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창밖을 내다보던 변을수 일병은 깜짝 놀랐었다. 우지혜가 단거리 선수처럼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열차를 따라오고 있었다.
“지혜야, 그만 돌아가.”
변을수 일병은 비명을 지르며 울부짖었다. 열차가 속력을 높이자 발밑에 레일과 침목이 눈알이 빙글빙글 돌아가도록 빨리 지나갔다.
“지혜야, 그만 돌아가.”
변을수 일병은 목이 터져라 외쳤다. 그때 등 뒤에서 목이 잔뜩 쉰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나 돌아가 임마!”
변을수 일병은 깜짝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개미허리가 그 곳에 서 있었다. 변을수 일병이 그를 노려보자 개미허리는 군화발로 그의 등허리를 걷어차 버렸다.
“악!”
변을수 일병은 비명을 지르며 열차 밖으로 나가 떨어졌다.
변을수 일병이 신음 소리를 토하며 눈을 떴다. 동굴 속은 어느새 하얗게 밝아 있었다. 벌써 아침이었다.
변 일병은 꿈에서 깨어났다. 개미허리와 임태호 상병이 보이지 않았다. 나만 두고 모두 어디로 간 것일까?
변 일병은 손바닥으로 눈을 비비며 일어나 앉았다. 러닝셔츠가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꿈을 꾸며 흘린 땀이었다. 지독한 악몽이었다. 개미허리가 등을 차서 그를 열차 밖으로 떠밀다니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이 꿈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평소에 개미허리는 전우들이 가장 기피하는 인물이었다. 그 이유는 위기의 순간에 전우를 미끼로 던져주고 자기만 사지에서 빠져 나온다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의리가 없는 사내라는 것이다.
지금까지 그런 일을 실제로 본 사람은 없었으나 그가 언제 배신할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더구나 그는 전쟁 바닥에서는 자신 외에는 어느 누구도 믿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게 개미허리의 지론이었다. 전우들을 믿지 않는 그를 어떻게 믿을 수가 있겠는가?
동굴 밖으로 나오자 밀림 속으로 바람이 세차게 불며 지나갔다. 바로 옆 칡넝쿨 속에는 두 사람이 숨어 무엇인가 열심히 보고 있었다. 개미허리가 말할 때마다 임태호 상병은 무엇인가 메모를 하고 있었다.
“뭐해요?”
변을수 일병이 다가서며 물었다.
“미친나, 이 자슥이!”
임태호 상병이 기겁을 하며 변을수 일병의 다리를 낚아챘다. 그 바람에 변 일병이 앞으로 폭 꼬꾸라졌다. 임태호 상병이 말없이 절벽 밑을 가리켰다.
임태호 상병이 가리킨 곳을 바라보던 변을수 일병은 크게 놀랐다. 칡넝쿨 사이로 내려다보이는 절벽 아래에는 대규모 병력들이 주둔하는 진지가 있었다. 진지는 정글 속의 밀림으로 교묘하게 은폐되어 있었다. 공중에서는 정찰이 불가능한 곳이었다. 하늘에서는 아무리 눈을 닦고 보아도 끝없이 펼쳐진 원시림만 보일 것이다.
절벽 아래에는 어제 그들이 떠내려 온 강물이 흐르고 있었다. 강가에는 월맹군 병사 한 사람이 물을 긷기 위해 양동이를 들고 하품을 하며 걸어 나오고 있었다. 짧은 검정 반바지에 맨발인 병사는 강물에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소변을 보았다. 그리고 그 물에 세수를 하기 시작했다.
병사의 등 뒤로는 벌집같이 많은 벙커들이 밀림 속에 교묘하게 은폐되어 있었다. 진지는 거대한 괴물처럼 살아서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이곳 상공에 미군들이 고엽제를 살포했더라면 엄청난 살생이 발생했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이런 곳에 월맹군이 진을 치고 숨어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CP 1동, 벙커 24동, 지상 막사 4동, 지휘소 동쪽에 탄약고, 지휘소 뒤편에 연료 저장고, 남쪽 연병장에 병원 2개소, 로켓포 12문 거리 200미터.”
포 관측병인 개미허리의 관측 솜씨는 정확하고 정밀했다. 떠버리 임태호 상병도 월맹군 주둔지를 보고 기가 죽었는지 입을 꼭 다물고 있었다.
임태호 상병은 개미허리가 불러주는 대로 수첩에 그림을 그려가며 메모를 하고 있었다. 평소 낙천적이고 허세가 심하던 임태호 상병도 거대한 적의 주둔지를 보는 순간, 겁에 잔뜩 질린 모양이다.
모든 지하 벙커는 거미줄처럼 통로가 연결되어 있었다. 그리고 연병장에는 바둑판처럼 통로가 배열되어 있었다. 지금 저 곳에 105mm 포탄이 떨어진다고 해도 첫발을 명중시키지 못한다면 그 다음 포탄이 날아오기도 전에 그들은 두더지처럼 땅속 깊이 숨어 버릴 것이다.
“몇 명이나 될까요?”
변을수 일병이 겁에 질려 속삭였다.
“연대 규모 이상이야. 저 친구들이 우리 중댈 쳤을 거야. 우린 그것도 모르고 매복으로 저걸 치려 했으니 계란으로 바위 치기지. 한마디로 겁 대가리가 없었어. 범의 아가리에 매복을 하고 날 잡아 잡 수 한 거야. 바보 같은 도꾸.”
개미허리가 쓴웃음을 지우며 박동수 대위를 비웃었다.
그랬다. 이곳은 밤의 장군 치 연대장이 지휘하는 월맹군 38연대의 본부였다. 그들은 이곳에 6개월 전부터 진지를 구축하고 우기에 접어들면 빈딩성을 중심으로 중부 월남을 단숨에 해방시킬 만반의 준비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지휘소의 하류에 위치한 연병장에는 상의를 벗어 던진 검게 탄 병사들이 우렁찬 목소리로 비엣 덩 크원, 비엣 덩 크원(유격병, 유격병) 하며 구보를 하고 있었다.
강인한 모습과 활기찬 동작, 그리고 우렁찬 함성은 밀림에 모든 것을 한 순간에 제압하는 살기가 있었다.
연병장 다른 한곳에서는 병사들이 짧은 구령과 함께 총검술을 하고 있었다.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총검술의 한 동작이 끝날 때마다 햇빛에 반사하는 대검의 검광은 새들을 화들짝 놀라게 했다.
그때 지휘소 앞에 단구의 한 사나이가 나타났다. 그는 날카로운 목소리로 무엇인가 명령을 내렸다. 순식간에 병사들이 거짓말처럼 눈앞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들은 연병장에 바둑판처럼 파놓은 교통호 속으로 뛰어내린 것이다. 연병장은 금방 이름 모를 새들만이 평화롭게 지저귀는 밀림으로 변해 버렸다.
<다음호에 계속>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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