킬러밸리 제 52회
킬러밸리 제 52회
  • 김범선 
  • 입력 2009-03-05 13:31
  • 승인 2009.03.05 13:31
  • 호수 775
  • 56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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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닌 소령, 불길을 잡아라. 후퇴는 절대로 안 된다. 교신 끝!”

치 연대장은 무전기의 수화기를 책상 위에 내동댕이 쳐버렸다. 그리고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넋을 잃고 정신없이 서 있었다. 희미한 석유 등불 밑에 고개를 푹 숙이고 서 있는 그의 그림자는 벙커 벽에 못이라도 박힌 듯 움직일 줄을 몰랐었다.

왜, 연대장이 이렇게 화재를 두려워하는지 당번병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얼음처럼 차갑고 바위처럼 과묵하던 그가 왜 저렇게 허둥대면 난리를 치는지 그를 잘 이해한다는 당번병도 치 연대장의 속마음을 알 수가 없었다.

치 연대장은 32세로 중부 월남의 빈딩성을 해방시키기 위해 6개월 전에 킬러밸리 남하했었다. 하노이에서 소위 호지명 루트를 따라 남하 하였다.

치 연대장은 키가 150cm 정도 되는 단신이었지만 어깨가 딱 벌어져 아주 당차고 다부진 인상을 주는 사내였다. 특히 광대뼈가 툭 불거진 넓적한 얼굴과 시커먼 두 눈썹은 강인하고 고집스러운 인상을 주었다.

그의 얼굴의 가장 큰 특징은 유난히도 시커먼 눈썹과 섬광처럼 반짝이며 광채를 내는 눈빛이었다. 소위 그의 눈은 ‘범의 눈’으로 월남 사람들에게는 보기 드문 얼굴이었다.

처음 치 연대장을 만나는 사람들은 파란 불빛이 폭발하는 그의 안광을 감히 마주 쳐다보기가 어려웠다. 그는 무서운 눈빛 하나로 수많은 병사들을 제압하고 있었다.

조금만 마음이 언짢아도 난쟁이 연대장은 무섭게 화를 내며 상대방을 뚫어지게 노려보았다.

그러나 치 연대장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화를 잘 내거나 무서운 사람은 아니었다. 단지 그의 생김새에서 풍기는 분위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렇게 느껴졌을 뿐이었다.

험상궂은 인상을 주는 치 연대장의 얼굴도 흰 이빨을 가지런히 드러내며 활짝 웃을 때에는 순진한 소년과 같은 신선한 매력이 있었다. 그의 성격은 겉모습과는 달리 무척 다감하고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이었다.

일반적으로 열대 지방의 사람들은 그 기후 적인 특성 때문에 다혈질적이고 무척 격정적인 기질이 있었다. 그러나 치 연대장의 성품은 열대 지방 사람들이 흔히 가질 수 있는 다혈질적인 것과는 아주 다른 면모를 갖고 있었다. 그의 성격은 보다 대륙적이고 음흉하며 템포가 아주 느렸기 때문에 열대 지방에서는 극히 보기 드문 성품을 가지고 있었다.

치 연대장이 이끄는 월맹군 38연대는 개미허리 일행이 머물렀던 석조 건물로부터 9km 떨어진 계곡에 주둔하고 있었다. 그곳에는 연대 CP와 지하 벙커, 보급소와 훈련소 그리고 병원이 정글 속에 교묘하게 은폐되어 있었다.

그곳은 킬러밸리 중간 지점의 분지에 있었다. 완만한 경사의 푸른 초원과 눈이 부시도록 현란한 붉은 장미, 그리고 키 큰 선인장의 머리 위에 왕관처럼 쓰고 있는 청초한 흰 꽃들이 지천으로 널려 있었다. 밀림이 우거진 정글의 한복판에 이렇게 아름다운 낙원이 있다는 것은 경이로운 일이었다.

누엔 반 치 연대장은 이곳을 무척 좋아했다. 그가 태어난 하노이와는 달리 이곳은 건기와 우기로 뚜렷하게 나뉘어 져 있었다.

이곳은 또한 자연이 만든 천혜의 요새였다. 우거진 밀림이 그의 연대를 교묘하게 숨겨 주고 있었다. 누엔 반 치 연대장은 참모들과 함께 이곳에 기거하면서 지역 게릴라들의 작전을 손수 지휘하고 있었다. 그는 이곳에서 적의 움직임을 손바닥처럼 환히 들여다보며 작전을 지휘했다. 얼마 전 박동수 대위가 이끄는 7중대를 완전히 괴멸시킨 것도 그의 작품이었고 개미허리 일행에게 죽음을 당한 장교와 사병들도 그의 부하들이었다.

불월전쟁 당시에 그 이름이 유래된 킬러밸리는 연합군들의 작전 제외 지역이었다. 끝없는 정글의 미로와 긴 협곡, 그리고 험난한 밀림은 이름 그대로 죽음의 계곡이었다.

그런 천혜의 요새 킬러밸리가 불타고 있는 것이다. 치 연대장은 무전기를 노려보며 긴 한숨을 쉬었다.

이제 일주일 후면 우기가 밀어닥치고 그때를 D데이로 삼아 단숨에 중부 월남을 해방시킬 정예 연대가 난데없는 화재로 곤혹을 치르고 있었다.

하지만 치 연대장은 화재보다 더 큰 불행이 다가오고 있는 것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7중대의 잔유 병력이 이곳까지 침투한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얼마 후 그들이 어떤 잔치를 벌일지 모르는 것이 치 연대장의 불행이었다.

치 연대장은 평소에 존경해 마지않던 지도자 동지를 만난 날을 떠올렸다. 킬러밸리에 온 것도 그의 명령 때문이었다. 그날 그는 오랜만에 사령부에서 일찍 퇴근하여 집에서 조용한 밤을 보내고 있었다.

조국 해방 전쟁은 점점 더 치열해지고 있었다. 미군들의 공습은 시도 때도 없이 자행되고 수없이 반복되었다. 특히 야간 공습은 무섭고 두려웠다. 그들은 선별적인 군사 목표에만 공격을 한다고 큰소리를 쳤지만 반드시 지켜지는 것도 아니었다.

그 날 밤은 아직까지 적의 공습경보가 없었다. 하노이 시가지는 깊은 정적 속에 잠겨 있었다.

전쟁 전에는 무척 아름다웠던 도시가 지금은 등화관제로 어두운 암흑의 도시로 변해 있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성장한 사람이었다. 이제 전쟁은 그의 생활 속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밤하늘에 울리는 귀청을 찢는 공습 사이렌 소리와 대공포의 포성, 그리고 공중에 난무하는 서치라이트의 불빛은 언제나 계속되는 일과였다.

그는 대나무 평상 위에 걸터앉아 밤하늘을 쳐다보았다. 탐조등의 불빛과 고막을 찢는 대공포의 포성, 그리고 샘 미사일이 난무하던 밤하늘은 모처럼 깊은 정적 속에 잠들어 있었다.

B52 폭격기에서 투하하는 폭탄의 둔탁한 폭음 대신, 이름 모를 풀벌레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다음호에 계속>

김범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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