킬러 밸리 제 58회
킬러 밸리 제 58회
  •  기자
  • 입력 2009-04-15 14:34
  • 승인 2009.04.15 14:34
  • 호수 781
  • 56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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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수 대위는 눅눅한 화투장이 손바닥 안에서 미끈거리자 기분이 좋아졌다. 처음 한 장은 패가 아주 좋았다. 그 다음 장에 메조 껍데기가 고개를 빠끔히 내밀자 1달러 군표 2장을 내밀었다.

임태호 상병이 화투를 쪼며 걸쭉한 입담을 풀었다.

“떴다 봐라 공산 명월! 요기 누구 자지고? 태호 부랄 아이가. 날 잡아 잡수소, 하고 고소한 냄새가 나는데.”

“시끄러, 임마!”

박동수 대위가 임태호 상병에게 타박을 놓았다.

“울 할배 묘터를 공산 명월에다 써 놓았더니 요놈이 나를 아주 좋아하는구나 에헤헤…”

임태호 상병은 전혀 기가 죽지 않고 계속 약을 올렸다.

“임마, 삼 년 묵은 과부 좇 주무르듯 만지지만 말고 빨리 홀랑 까라.”

손영목 병장이 이죽거리며 재촉을 했다.

“태호 자지는 울 어메가 낳을 때부터 쇠못을 박아서 질긴 기라. 그라이 통뼈 아이가? 떫냐? 닮아라, 닮아라, 울 할배 공산명월을 닮아라.”

“워매 잡것, 워찌 이 자식은 또 이런 당가? 남은 속이 타서 죽겠는디.”

목포 깡패 장월수 병장이 약이 올라 임태호 상병을 노려보았다. 그제야 임태호 상병은 공산 두 장을 엎어 치며 판돈을 날름 끌어가 버렸다.

“태호야, 정말 미안하다. 내가 잘못해서 너를 죽였구나, 으으흑흑…”

박동수 대위는 또 울음보를 터뜨렸다. 박동수 대위는 전사하거나 행방불명된 부하들을 하나 둘 떠올렸다. 벌써 일년 가까이 미운 정 고운 정이 듬뿍 들었던 부하들이었다.

중대장의 돈을 따먹자고 달려들던 임태호 상병, 배가 아픈 대는 중대장님이 사주는 술이 약이라며 졸졸 따라 다니며 조르던 부관 신 중위 등이 보고 싶었다.

한창 시절의 혈기로 조금씩은 말썽을 일으켜도 모두 용감하고 뛰어난 부하들이었다. 군복무를 무사히 마치고 제대하면 자기 밥그릇은 충분히 찾아먹을 청년들이었다.

그런 그들이 자신의 순간적인 판단 착오로 이제 귀국할 수가 없게 되었다.

박동수 대위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고 엉엉 소리치며 통곡을 하다가 실성한 사람처럼 벌떡 일어나 허허 하고 웃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박동수 대위는 부하들이 신나게 부르던 중대가 가 갑자기 떠올랐다.

여기는 7중대다아, 도마토 말대가리 중대다아.

지가지가 장장 깨갱깨갱
고향으로 가는 열차다아
고향으로 가는 돛배다아.
지가지가 장장 깨갱깨갱

병사들은 술이 엉망으로 취하면 옷을 홀라당 벗고 벙커 지붕 위에 올라앉아 중대가를 부르곤 했다.

여기는 도마토오 말대가리 중대다아
지가지가 장장 깨갱깨갱
고향으로 가는 빤스(버스)다아
지가지가 장장 깨갱깨갱
영자의 빤스는 내 꺼다 내꺼다아
지가지가 장장 깨갱깨갱.

병사들은 저희들끼리 모여 앉아 중대가를 신나게 부르다가도 중대장만 나타나면 시침을 뚝 따고 모른 척했다. 병사들이 만든 중대가는 언제나 저희들끼리 있을 때에만 불렀다. 왜냐하면 그들이 노래 부르는 가사 중에는 부르도꾸 마누라는 내꺼다아, 하는 가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7중대가는 무척 신나는 노래였다. 새로 전입온 병사들은 고참들로부터 이 노래를 배웠다. 가사 중에는 노골적으로 연인을 사모하는 대목도 있었으나 전체적으로는 전쟁터에서 어찌할 수 없는 현실과 군복무에 대한 자조적인 슬픔, 그리고 연인에 대한 안타까운 사랑과 아픔이 깊숙이 배여 있었다.

병사들은 손바닥으로 자기 엉덩이를 치면서 지가지가 장장 깨갱깨갱, 하고 신나게 후렴을 불러 넣었다.

변을수 일병은 특히 7중대가를 잘 불렀다. 변을수 일병은 열하의 날씨에도 항상 샌님처럼 하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변을수 일병도 행방불명이 되었다. 박동수 대위는 그의 부모에게 뭐라고 편지를 써야 할지 난감했다.

귀댁의 자제가 낯선 이국 땅에서 자유 통일을 위해 싸우다가 죽었다고? 누구를 위해, 무엇 때문에 그들의 소중한 아들이 죽어야 하는가? 이 전쟁은 변을수 일병이나 임태호 상병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남의 나라 전쟁이었다.

먼 후일 이들의 죽음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개죽음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전쟁의 가장 원시적인 개념은 자신과 가족의 생명을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안전하게 보호하는데 있다. 이것이 평소 박동수 대위의 생각이었다.

박동수 대위는 이제야 작전 비문 속에 숨어있는 깊은 의미를 알 것만 같았다.

‘열 명의 적을 놓치는 한이 있더라도 사병 한 사람이라도 다치지 않게 하라.’

이보다 더 절실하고 뼈에 사무치는 작전 명령은 없을 것이다. 참으로 절실한 명령이었다. 그런데 바보 같은 자신은 지휘관으로서 치명적인 실수를 한 것이다.

그는 책상 건너편에 서 있는 중대기를 바라보았다. 푸른 바탕에 총과 칼이 선명하게 그려진 보병 마크의 깃발이었다. 그리고 그 깃봉에는 수많은 전투 휘장들이 달려 있었다.

박동수 대위는 먼저 변을수 일병의 부모에게 편지를 보내기로 마음먹고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귀댁의 자제 변을수 일병은 맹호 A호 작전 중 실종되었습니다. 변을수 일병은 야간에 적과 교전 중 행방불명이 되었습니다. 본 중대는 변을수 일병의 행방을 철저히 수색을 하였으나 어떤 흔적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변을수 일병은 당일 교전 시 전사한 것으로 사료됩니다. 그는 전우들에게는 친절하고 다정했으며 맡은 바 임무에는 책임을 다하는 훌륭한 병사였습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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