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때 무전기가 울었다. 허리에 차고 있던 45구경 권총을 만지작거리며 깊은 생각에 잠겼던 치 연대장은 그 바람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또 다시 무전기가 방정맞게 울기 시작했다.
“2대대장 무전입니다.”
당번병이 수화기를 내밀었다.
“뭐야! 거기도 불이라고?”
무전을 받은 치 연대장은 개구리처럼 펄쩍 뛰어 오르며 비 명을 질렀다.
밤의 장군
병사는 전공을 자랑하고 장군은 무공을 자랑한다
“상사 진도우(전투 준비)!”
치 연대장이 무전기를 내려놓으며 날카롭게 소리쳤다. 이제야 그는 결단을 내린 것 같았다. 당번병과 연락병이 큰소리로 복창하며 밖으로 뛰어 나갔다.
잠시 후 부관 후엔 소령이 러닝셔츠 차림으로 황급히 달려왔다. 후엔 소령은 벙커의 입구에서 멈칫하고 발길을 세웠다. 평소 과묵하고 침착하던 연대장이 머리를 수세미처럼 헝클어뜨린 채 얼빠진 사람처럼 서 있었다.
치 연대장은 오른쪽 손에는 45구경 권총을, 다른 손에는 작전 지도를 들고 있었다. 눈동자는 고뇌에 차서 무섭게 충혈 되어 있었다. 그의 얼굴은 병든 사람처럼 창백하고 입술은 하얗게 말라붙어 있었다.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치 연대장이 황급히 벙커 밖으로 뛰어 나갔다.
밖은 짙은 안개와 어둠으로 한치 앞도 볼 수 없었다. 연대 주둔지는 미군의 야간 공습을 피하기 위해 철저히 소등을 하고 있었다. 많은 병사들이 우왕좌왕 하고 있었다. 지휘관들의 날카로운 명령 소리가 빗발치듯 들려오고 있었다.
“띠유 위(소위), 귀관은 매복조.”
제 1중대장 토이 대위가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병력을 배치하고 있었다. AK 자동소총과 탄창, 그리고 철모와 수통이 부딪치며 요란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바우띵(경계), 수색 실시!”
작전참모가 한 손에 AK 소총을 든 채 달려오며 명령을 내렸다. 그때 누군가가 소리쳤다.
“9시 방향 불이다, 불!”
서편 계곡에는 검은 밤하늘을 저녁 노을처럼 붉게 물들인 대규모 화재가 일어나고 있었다. 이제 불길은 바람보다 더 빨리 연대 주둔지로 밀어닥칠 것이다. 그리고 용맹스러운 그의 부하들이 더위와 독충과 그리고 미군들의 공습을 피해 6개월이라는 긴 시간에 걸쳐 비축한 전쟁 물자들을 삽시간에 태워 버릴 것이다.
연대는 공격 개시 일주일을 앞두고 전투다운 전투도 해보지 못한 채 괴멸해 버릴 것이다. 세계 제일의 정예 병사들이 싸워 보지도 못한 채 불길에 녹아 버리는 것이다.
그때야 치 연대장은 사태의 위급함을 몸으로 느낄 수가 있었다. 그는 두려움에 치를 떨었다.
“전 참모 집합 완료!”
부관 후엔 소령이 치 연대장에게 보고를 했다.
치 연대장은 군수, 작전, 공병 참모들을 거느리고 플래시 불빛 속에서 작전 도면을 검토하며 화재 진압 대책을 세웠다.
“윈 소령, 귀관은 호오 바위 지점에서 퇴각하는 병력을 검문하라. 검문에 불응하는 병사는 즉시 사살하라. 키 소령, 귀관은 즉시 보이 바위 지점에서 강 대안에 방벽을 쌓도록 하라. 통신병 외에는 전 병력을 동원하라. 부상병도 동원하라. 이곳엔 적이 없다. 적은 오직 밀려오는 저 불길이 있을 뿐이야. 탈주병은 즉시 사살하라, 부상자를 제외한 전 병력을 동원하여 불길을 잡아라. 빨리 불길을 잡지 못하면 우리의 위치가 노출되어 공습의 타깃이 될 것이다. 빨리 서둘러라.”
작전 명령을 끝낸 치 연대장은 참모들과 함께 서둘러 강의 상류 지점으로 출발을 했다.
정글 속에 은폐된 연대 주둔지는 세차게 불어오는 강풍을 타고 밀려오는 연기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킬러밸리는 우거진 밀림과 계곡 사이로 흐르는 여러 개의 지류가 모여 큰 강물을 이루며 흘러가고 있었다. 그 강의 이름이 후옹강 이었다. 상류 계곡에서는 수량이 많지 않았으나 계곡과 분지를 통과하면서 강물은 급격히 늘어나 하구에서는 대하를 이루고 있었다.
강물은 계곡의 중간 지점에서 커브를 그리며 건너편 대안을 따라 흐르고 있었다. 치 연대장은 이 지점에서 불길을 차단할 생각이었다.
세찬 바람이 계곡을 휘저을 때마다 관목은 뿌리째 뽑혀 어둠 속으로 날아가고 강풍은 밀림을 북처럼 두들겨 패며 무서운 속도로 빠져나갔다.
“참말로 미치겠네, 와 저 지랄이고?”
임태호 상병이 겁에 질려 욕설을 퍼부었다. 그때 어둠 속에서 날카로운 외침소리가 들렸다.
“라이 라이(빨리 빨리)!”
선두의 검은 그림자가 다급하게 재촉을 했다. 또 다른 한 무리의 그림자가 모습을 잠깐 드러내고는 연기 속으로 사라졌다. 그들은 개미허리 일행이 숨어 있는 바위 앞으로 무질서하게 도망치고 있었다.
“저 사람들이 누구지, 월남군인가?”
변을수 일병이 그들을 가리키며 물었다.
“아이쿠 이 문디 자슥아, 이것도 군인이라꼬. 니 눈에는 저기 월남군으로 보이나? 전마들은 월맹하고도 정규군이다.”
“혹시 우군인지도 몰라요.”
“이런 못난 자식! 그라면 성님 하고 가 봐라. 반갑다고 뽀뽀하며 안아줄 끼다. 이히히.”
임태호 상병이 키득키득 웃었다. 개미허리가 그런 임태호 상병을 노려보며 나직이 으르렁거렸다.
“쉿, 죽고 싶어?”
개미허리는 연기 속에서 갈팡질팡하는 월맹 정규군을 노려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저렇게 많은 병사들이 모두 월맹 정규군들이란 말인가? 그들은 어디에 숨어 있었을까?
개미허리는 짧은 순간에 결단을 내렸다. 어둠 속에서 유령처럼 떼를 지어 재빨리 이동하는 월맹군들을 바라보며 개미허리가 임태호 상병에게 속삭였다.
<다음호에 계속>
기자
저작권자 © 일요서울i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