를 지르자 술이 엉망으로 취한 머피는 바바라를 껴안으려고 했다. 그런데도 길버트 윌리암스는 위기에 처한 바바라를 멍청하게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때 바바라의 위기를 구해준 학생이 스코트였다. 당시만 해도 스코트는 여학생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는 촌뜨기였다. 스코트는 단 한방에 머피를 체육관 바닥에 뉘여 버렸다. 그리고 두 사람은 급속히 가까워졌다.
그 후 두 사람은 결혼을 했다. 그리고 딸 지나가 잠에 취한 목소리로 아빠하고 부르는 소리는 그의 생활에 가장 소중한 부분이 되었다.
아내 바바라와 딸 지나는 그의 생명이었고 삶의 존재 이유였다. 아내 바바라는 주립 도서관의 사서였다. 그가 월남으로 파견되고 난 후 그녀가 하는 일은 월남 전쟁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는 일이었다.
그는 소년 시절의 꿈인 비행사가 되었고 사랑스러운 아내와 예쁜 딸을 둔 가장이 되었다. 그에게는 이 이상 더 바랄 것이 없는 만족한 생활이었다. 그런데 월남으로 온 지금 모든 것이 엉망으로 변해 버렸다.
그와 친한 조종사들은 수시로 전사하거나 실종이 되었다. 그들도 그와 똑같은 삶을 가진 전우들이었다. 월남에서 보낸 육 개월이 그에게는 수십 년의 세월이 지난 것만 같았다. 사진 속의 지나는 한결 더 예쁘고 어른스러워 보였다. 그는 어서 빨리 아내 바바라에게 돌아가고 싶었다. 이 지옥 같은 전쟁터를 떠나서 말이다. 요즘은 전쟁이 더 격렬해지는 것 같았다. 근무 스케줄도 종잡을 수가 없었다. 새벽 2시에 일어나 세 차례나 출격한 후, 오후에 취침을 하는 그런 불규칙한 생활의 연속이었다.
함재기는 하노이를 폭격하기 위해 출동하는 B52의 호위 임무를 주로 하고 있었다. B52는 풋갓 비행장에서 발진하여 항공모함에서 뜬 함재기들을 만나 하노이로 날아갔다.
지난밤에만 해도 하노이 상공에서 보낸 13분은 지옥의 연속이었다. 샘 미사일은 불붙은 전봇대처럼 아무 곳에서나 날아왔다. 그리고 구름 속에서 느닷없이 내리 꽂히는 미그기와의 사투는 정말 무서웠다. 하노이 행은 조종사들의 비행복을 땀으로 흠뻑 젖게 했다. 입술은 밀가루를 바른 것처럼 하얗게 타고 헝클어진 머리카락은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매일매일 로마의 검투사처럼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싸워 오고 있었다. 스코트 대위는 이 전쟁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도대체 우리는 이 전쟁에서 지고 있는가, 이기고 있는가? 미국의 검투사들은 전쟁의 전체적인 국면을 알 수가 없었다. 오히려 매일 TV 뉴스를 보고 있는 바바라가 전쟁의 총체적인 국면을 더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브리핑을 받고 출격을 하고, 무사히 귀함을 한 다음에는 너무 지쳐 샤워도 하지 못한 채 잠을 자야 하는 생활이 끝없이 반복되고 있는 스코트 대위에게는 하루하루가 지옥의 연속이었다.
그는 잠이 들면 꿈속에서도 악몽에 시달렸다. 조종간을 아무리 잡아 당겨도 비행기는 상승을 하지 않았다. 샘 미사일은 악착같이 쫓아오는데 함재기는 움직이지를 않았다. 갑자기 미그기가 정면으로 가미가제처럼 달려들기도 했다. 스코트 대위는 놀라서 비명을 지르며 잠을 깨기도 했다. 잠을 깨면 온 몸이 땀으로 뒤범벅이 되어 있었다. 베개 커버가 목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알프레드 스코트 대위에게 조용한 시간이 있다면 오직 비상 출격에 대비하여 방공 근무를 하는 시간만이 유일하게 자유로운 시간이었다.
오늘 새벽에도 카펜터 대위가 하노이에서 귀함 중 실종되었다. 구조 헬기가 바다를 샅샅이 뒤지고 다녔지만 이 넓은 바다에서 어디서 그를 찾겠는가?
스코트 대위는 밤하늘을 쳐다보았다. 시커먼 먹구름이 빠른 속도로 지나가고 있었다.
삐익 하고 경보 음이 울렸다 그는 재빨리 시계를 보았다. 24시 32분이었다.
“스코트, 듣고 있나? 출격 준비, 발진!”
관제탑에서 명령이 떨어지자 그는 브레이크를 풀었다. 함재기는 어두운 바다 위를 향해 쏜살같이 날아올랐다.
임태호 상병과 변을수 일병은 예정 시간보다 빨리 탄약고에 접근했다. 두 사람은 탄약고 뒤편의 숲 속에서 공격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야광 시계의 바늘은 어느새 24시 44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만일에 말이다. 연료 저장고가 먼저 터졌다 카몬 우리는 묵사발이 된데이. 대낮같이 밝은 불빛에 벌거벗은 처녀 꼴이 되는 기라. 변 일병, 니 한번 생각해 봐라. 그래 안되겠나? 그라이 우리가 먼저 터뜨리자. 개미허리는 재주가 좋은 놈이니까 알아서 길 거야. 저장고는 고지대라 노출이 안 된다 카이. 니 생각은 어떠노?”
임태호 상병이 변 일병에게 속삭였다.
변을수 일병은 이곳에 침투하기 전에 지난밤에 꾼 악몽을 임 상병에게 말했다. 달리는 열차에 서 있는 자신을 개미허리가 발로 등을 차서 어두운 골짜기로 떨어진 그 꿈을 이야기 했다.
그것은 개미허리의 배신을 의미하는 것 같았다. 소문대로라면 그는 먼저 저장고를 터뜨리고 두 사람을 미끼로 던지고 혼자서만 도망칠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개미허리가 그렇게 할까? 아마도 틀림없이 그렇게 할 것이다. 두 사람이 미끼가 된다면 그는 안전하게 이곳을 탈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귀대해서는 우리 두 사람이 전사했다고 말할 것이다. 변을수 일병은 그런 불안감 때문에 꿈 이야기를 임태호 상병에게 한 것이다.
“변 일병, 니도 그런 꿈꿨나? 저 자슥의 수작을 내가 모를 줄 알고. 어림없다, 탄약고를 지 혼자서 맡는다고 캤을 때 내가 벌써 눈치를 챘다마. 전마 자식이 하는 수작을 내가 모를 줄 알고? 택도 없다, 다른 놈은 다 속아도 난 안 속는다. 우리가 먼저 까는 기야. 01시 10분에 탄약고를 먼저 터뜨리는 기라. 변 일병 내 말 알것제?”
<다음호에 계속>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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