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미허리의 두 눈은 독기로 파란 불꽃이 일고 있었다. 그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변을수 일병은 임태호 상병과 함께 짙은 어둠이 깔린 바나나 숲을 헤집고 능선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렸다. 바나나 잎사귀는 여름 한낮에 소낙비를 맞는 듯한 묘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무엇인가 우두둑 우두둑 하는 소리를 내며 바나나 잎사귀 위에 떨어지고 있었다. 놀랍게도 그것은 불똥들이었다. 불이 붙은 나무의 잔가지들이 강풍을 타고 바나나 잎사귀 위에 우박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얼마 후에 임태호 상병과 변을수 일병은 목표 지점인 능선 위로 올라갔다. 순간 두 사람은 킬러밸리를 내려다보고 할 말을 잊었다.
불타며 흐르는 강물은 강가의 밀림을 사정없이 태우며 빠르게 흐르고 있었다.
“이기 우째된 기고? 변 일병! 내가 꿈을 꾸고 있나? 강물이 와 저러노? 참말로 미치고 환장 하겠네.”
임태호 상병이 놀라서 소리쳤다. 강물은 골짜기 속에서 거대한 붉은 뱀처럼 용트림을 하며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그 불길은 조금 전 신동협 병장 일행이 병력 수송 중 기습당한 전투에서 송유관이 폭파하면서 발생한 것이었다. 두 사람이 그것을 알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송유관이 터지면서 하천으로 유입된 휘발유는 킬러밸리 전역으로 강물을 타고 빠르게 흐르면서 삽시간에 주변의 정글로 불길이 번져 나가고 있었다. 더구나 지금은 건기에서 우기로 접어드는 때로 계절풍이 부는 시기였다. 밀림은 연일 계속되는 고온으로 건조한 상태였다. 불에는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는 날씨였다.
킬러밸리는 굴뚝과 같은 지형이었기 때문에 강풍이 불자 불길은 순식간에 계곡 전체로 빠르게 번지고 있었다. 그림같이 아름답던 도원경 전체가 불바다로 변해 버렸다.
불길은 조금 전까지 그들이 머물고 있던 아름다운 별장을 덮치고 있었다. 그림같이 아름다운 석조 건물이 타오르는 불길에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변을수 일병과 임태호 상병은 넋을 잃고 그 무시무시한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곳은 바로 생지옥이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개미허리가 어둠 속에서 불쑥 나타났다. 권영준 병장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권 병장님은?”
변을수 일병이 애써 불길한 생각을 누르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죽었어.”
“죽었어요? 어떻게?.”
“등에 대검을 맞았더군.”
개미허리가 침울하게 말했다.
“콩까이들은 우째 댔는 기요?”
임태호 상병이 궁금한 듯 물었다.
“쌍년들은 도망쳤어. 빨리 여길 뜨자. 어물쩍거리다간 우리도 당할 거야.”
개미허리는 이를 악물고 앞장서서 정글을 열고 질풍같이 내달려 갔다.
석조 건물 가까운 정글에 3구의 시신이 불길에 타고 있었다. 등에 AK 소총의 대검을 맞은 권영준 병장과 목에 표창을 맞은 두 여자였다. 그것을 아는 사람은 개미허리뿐이었다.
월맹군 38연대 본부, 지하 벙커 C P.
벙커 안은 한증막처럼 무덥고 컴컴했다. 누엔 반 치 연대장은 희미한 등잔불 밑에서 늦은 저녁을 먹고 있었다. 그는 나무젓가락으로 밥을 떠서 입에 넣고 접시에 담긴 채소를 집어 들었다. 그때 삐이익 하고 무전기가 울었다. 당번병이 황급히 수화기를 건네주었다.
“뭐야?”
무전기로 보고를 받은 치 연대장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서며 젓가락을 탁자 위에 내동댕이쳤다. 치 연대장은 나무로 만든 탁자 위에 펼쳐 놓은 작전 지도를 뚫어질 듯 노려보았다.
그는 한 손에 수화기를 손에 든 채 부들부들 떨리는 손가락으로 지도 위의 어떤 지점을 가리키고 있었다.
무전은 3대대장 닌 소령으로부터 온 것이다. 3대대장은 킬러밸리에 대규모의 화재가 발생했다고 보고를 했다. 불길은 계곡 입구에서부터 강풍을 타고 급속도로 번지고 있다고 했다. 무전기를 통해 닌 소령의 다급한 목소리가 전해졌다.
“연대장님, 철수를 요청합니다. 화재로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어요. 철수 명령을...”
“이봐, 닌 소령! 누가 불을 질렀나?”
“17시경에 미군 58공병대 앞에 있는 송유관이 폭파되었습니다. 다량의 휘발유가 마른 하천을 타고 강물에 유입되면서 화재가 발생했습니다.”
“누가 송유관을 공격하라고 명령을 했나? 송유관은 절대로 안된다고 했지, 누구야 명령을 내린 놈이?”
“연대장님, 송유관을 공격한 것이 아닙니다. 따이한 신병 인수 차량을 공격하는 도중에 따이한이 폭파시켰습니다.”
연대장의 성격을 잘 아는 닌 소령은 거짓말을 했다.
“멍청한 자식! 누가 송유관을 공격하라고 했나? 송유관은 공격하면 안 된다고 했잖아. 바보 같은 자식, 넌 이거다.”
치 연대장은 허리에 차고 있던 45구경 권총을 뽑아 벙커의 천장을 쏴 버렸다. 천장의 모래흙이 우박처럼 떨어졌다. 좁은 벙커 속이 총성과 화약 냄새로 가득 찼다. 당번병은 치 연대장이 왜 이렇게 광적으로 흥분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평소 그는 과묵하고 냉정하며 침착한 지휘관이었다. 그런 그가 이성을 잃고 평소 그답지 않는 행동을 하고 있었다.
“이봐, 닌 소령! 퇴각은 절대로 안 된다. 그곳에서 불길을 잡아. 전 병력을 동원하여 차단벽을 쌓고 불을 꺼. 그곳에서 한발도 물러서면 안 된다. 후퇴하는 놈은 무조건 사살하라.”
“연대장님! 여긴 불바답니다. 부하들을 지휘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불 때문에 퇴로가 차단되었어요. 여긴 지옥입니다.”
<다음호에 계속>
김범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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