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 치들이 왜 저러는 거야? 우릴 찾는 것도 아니고. 겁에 질려 도망치잖아. 불 때문인가? 좋아, 우리도 저 치들과 같이 내빼자고. 같이 섞여서 도망치는 거야.”
“내사 몬하겠심더. 죽을라꼬 색쓰는 기요?”
임태호 상병이 펄쩍 뛰었다.
“쟤들은 후퇴하는 병력이 아냐. 불 때문에 도망치는 거지. 저길 보라고. 미친놈들처럼 날뛰잖아. 슬며시 끼어드는 거야. 말하면 우리 정체가 탄로 날 거야. 수신호로 해. 알겠지?”
말을 마친 개미허리는 재빨리 월맹군 사이에 끼어들었다. 임태호 상병과 변을수 일병은 개미허리의 뒤를 따라 가지 않을 수 없었다.
개미허리 일행은 그간의 격전으로 군복은 찢기고 찢겨 남루한 넝마로 변해 있었다. 도망치고 있는 월맹군들도 그들과 똑 같았다.
변을수 일병은 임태호 상병과 함께 월맹군들 속에 끼어들었다. 개미허리가 두 사람을 앞장 세웠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허리에 차고 있는 수통이 달가닥거려 몹시 신경에 거슬렸다.
강풍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 거세게 불어 닥치며 기승을 부렸다. 이젠 몸을 가누기에도 힘이 들었다. 흙먼지로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이봐, 더 빨리. 뭘 꾸물거리나?”
개미허리의 뒤를 따라오던 장교가 권총으로 그의 등을 떠밀며 재촉했다. 싸늘한 총구가 등에 닿자 개미허리는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개미허리는 정신없이 달렸다. 숨길이 턱에 다 가슴이 터지는 것 같았다.
강풍에 실려 오는 연기를 마시자 목이 터져라 기침이 쏟아졌다. 마치 열차가 달리는 것처럼 심장이 쿵쾅거렸다.
“재수 없는 새끼! 죽여 버릴까.”
그는 중얼거렸다.
자정이 가까워지자 강풍은 더 세차게 불고 산불은 더 빠른 속도로 다가왔다. 불이 붙은 나무의 잔가지들이 우두둑 우두둑 소리를 내며 우박처럼 떨어졌다.
병사들이 놀라서 “와아!” 하는 비명을 지르며 개미떼처럼 흩어졌다. 원숭이들도 캑캑거리며 도망을 쳤다.
그때였다. 거대한 불길이 쿠르릉쿠르릉 하는 소리를 내며 일행을 덮쳐 왔다. 그 불길은 임태호 상병을 향해 악마처럼 달려들었다.
“으악! 살려 줘.”
임태호 상병이 입을 열어서는 안 된다는 것도 잊고 비명을 질렀다. 그는 몸에 붙은 불을 끄기 위해 때굴때굴 구르며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임태호 상병 앞에 달려가던 월맹군 장교가 임태호의 비명 소리를 듣고 돌아서서 외쳤다.
“따이한, 따이한이다!”
재빨리 권총을 뽑아든 월맹군 장교가 임태호 상병을 향해 총을 쏘았다. 다행히 임태호 상병이 몸을 구르고 있었기 때문에 총알이 빗나갔다. 그걸 본 개미허리의 눈이 뒤집혔다.
개미허리가 월맹군 장교를 향해 M16 대검을 던졌다. 대검은 장교의 목을 산적 꼬치를 꿰듯 뚫어 버렸다. 처절한 비명 소리와 함께 장교가 나동그라지자 불길은 삽시간에 그를 삼켜 버렸다.
모든 것이 삽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하지만 일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것을 본 월맹군 병사가 AK 총대로 변을수 일병을 내리쳤다. 소총의 가늠쇠가 변일수 일병의 귓바퀴를 찢으며 지나갔다. 변 일병은 붉은 선혈이 목을 타고 주르르 흘러 내렸다. 변을수 일병은 주저앉으며 월맹군 병사의 국부를 걷어찼다. 월맹군 병사는 개구리처럼 펄쩍 뛰어오르며 나동그라졌다. 변을수 일병은 손에 잡히는 돌을 들고 월맹군 병사의 머리통을 내리쳤다.
딱! 소리와 함께 피가 분수처럼 솟아오르며 변을수 일병의 얼굴을 흠뻑 적셔 놓았다. 그는 다시 한 번 월맹군 병사의 얼굴을 돌로 내리 찍었다.
그때 우지직! 하는 소리를 내며 관목이 변을수 일병을 향해 쓰러졌다. 변을수 일병이 재빨리 피했지만 바짓가랑이에 불이 붙어 찌찌직 소리를 내며 타올랐다. 변을수 일병은 정글복 바지에 붙은 불을 손으로 털어 냈다.
“변 일병, 살리도고!”
임태호 상병이 몸부림치며 울부짖었다. 임태호 상병은 바위 틈새에 다리가 끼어 있었다. 그리고 바로 옆에는 거대한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다.
변을수 일병이 임태호 상병에게 다가가 바위틈에서 그의 다리를 뽑아내기 시작했다. 임태호 상병이 고통으로 비명을 질렀다.
“조금만 더.”
드디어 임태호 상병의 다리가 바위에서 자유로워졌다. 임태호 상병은 다리가 부러졌는지 꼼짝도 하지 못했다. 변을수 일병이 임태호 상병을 들쳐 업으려고 했다.
“변 일병, 임태호는 틀렸어. 그냥 두고 떠나자.”
개미허리가 이죽거리듯 말했다.
“뭐라고 임마, 니도 사람 이가? 비겁한 자식!”
죽은 사람처럼 늘어져 있던 임태호 상병이 벌떡 일어나며 욕설을 퍼부었다.
“멀쩡한 놈이 엄살은…”
개미허리는 짓궂게 웃으며 또 약을 올렸다. 그러자 임태호 상병이 통증을 참지 못하고 주저앉았다.
“변 일병, 어차피 죽을 놈이야. 버리고 그냥 떠나자.”
개미허리가 또 이죽거린 다음 어디론가 사라졌다.
“뭐라꼬! 변 일병, 저 노마는 나쁜 놈인 기라. 찰리부대에서도 지만 살기 위해 전우를 버리고 도망쳤는기라. 하이 계곡에서도 그랬대이. 전마는 비겁한 놈인 기라. 절대로 믿지 마래이, 저 노마를 믿지 마래이.”
임태호 상병이 악에 바쳐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욕설을 퍼부었다.
임태호 상병의 짧은 머리카락은 모두 불에 타 버려 대머리가 되어 있었다. 더구나 불에 탄 등허리는 석쇠 위에 올려놓은 돼지고기 껍질처럼 흉측하게 부풀어 있었다. 오직 초롱초롱한 두 눈만이 살아서 번들거리며 무섭게 독기를 품고 있었다.
그때 굉음과 함께 또 다시 불길이 강풍을 타고 무섭게 밀어 닥쳤다. 변을수 일병이 바위 틈새에 임태호 상병을 밀어 넣고 엎드리며 중얼거렸다.
<다음호에 계속>
김범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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