킬러 밸리 제 64회
킬러 밸리 제 64회
  •  기자
  • 입력 2009-05-26 16:54
  • 승인 2009.05.26 16:54
  • 호수 787
  • 56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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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길 봐.”

개미허리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강의 상류에서 수많은 병사들이 내려오고 있었다. 병사들의 군복은 남루했고 부상자들이 아주 많았다.

“지휘소에서 300미터 거리에 대포 6문, 소련제 지프차 한 대. 그거 참 이상하군. 어떻게 지프차가 여기까지 왔을까? 저건 뭐야? 으음, 휘발유 드럼통 같은데 묘하게 위장했어. 연료 저장고에서 거리 100미터 지점에 탄약고 보초 6명.”

개미허리가 정밀하게 관측을 할 때마다 임태호 상병은 수첩에 꼼꼼히 메모를 하고 있었다. 강의 상류에서는 아직도 많은 병사들이 외줄로 서서 뱀처럼 꿈틀거리며 내려오고 있었다. 어떤 병사들은 들것에 실려 있었다.

“바람이 와 이리 부노. 태풍이 올라 카나?”

임태호 상병이 투덜거리며 말했다. 강풍은 시간이 갈수록 더 심해지고 있었다. 어제 밤보다 더 세찼다. 바람은 계곡을 온통 흔들어 놓았다. 바람이 언제부터 이렇게 불고 있었을까?

울창한 원시림 사이로 올려다 보이는 하늘에는 시커먼 먹구름이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음산한 구름과 기분 나쁜 바람소리는 시간이 갈수록 더 흉폭 해 지고 무서워졌다.

변을수 일병은 남쪽 하늘에 보이는 대머리 산을 바라보았다. 저 곳까지만 갈 수 있다면 부대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부대를 떠나온 지 얼마나 되었을까? 보름, 아니면 한 달. 그보다도 더 되는 것만 같았다. 정확히는 오늘이 며칠인지도 알 수가 없었다. 그저 그 동안 짐승처럼 먹고 자며 하나뿐인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정신없이 날뛰었을 뿐이다.

변을수 일병은 갑자기 순덕이가 생각났다. 지난번 빈케에 갔을 때 주인 잃은 강아지를 한 마리를 주어 왔었다. 하얀 털이 지저분하게 눈을 가린 강아지는 보기 싫게 비쩍 말라 있었다.

강아지는 이상하게 정이 많은 놈이었다. 머리를 한번 쓰다듬어 주었을 뿐인데 계속 변 일병을 졸졸 따라 다녔다. 호주머니 속에서 초콜릿 하나를 꺼내 주었다. 녀석은 아주 맛있게 먹었다. 그리고 계속 달라붙었다. 할 수 없이 변을수 일병은 정굴복 하의 호주머니에 녀석을 집어넣고 부대로 돌아왔다.

이 강아지의 이름은 손덕이었다. 순덕이는 짖는 법이 없었다. 아무나 보고 좋다고 따라 다녔다. 매복을 서고 돌아온 병사들은 순덕아 잘 있었니, 하고 씨레이션 햄 조각을 던져 주었다.

순덕이는 금방 모습이 달라졌다. 보기 싫게 말랐던 몸에 통통하게 살이 올랐다. 그리고 하얀 털은 다시 아름답게 윤기가 흘러내렸다.
강아지 한 마리는 병사들에게 고향을 생각나게 했다. 그리고 안락한 마음을 갖게 했다. 강아지는 암캐였다. 병사들은 매복을 서고 귀대하며 큰소리로 순덕아, 서방님 돌아왔다 하고 고함을 질렀다. 그때마다 순덕이는 꼬리를 치며 아주 반가워했다.

왜 이렇게 사소한 일들이 그리워질까? 내가 없는 동안 순덕이의 밥을 누가 주었을까? 문 일병, 아니면 취사반 정 일병.

대머리 산으로 가려면 저 아래 월맹군 진지를 지나가야 했다. 무사히 진지를 통과해서 지휘소 뒤편에 있는 산 위로만 올라갈 수 있다면 대머리 산이 곧장 눈앞에 있다. 그런데 어떻게 저 곳을 통과할 수 있을까.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들은 동굴 속에서 벌써 3일 째 묵고 있었다. 젊은 육체는 회복이 빨랐다. 임태호 상병의 화상도 야자유 덕분에 회복이 빨라졌고 변을수 일병의 어깨 상처도 많이 좋아졌다. 그 동안 개미허리와 임태호 상병은 밤낮으로 월맹군 진지를 관찰하며 작전을 세웠다. 보초의 교대 시간과 초소 위치, 적의 화기 배치와 병력을 조사했다. 특히 개미허리는 월맹군의 연료 저장고와 탄약고에 관심이 아주 많았다.


나비

병사는 죽어서 나비가 되고 정치가는 살아서 까마귀가 된다

“변 일병, 이거 좀 봐라. 눈이 온다. 이기 우예 된기고? 함박눈이 온다카이.”

동굴 밖에서 임태호 상병이 변 일병을 불렀다.

‘뭐야, 눈이 온다고? 열대지방에 무슨 눈이 와. 또 장난을 치는군.’

변을수 일병은 쓴웃음을 지으며 동굴 밖으로 나갔다.

변 일병은 동굴 밖으로 나오자 자기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임태호 상병의 말은 사실이었다. 정말 함박눈이 펄펄 쏟아지고 있었다.

열대지방에 눈이 오다니.

변을수 일병은 함박눈을 바라보며 너무 놀라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뒤 따라 나온 개미허리가 입을 열었다.

“정말 장관이야! 독사 말이 맞았어. 난 그때 독사에게 거짓말을 한다고 몰아붙였지. 그런데 그게 정말이군. 앙케에 있을 때 같이 근무했던 전우 중에 독사라는 친구가 있었어. 그런데 어느 날 매복을 서다가 케산에서 눈이 오는 걸 봤다고 하더군. 누가 그 말을 믿겠나? 미친놈이라고 몰아붙였지. 그런데 그 친구는 자기 눈으로 똑똑히 봤다는 거야. 독사는 저게 죽은 병사들의 넋이라고 말했어.”

“재수 없는 소리하지도 마소. 안 그래도 기분 나빠 죽겠는데…”

임태호 상병이 투덜거리자 개미허리가 키득키득 웃으며 설명하기 시작했다.

“임태호, 잘 봐. 저건 눈이 아니라 나비 떼야, 나비 떼. 우기가 임박해서 내륙의 나비들이 계절풍을 타고 동쪽으로 이동하는 거야. 이제 3일 안에 무서운 폭우가 쏟아질 거다. 두고보라고. 지금 이렇게 강풍이 부는 것은 전부 그 때문이다. 그땐 우리도 저길 건너야 해. 폭우로 혼란스러울 때 빠져나가는 거야, 내 말 알아듣겠지?”

개미허리의 말을 듣고 변을수 일병은 함박눈을 자세히 살피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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