킬러 밸리 제 49회
킬러 밸리 제 49회
  • 김범선 
  • 입력 2009-02-11 13:58
  • 승인 2009.02.11 13:58
  • 호수 772
  • 56면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해녀기둥서방이 기어를 바꾸며 그대로 포차를 추월해 버렸다. 죽기 싫으면 네가 비켜라, 하는 식이었다. 해녀기둥서방의 두둑한 배짱은 정말 알아줘야 했다.

해녀기둥서방이 길을 열어 주자 뒤에서 따라오던 대대의 컴보이 지프차가 추월해 앞으로 나갔다. 홍승길 중위가 타고 있는 호위용 차량이다. 지프차에는 선임 탑승자 외에 운전병, 무전병, 경비병이 탑승하고 있었다.

해녀기둥서방이 운전하고 있는 트럭에는 선임 탑승자 안상도 중사, 행정병 정인수 하사, 그리고 적재함에는 월남 신병 32명과 LMG로 무장한 고참 호송병 4명, 무전병 1명이 탑승하고 있었다.

신병들은 왜, 고참들이 이렇게 안절부절못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삼거리를 지나자 도로에는 어둠이 짙게 깔리기 시작했다. 신동협 병장은 M16 소총의 탄창을 갈아 끼웠다. 윤창규 병장이 LMG에 총탄을 삽탄시키기 시작했다. 고참들은 알고 있었다. 위험이 얼마나 가까이 다가와 있는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텅 빈 도로 위를 2대의 차량이 무서운 속도로 달리기 시작했다.

“너무 늦었어, 사단에서 조금만 빨리 보내줘도 좋았을 걸.”

신동협 병장은 조바심을 치며 중얼거렸다. 시계 바늘은 5시 46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트럭은 무서운 속력으로 미군 58공병대 앞을 통과하고 있었다.

‘역시 해녀기둥서방은 잘하는군. 민병대 다리가 문제야. 그곳만 무사히 통과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

신동협 병장은 해녀기둥서방의 운전 솜씨를 믿었지만 언제나 방심은 금물이었다.

해녀기둥서방은 원래 포차 운전병이었다. 보통 키에 얼굴이 둥근 미남자로 감포가 고향이었다. 그는 입대 전에 제주도 해녀의 기둥서방 노릇을 했다. 그는 보기 드문 노랑머리와 쌍꺼풀진 큰 눈 때문에 혼혈아처럼 보였다. 그는 틈만 나면 제주도 해녀 5명과 전국의 바다를 누비며 잠수하던 시절을 이야기했다. 그는 서귀포 출신 해녀, 정희와 사랑을 나누었다. 귀국하면 떠돌이 생활을 청산하고 정희와 결혼해서 가정을 이룰 생각이었다. 그는 밤마다 자신의 허리를 코끼리 다리처럼 튼튼한 허벅지로 조여드는 정희의 정열적인 몸짓을 생각하며 귀국할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해녀기둥서방은 보기보다는 성격이 느린 곰 같은 사내였다. 그러나 운전 솜씨는 대단해서 부대 내에서는 아무도 그를 따를 수가 없었다.

“앗! 저게 뭐야?”

운전을 하던 해녀기둥서방이 놀라서 비명을 질렀다. 전방에 회색 고물 렘브레다(인력 수송용 3륜차)가 도로를 가로막은 채 수리를 하고 있었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 도로 위에 렘브레다를 세우고 수리하는 것을 해녀기둥서방은 본 적이 없었다. 예감이 이상했다. 앞서가던 컴보이 지프차가 경적을 울리며 렘브레다 옆을 쏜살같이 빠져나가 저만치 달아나 버렸다. 컴보이 지프차를 뒤따르던 해녀기둥서방은 적의 매복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빡을 치며 쌓은 경험에서 나오는 예감이었다. 해녀기둥서방은 속도를 올리며 렘브레다의 옆구리를 힘껏 들이받아 버렸다. 전방에 조금 전 앞서 빠져나간 컴보이 지프차가 대전차 지뢰를 밟고 산산조각이 나며 하늘로 튀어 올랐다.

타당 따따탕.

그것을 신호로 렘브레다 뒤에서 AK 자동소총이 불을 품기 시작했다. 트럭의 선임 탑승자 안상도 중사가 총탄을 맞고 앞으로 폭 꼬꾸라졌다. 해녀기둥서방이 수류탄을 뽑아 렘브레다를 행해 던졌다.

꽝!

폭음과 함께 렘브레다가 하늘로 치솟아 오르며 불이 붙었다. AK 자동소총 탄알이 우박처럼 쏟아졌다. 신동협 병장은 신병들에게 고함을 질렀다.

“뛰어 내려, 빨리!”

신동협 병장은 트럭에서 잽싸게 아스팔트 위로 뛰어 내렸다. 그리고 빙그르르 돌며 반대편 도로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반대편 도로 밑에서 수류탄이 돌멩이처럼 아군 트럭을 향해 날아들었다.

꽝꽝꽝.

“야 이 씹 새끼들아! 뛰어내려. 그냥 있으면 모두 죽는다. 빨리 튀어!”

신동협 병장이 도로 건너편을 향해 사격을 하며 고함을 질렀다. 그러나 월남 신병들은 트럭 바닥에 머리를 처박고 일어나려 하지 않았다. “죽으려고 월남 왔어? 빨리 뛰어 내리지 못해, 개새끼들아!”

신동협 병장은 화가 나서 큰 소리로 욕설을 퍼부었다.

이때 신병 한 사람이 트럭에서 펄쩍 뛰어 내렸다. 순간 건너편 도로 밑에 숨어 있던 V. C의 AK 자동소총이 그를 벌집으로 만들어 놓았다. 한 발의 수류탄이 트럭 안으로 날아들었다. 신동협 병장은 끝났구나, 생각을 했다. 순간 쾅 소리와 함께 더블백과 사람이 하늘로 높이 솟아올랐다. 다급한 나머지 트럭 안에 있던 신병들 중 누군가 더블 백으로 수류탄을 덮친 모양이다.

그때서야 신병들은 여기 있다가는 죽는다는 것을 알고 모두 트럭에서 우르르 뛰어 내렸다.

‘이런 젠장! 진작 그렇게 해야지. 죽을 놈은 죽고 살 놈은 사는 거야. 트럭에 엎드려 있다가는 살 놈도 죽는단 말이야, 알겠어?’

신동협 병장은 벌떡 일어서며 M16 소총을 갈기며 신병들을 엄호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탄창 한 개가 바닥이 났다. 그는 재빨리 새로 탄창을 갈아 끼우고 사격을 계속했다.

신병들이 그의 주위로 몰려들었다. 이제야 그들은 동료들의 값비싼 목숨을 대가로 치른 후 전쟁터의 생리를 깨달은 것 같았다.

‘병신같이 그냥 앉아서 죽을 거야? 총이 없으면 돌멩이라도 던져야지. 전쟁터에서는 자기 목숨은 자기가 지켜야 해. 이렇게 평범한 진리를 왜 모르나? 누가 널 대신해서 죽겠어? 아무도 하나뿐인 목숨을 널 위해 바칠 사람은 없어!’

순식간에 아스팔트 위에는 신병들의 시체로 가득 찼다. 적과 우군은 렘브레다와 트럭을 사이에 두고 치열한 교전을 벌였다. 도로 건너편에서 응사하는 적의 화력은 대단했다.

<다음호에 계속>

김범선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