킬러 밸리 제 67회
킬러 밸리 제 67회
  •  기자
  • 입력 2009-06-17 09:15
  • 승인 2009.06.17 09:15
  • 호수 790
  • 56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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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16 소총으로 보초를 사살하고 수류탄으로 탄약고를 날린 뒤 정글 속으로 도망칠 생각이었다.

그러나 C P 뒤편의 계곡에 은폐된 연료 저장고는 폭파되는 순간, 기습 조가 불빛에 완전히 노출될 것 같았다. 그것은 병사들이 가장 싫어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임태호 상병이 탄약고를 맞겠다고 하는 것 같았다.

“시계를 맞추자. 폭파 시간은 01시 15분. 동시에 꽝 하는 거야. 어느 한쪽이 먼저 터뜨리면 다른 한편은 바로 노출될 거야. 그땐 이거지.”

개미허리는 손가락으로 목을 치는 시늉을 했다.

“한쪽은 살지만 다른 쪽은 죽어. 알아서들 하라고.”

개미허리가 또 한 번 다짐을 했다.

“그럼 내가 먼저 간다.”

말을 마친 개미허리는 표창을 꺼내 탄띠 속에 찔러 넣었다. 그리고 바로 절벽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변을수 일병은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가랑비는 어느새 그치고 구름 사이로 둥근 보름달이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달빛에 어리는 강물 위에는 짙은 물안개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지혜야, 이게 마지막 승부야. 여기서 빠져나갈 수만 있다면 너를 만날 수 있겠지. 그러나, 그러나… 여길 통과하지 못하면 나는 죽음의 계곡에서 영원히 살겠지. 어둡고 습기 찬 계곡에서 말이야. 그러나 지혜야. 내가 비록 이곳에서 죽는다고 해도 나는 달빛이 되어 너를 찾아갈 거야. 달이 뜨는 밤이며 푸른 달빛이 되어 너를 찾아갈 거야.’

“뭘 보노, 임마. 니 정신을 어디다 팔고 있노? 정신 바짝 차리거라. 안 그라면 귀신도 모르게 디진데이. 조짜 봐라, 조기 보이제?”

“안 보이는데.”

구름이 달빛을 가리자 절벽 아래 계곡은 잠깐 동안 암흑 속에 잠겨 버렸다.

“저기다, 조짜.”

임태호 상병이 다시 손가락으로 어둠 속을 가리켰다. 희미한 달빛 속에서 검은 그림자가 재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개미허리였다. 개미허리는 어느새 지휘소 부근까지 접근하고 있었다. 그는 벙커 뒤로 몸을 숨기고 있었다.

짙은 먹구름이 달빛을 가리자 계곡은 또다시 어둠 속에 숨어 버렸다.

‘지혜야, 여긴 정말 지옥이야. 사람들이 살고 있는 밝은 세상이 보고 싶다. 눈부신 햇빛과 유쾌한 웃음소리를 듣고 싶어.’

구름이 다시 걷히자 밝은 달빛이 계곡을 환하게 밝혀 놓았다.

“저런, 우짤고?”

임태호 상병이 놀라서 소리쳤다. 개미허리가 벙커 뒤에서 나오는 순간, 두 명의 순찰 조가 불쑥 나타난 것이다. 개미허리는 그들과 정면으로 부딪쳤다. 그런데 개미허리는 놀랍게도 뒷짐을 지고 태연히 순찰 조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느닷없이 두 사람의 무릎을 까버렸다.

두 명의 순찰 조는 깜짝 놀라 부동 자세로 경례를 부쳤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뒷짐을 지고 지휘소로 걸어가고 있었다.

다시 먹구름이 달빛을 가리자 계곡은 깊이를 알 수 없는 깊은 어둠 속으로 떨어졌다.

캘리포니아 출신 알프레드 스코트 대위는 항공모함의 비행 갑판 위에서 비상 출격 신호를 기다리며 함재기 속에 앉아 있었다. 바다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잠겨 있고 높은 파도가 일고 있었다. 항공모함 상공에는 시커먼 먹구름이 빠른 속도로 지나가고 있었다.

스코트 대위는 비행 계기판이 내는 짤칵짤칵 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고개를 들고 밤하늘을 쳐다보았다. 유성이 긴 꼬리를 끌며 바다에 떨어지고 있었다. 그 역시 어느 한 순간에 살아질 지도 모르는 별똥과 같은 존재였다. 그는 비행복의 상의 호주머니의 지퍼를 열고 벌써 수십 번도 더 본 칼라 사진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계기 판의 푸른 불빛에 그것을 비춰 보았다.

아내 바바라와 외동딸 지나가 집 앞 요트 선착장에서 활짝 웃고 있는 사진이었다. 지나는 여섯 살. 사진 속의 그 애는 앞 이빨이 두 개나 빠진 채 활짝 웃고 있었다. 아내는 이 사진을 지난 번 편지 속에 동봉하여 보내 왔었다. 그는 이 사진을 비행 수첩 속에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었다. 그는 사진을 볼 때마다 딸애가 아빠! 하고 집 앞의 선착장에서 부르는 소리를 들을 수가 있었다.

불과 6개월 전만 해도 그는 딸애를 보트에 태우고 집 앞의 선착장을 돌며 송어 낚시나 즐기는 한가로운 직업 군인이었다. 그는 평범하게 지상 근무를 하던 별 볼일이 없는 해군 조종사였다.

비행사가 되는 일은 그의 소년 시절의 오랜 꿈이었다. 하늘을 마음대로 날아다니는 일은 신기하고 멋있는 일이었다.

그는 훈련기를 타고 처음으로 하늘을 날아오르던 단독 비행을 아직까지도 잊을 수가 없었다.

집과 자동차, 그리고 사람들이 장난감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푸른 숲과 넓은 대지는 한 폭의 그림과도 같았다. 그렇게 넓은 공간을 그의 비행기는 날아가고 있었다. 비행기는 그의 손끝 하나 하나에 따라 자유자재로 움직이며 새처럼 비행하고 있었다. 그는 처음으로 비행을 하던 날의 희열을 결코 잊을 수가 없었다.

스코트 대위의 지상 근무는 한가로운 생활의 연속이었다. 아내 바바라와 딸 지나, 그리고 비행기가 생활의 전부였다. 비행이 없는 날은 아내와 함께 집 앞에 서 있는 자작나무 그늘에서 시시껄렁한 잡담으로 시간을 보냈었다. 두 사람의 대화는 주로 고등학교 시절에 아내 바바라를 쫓아 다녔던 길버트에 관한 이야기가 아주 많았다.

아내가 만약 자기와 결혼하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길버트와 짝을 이루었을 것이다. 스코트는 길버트를 얼간이라고 불렀다. 스코트가 길버트를 그렇게 부르는 이유는 마지막 졸업 파티에서 생긴 일 때문이었다.

그때만 해도 바바라는 길버트를 더 좋아하고 있었다. 바바라와 길버트가 킴 매리 악단이 연주하는 체인징 파트너에 맞춰 춤을 추고 있을 때 악동 머피가 바바라의 야회복 속으로 손을 불쑥 집어넣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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