킬러 밸리 제 57회
킬러 밸리 제 57회
  • 김범선 
  • 입력 2009-04-09 13:10
  • 승인 2009.04.09 13:10
  • 호수 780
  • 56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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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자 고년이 올매나 독종인지 니 아나? 고 가시나는 죽는 다카면 참말로 디지는 가스난 기라. 그라이 내는 몬 죽는다. 춘자 디지면 배속에 든 새끼는 누가 책임 지노? 그라이 난 몬 죽는다. 죽어도 고짜 가서 디질란다.

울 어메 때문에 난 몬 죽는다. 중년에 과부가 된 울 어메가 얼매나 고생한 줄 니 아나? 태호가 육남매 막내로 태어나 어메를 울매나 고생 시켰는지, 니 아나? 어메는 태호를 농사꾼 안 만들라꼬 고등학교 꺼정 시켰는데 이 미친놈이 눈까리가 뒤집혀 공부는 안하고 농땡이만 친기라. 쌀 훔쳐 팔아 묵었지, 고추 훔쳐 팔아 묵었지, 송아지 끌고 가서 팔아 묵고 서울로 도망쳤지, 우예 그 이야기를 다 하겠노? 귀국해서 울 어메 호강시킬기다. 태호 뼈다구가 다 부러지도록 일을 해서 울 어메 호강 시킬란다. 어메 앞에 무릎 꿇고 어메요, 태호 잘몬 했심더, 용서 하이소 하고 통곡하며 빌란다. 고라기 전에는 절대로 몬 죽는다.

태호가 몬 죽는 이유를 천 가지만 대면 살려 줄기가? 구판장에 술값 외상 있어 몬 죽는다. 첫 휴가 때 친구 병식이 하고 술값 때문에 한판 붙었다 홧김에 내가 병식이 이빨 두 대를 날릿다. 병식이 이빨 해 주기 전에는 몬 죽는다. 목숨이 위험하이 빌 생각이 다 나는구나. 태호 죽을라 카이 사람이 되는 갑제. 내가 요짜서 몬 죽는 이유는 수천 가지도 넘는다. 그러이 태호는 몬 죽는다. 태호가 죽으면 하늘이 무너지는 기라. 하늘이 무너지기 뭐 별거가. 눈까무면 하늘이 무너지는 기지.

전쟁터에서 병사들은 그들이 죽어야 할 이유를 모른다. 그러나 살아야 할 이유는 아주 많이 알고 있다.

모든 생명체 중에서도 가장 우수한 인간은 자신을 속이는 데도 좀 더 복잡하고 교묘한 술수를 사용한다. 그것은 인간이 살아 온 경험이나 학문, 혈연과 인종, 그리고 주위의 환경에 따라 자신을 속이는 방법도 다양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자신을 잘 기만하는 인간도 소리 없이 다가오는 운명만은 마음대로 속여 넘길 수가 없다.

임태호 상병은 누군가가 거센 물살에 떠내려가지 않도록 자신의 허리띠를 잡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는 정신을 잃었다.

존경하는 부형님 귀하.

본인은 7중대장 박동수 대위입니다. 드릴 말씀은 다름이 아니라 귀댁의 자제 임태호 상병은 지난…

부욱.

박동수 대위는 쓰고 있던 편지를 두 손에 움켜쥐고 빡빡 찢어 버렸다. 그리고 벙커 구석에 홱 던져 버렸다. 포탄 박스로 만든 책상 위에는 쓰다가 버린 편지 용지가 함부로 버려져 있었다.

박동수 대위는 이제 겨우 다섯 통의 편지를 써 놓았다. 킬러밸리에서 부상을 당하고 돌아온 첫날 박동수 대위는 위생병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진통제를 맞은 몽롱한 정신 상태에서 두 통의 편지를 써서 고국으로 보냈었다. 경기도 안양에 한 통, 부산 시립 고아원에 한 통을 보냈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편지를 써서 보내야 할 곳은 많이 남아 있었다. 박동수 대위는 반이나 넘게 남은 죠니워카 술병을 들고 냉수를 마시듯이 벌컥벌컥 들이키기 시작했다. 독한 양주가 창자 속으로 스며들자 뱃속이 화끈거리며 불길이 일어났다.

“이게 무슨 지랄이야. 내가 미쳐도 단단히 미쳤지. 못난 놈, 이런 못난 놈!”

그는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자신에게 맹렬히 저주를 퍼부었다. 그리고 목침대에 벌렁 누워 버렸다. 목침대의 받침대가 삐거덕거리며 고통스러운 신음 소리를 내뱉었다.

붕대를 감은 그의 왼쪽 팔뚝에는 아직도 시커먼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얼굴도 상처투성이며 머리에도 붕대를 칭칭 감고 있었다. 그는 오른쪽 손으로 둥글넓적한 얼굴을 쓰다듬다 말고 벌떡 일어났다.

“참말로 미치겠네. 내가 왜 그런 짓을 했지? ”

박동수 대위는 스스로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괴로워했다. 토마토처럼 혈색이 좋고 기운이 펄펄 넘쳐흐르던 그의 얼굴은 중병이 든 환자처럼 해쓱하고 두 볼은 흉측하게 움푹 패어 있었다.

따르륵 따르륵.

멀리서 LMG로 사격하는 소리가 아련히 들려왔다. 목침대 위에 누워있는 박동수 대위의 두 볼을 타고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지기 시작했다.

볼을 타고 흘러내린 눈물은 귓바퀴를 타고 흘러 국방색 담요 위에 검은 얼룩을 만들고 있었다. 산돼지처럼 미련하게 생긴 사내는 비탄에 젖어 꺼이꺼이 소리를 내며 울고 있었다.

왕방울같이 큰 눈이 붉게 충혈 되어 눈물을 줄줄 흘리며 슬피 울고 있었다. 그것은 짧은 꿈과도 같았다. 차라리 꿈이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문득 임태호 상병의 얼굴이 떠올랐다.

9번 외곽 초소에서는 한창 노름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목포 깡패 공사유 상병, 대전 출신 레슬링 선수 손영목 병장, 인천 출신 외항 선원 차동철 상병 등 한다는 노름꾼들이 모여 포탄 박스를 엎어놓고 화투를 치고 있었다.

부중대장 유 중위가 병사들이 노름을 한다고 보고했을 때 박동수 대위는 모른 척하고 그냥 두라고 했다. 박동수 대위의 지론은 노름 잘하는 놈이 유사시에 전투도 잘한다는 것이다.

박동수 대위는 9번 외곽 초소로 갔다. 노름꾼들은 맥주를 홀짝거리며 무엇이 그렇게도 좋은지 낄낄거리며 웃었다. 비좁은 초소 안은 담배 연기가 자욱하고 발 들여놓을 틈도 없었다. 박동수 대위를 본 임태호 상병이 유들거리며 입을 열었다.

“중대장님, 돈 좀 따 묵읍시다.”

“따먹는 거 좋아하네. 임태호, 너 임마! 지난번에 따간 거 오늘 다 게워.”

“아따 중대장님, 쩐이 없으면 빌려 드리고요. 노름판에는 부자지간에도 안면 몰수라요.”

임태호 상병은 담배를 입에 삐딱하게 물고 두 손으로 화투장을 바짝 조였다. 입대 전에는 그의 말처럼 노름판에서 한 가락을 한 모양이었다. 박동수 대위는 탄약통 위에 걸터앉으며 화투판에 끼어들었다.

<다음호에 계속>

김범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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