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은 국가가 우리들에게 명령한 일이 올바른 일이거나 그릇된 일이라는 판단은 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를 이 전쟁터로 보낸 국가는 대한민국이며 조국의 이름으로 참전 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단지 사랑하는 조국이 우리들의 희생으로 만세 불변의 탄탄대로 위에서 부국을 이룩하는 날에는 반드시 우리들의 죽음도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땐, 낮선 이국에서 무명으로 산화한 우리들의 죽음도 재평가를 받을 것입니다.’
갑자기 벙커 지붕 위에서 털털거리는 치누크의 프로펠러 소리가 들려 왔다. 벙커의 천장에서 모래흙이 우수수 떨어지고 땅바닥은 지진이 난 것처럼 들썩거렸다.
“중대장님, 왔습니다.”
당번병 김찬식 일병이 벙커 속으로 뛰어들며 활기차게 말했다.
“뭐가?”
“신병이 도착했습니다.”
김찬식 일병은 몹시 반가운 모양이었다.
요즘 박동수 대위는 무척 저기압이었다. 킬러밸리 전투에서 많은 부하를 잃고 의기소침해서 벙커 속에 처박혀 매일 술에 취해 울다가 자기는 부하들을 죽인 죄인이니 할복자살을 해야 한다면서 밤중에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 중대를 온통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았다.
7중대의 잔류 병력들은 마치 큰 죄라도 지은 것처럼 숨도 한번 크게 쉬지 못하고 어두운 지하 벙커 속에 두더지처럼 엎드려 씨레이션 만 까먹고 있었다.
대형 치누크의 프로펠러가 회전을 하며 둔탁한 소리를 내자 벙커 지붕 위에 널어 두었던 병사들의 러닝셔츠와 팬티가 휴지 조각처럼 날아가 버렸다. 자욱한 흙먼지와 함께 벙커 지붕 위에 씌워둔 고무 루핑이 홀라당 벗어져 저만치 날아가 버렸다. 막사 앞에 심어둔 바나나 잎사귀는 갈가리 찢어져 걸레가 되었다.
치누크는 누런 흙먼지를 일으키며 풀썩 주저앉았다. 그러자 꽁무니에서 더블백을 등에 맨 신병들이 꾸역꾸역 나오기 시작했다.
신병들을 내려놓은 치누크가 요란한 폭음과 함께 하늘로 치솟자 다른 치누크가 다시 랜딩을 하며 주저앉았다. 치누크에서 신병들이 또다시 쏟아져 나왔다. 또 한대의 H21 헬기가 랜딩을 한 후에 보급품 하역을 마치자 3대의 헬기는 하늘을 쪼개며 천천히 남쪽 하늘로 살아졌다.
삽시간에 중대는 침묵과 울적함에서 벗어나 활기를 되찾기 시작했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두더지 구멍 같은 벙커 속에서 흑인보다도 더 검은 몸뚱이의 고참들이 정글화도 신지 않은 맨발에 팬티 차림으로 어슬렁어슬렁 기어 나오고 있었다.
머리카락을 빡빡 밀어 버린 문어 대가리에 시커먼 수염, 억센 몸집과 무섭게 반들거리는 눈동자, 사선을 넘어온 병사들의 까닭 모를 증오심과 분노, 그리고 무표정한 얼굴들에 살기 띤 표정 등 살벌한 풍경이었다.
이런 것들은 파월 신병들의 기를 순식간에 죽이고 겁을 잔뜩 집어먹게 했다. 고참들은 먹이를 본 짐승들처럼 신병 주변에 모여들었다.
“야 임마, 니 고향은 어디고? 운제 왔노?”
한 고참이 신병에게 물었다.
“오늘 새벽에 도착 했어라우.”
신병이 잔뜩 겁을 집어먹고 대답했다.
“오메 잡것, 전라도 랑께.”
취사반 장우태 상병이 반가워하며 신병을 껴안았다. 고참들의 침울하던 표정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얼굴에는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부관이 월남 신병들을 본부 행정반 벙커 앞에 집합시켰다. 신병들은 더블백을 내려놓고 행정반 앞에 3열 횡대로 정열을 했다.
신품의 푸른 군복과 선명한 맹호 마크, 그리고 하얀 얼굴. 그것이 바로 고국의 냄새가 물씬 풍겨오는 신병들의 모습이었다.
부관이 CP로 걸어 들어가자 신병들은 긴장한 모습으로 부동자세를 취했다. 정글 속에서 사람 구경하기가 힘들었던 고참들은 팬티만 걸친 벌거숭이 차림으로 신병들을 에워싸고 고국의 냄새를 맡았었다. 벌써 신병 중 어느 누구는 어느 분대로 찍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분대장들은 좀 더 유능한 병사들을 자기 소대로 데려가기 위해 인사계 뒤를 따라 다니며 졸랐다. 전투는 팀웍이 가장 중요했다. 멍청한 병사 한 사람은 분대원 전체를 죽일 수도 있었다. 그것을 잘 알고 있는 분대장들은 필사적으로 인사계에게 로비를 했다. 박동수 대위가 부관과 함께 걸어 나오자 인사계가 소대 차렷, 하고 구령을 불렀다. 박동수 대위가 신병 앞에 서서 입을 열었다.
“쉬어.”
박동수 대위는 아직도 부석부석한 얼굴로 파월 신병들을 바라보았다.
“본관은 중대장 대위 박동수다, 사병들이 나를 도꾸라고 부르는 모양인데, 귀관들도 나를 그렇게 불러도 좋다.
귀관들이 새로 전입 온 것을 진심으로 환영한다. 본관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귀관들과 일 년 동안 이곳에서 잘 지내다가 때가 되면 무사히 귀국 시켜 가족들의 품안으로 돌려보내는데 있다. 지난 날 나는 어리석게도 이렇게 중요한 임무를 망각하고 큰 실수를 범했다. 그러나 그런 실수는 다시는 없을 것이다.
귀관들에게 한 가지 분명히 말해둘 것이 있다. 앞으로 귀관들은 전투 중 부상을 당하거나 위험을 당할 경우가 생길 것이다. 그때 바다 건너에 있는 부모님이나 애인들은 귀관을 구해줄 수가 없다. 부모님들은 귀관들을 낳아는 주어도 위험으로부터 보호해줄 수는 없다. 그러나 옆에 있는 전우는 귀관들의 목숨을 구해줄 수가 있다. 전우를 내 목숨처럼 아끼고 사랑하라, 이상!”
말을 마친 박동수 대위는 경례를 받고는 부관과 함께 C. P로 들어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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