킬러밸리 제 56회
킬러밸리 제 56회
  •  기자
  • 입력 2009-04-01 15:25
  • 승인 2009.04.01 15:25
  • 호수 779
  • 56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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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야, 드디어 죽는구나. 이렇게 죽는구나, 내가 여기서 죽으면 아무도 모르겠지? 정글 속에서 불에 타서 죽는다면 누가 알겠어? 그런데 지혜야, 왜 이렇게 눈물이 나니? 죽는 건 두렵지 않는데 자꾸만 눈물이 나는구나.”

변 일병은 우지혜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그때 어느새 돌아왔는지 등 뒤에서 개미허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변 일병, 뭐하냐? 이런 병신! 타 죽을 거야? 빨리 일어나. 전방 30미터 지점에 급류가 있어. 물밑은 안전할 거야.”

개미허리는 군복을 찢어 임태호 상병의 두 눈을 가렸다. 그리고 가볍게 들쳐 업고는 야아! 하는 비명 소리와 함께 불길 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변을수 일병은 개미허리가 사라진 불구덩이를 공포에 질려 바라보았다. 어떻게 저 속에 뛰어들어 살기를 바라겠는가? 차라리 여기서 편하게 죽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뛰어라 을수야, 힘껏 뛰어!’

갑자기 우지혜의 목소리가 들렸다. 변을수 일병은 자신도 모르게 불구덩이 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머리카락이 찌르륵 소리를 내며 오그라들었다. 얼굴 가죽이 부풀어 오르며 팽팽하게 당겨졌다.

‘개미허리는 참 현명하군. 눈을 헝겊으로 가린 이유를 이제야 알겠어.’

온몸에 벌겋게 달아오른 쇳물을 붓는 것만 같았다. 그는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힘껏 뛰었다. 30미터의 거리가 무척 멀게만 느껴졌다.

‘풍덩! 시원하다 정말 시원하다.’

변을수 일병은 혼자서 중얼거렸다. 그는 시원한 강물을 한 입 가득히 들어 마셨다. 온 몸의 세포가 살아서 숨을 쉬며 잔뜩 기지개를 켜는 것만 같았다. 변을수 일병이 무사히 불구덩이 속을 뚫고 나온 후 넋을 잃고 서 있자 개미허리가 그를 강물 속으로 밀어 넣은 것이다.

강물은 유속이 아주 빨랐다. 변을수 일병은 쏜살같이 떠내려가고 있었다. 수면 위 여기저기에는 아직도 연소가 덜 된 휘발유가 계속 불타고 있었다.

그들은 물속으로 잠수를 시작 했다. 물밑은 표면의 휘발유가 불타고 있기 때문에 대낮같이 환하게 밝았다. 강물 속의 바닥이 어두워지면 물위로 머리를 내밀고 솟아올라 숨을 몰아쉬었다.

변을수 일병 바로 앞에는 개미허리 김 하사가 임태호 상병의 옆구리를 껴안고 빠른 속력으로 떠내려가고 있었다. 임태호 상병은 물을 울컥울컥 토하며 계속 기침을 하고 있었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 위에 서 있던 고목이 불이 붙은 채 강물 위로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강물은 거대한 가마솥의 물처럼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있었다. 그들은 점점 더 강물 복판으로 헤엄쳐 들어갔다. 강의 중심부에 들어가자 물살이 더 빨라졌다.

순간 개미허리가 임태호 상병을 놓쳐 버렸다. 임태호 상병은 빠른 유속에 놀라 비명을 지르며 떠내려갔다. 급류에 몸이 감기면서 물속으로 점점 더 깊이 가라앉았다. 그는 물을 마시며 의식을 잃어갔다.

개미허리가 임태호 상병을 구하기 위해 급류를 헤치며 필사적으로 접근을 하고 있었다. 임태호 상병은 가물가물하는 의식 속에서 중얼거렸다.

‘나는 우리 어메하고 촌에서 농사짓다가 입대 안 했나. 신성한 국방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싸나이답게 입대한 기라. 그런데 우리 부대가 몽땅 월남으로 안 왔나. 월남으로 가라 카이 우째 겠노? 와, 그 노래에도 안 있나.

‘자유 통일 위해서 조국을 지킵시다,

높은 사람들이 굉장한 것처럼 말하는 기라. 그래서 내가 안갔나? 자유 통일할라 먼 난 몬 간다. 물 건너 고짜 있는 자유 통일하는 거보다는 요짜 있는 우리 끼 자유 통일이 더 급하다. 빙신 육갑 떨라꼬 고짜 꺼정 자유 통일 하로 가나. 길이나 가깝고 할 일이 없어 심심하면 또 모르제. 그라이께네 또 이 카더라.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참말로 ‘위하여’ 찾는 놈 치고 구라아인놈 난 몬 봤다. 조국과 민족 좋아하네. 조국과 민족이 어디 물 건너 고짜 있나? 요짜 있제. 태호는 어메 말 잘 듣고 과수원에 농약 잘 치고 고추 농사 잘 짓는기 조국과 민족을 위하는 길이 아이겠나? 내가 고래 대답 하이께네 뭐라 했는지, 니 아나?

‘건국 이후 최초의 파병, 조국 근대화의 기수, 외화 획득, 우방국 지원,

내, 하도 더러버서 이래 말했다. 고라 몬 니가 고짜 가서 싸우다 디져라. 와, 니는 안 싸우고 우리보고 자꾸 싸우라 카노? 내사 마 남의 나라 머스마들캉 싸우기도 싫다. 와 배타고 요짜커정 와서 전마들캉 목숨 걸고 싸워야 대노? 전마들은 우리 아부지 귀싸대기 때린 일도 없고 내 돈 띠 묵고 도망친 일도 없다. 그런데 와 내가 전만들캉 코피 터지도록 싸워야 대노?

내가 직금은 요짜 와서 경기가 나빠 쪼다 소리를 듣고 있다마는 그래도 고짜서는 잘 나갔는 기라. 고짜서는 단촌댁이 막네아들 태호 모르면 도독놈 아이가. 내사 마 아무리 생각해도 와 내가 요짜서 싸우다가 개죽음을 당해야 하는지 고 이유를 모르겠다카이. 태호는 억울해서 몬 죽는다. 내가 요짜서 디지면 안 되는 이유를 갈치 주까?

첫째, 나는 전마들 하고 싸우기 싫다. 요기는 전마들 나란기라. 그런데 와 우리가 야들 나라에서 싸워야 되노. 싸우고 싶거든 미군아들아 니들이 알아서 싸워라. 그라고 디져라. 개새끼들아, 이건 니들이 일으킨 전쟁아이가.

둘째, 춘자 말이다. 고년 때문에 태호가 요짜서 디지몬 안 된다카이. 월남 오기 전에 부대에서 삼 일간 특별 휴가 안 줬나. 조상님캉 부모님캉 신고 하라꼬 휴가 줬잖아. 그때 내가 환장을 해서 박 이장네 둘째딸 춘자를 따먹은 기라. 와 거 있잖아, 과수원 뒤편 농막에서 춘자를 올라 탄기야. 춘자가 죽는다고 앙탈을 부리며 내 팔뚝을 깨무는데 춘자야, 내 꼭 살아서 돌아오꾸마, 하고 약속을 하이 춘자가 찔찔 짜면서 말하기를 태호야 니 월남에서 안 오면 난 죽어뿔란다 하고 말하더라.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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