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이제 더운 것은 물로 변해 땅속으로 스며들고 딱딱한 것은 가루로 변해 바람에 날리며 터럭은 흩어져서 형체조차 없어지겠지.
바로 옆에는 임태호 상병이 적병의 가슴팍을 타고 앉아 대검으로 난도질을 하고 있었다. 온 몸에 붉은 피를 흠뻑 뒤집어 쓴 채 미친 사람처럼 칼을 휘두르고 있었다.
변을수 일병은 옆으로 비켜서면서 다시 한 번 대검으로 적의 가슴팍을 푹 찔렀다. 적병의 가슴에서 뜨거운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올랐다.
변을수 일병은 대검을 손에 꽉 쥔 채 스르르 무너졌다. 임태호 상병은 개미허리가 걱정이 되었다. 임태호 상병은 바나나 숲을 향해 달렸다. 개미허리의 모습이 보였다. 개미허리는 유유히 담배를 빨며 먼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옆에는 2명의 적병이 쓰러져 있었다.
AK 자동소총을 등에 맨 병사는 앞으로 쓰러져 있었다. 또 한 사람, 허리에 권총을 차고 있는 적병은 누운 채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 시신의 코에서는 가느다란 핏방울이 흘러내려 바싹 마른 흙을 촉촉이 적시고 있었다.
“여길 빨리 떠나야겠어, 어쩐지 감이 나빠.”
개미허리가 임태호 상병에게 말했다.
어느새 강한 서풍이 불어오고 있었다. 무엇인가 타는 듯 한 메케한 냄새와 짙은 연기가 강한 바람을 타고 밀려오고 있었다.
월맹군 38연대
장군은 적을 만들고 병사들은 죽음을 만든다
맹호 사단 연병장, 오후 4시.
A포대 무전병 신동협 병장은 마음이 몹시 조급해졌다. 시계 바늘은 어느새 오후 4시 3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런데도 신병 인수 작업은 자꾸만 지연이 되고 있었다.
연병장에는 오전 10시에 퀴논 항구에 도착한 파월 신병들이 예하 부대로 배치되기 위하여 대기하고 있었다. 각 연대와 단위 부대의 인사과에서 나온 행정병들은 전투력이 뛰어난 병사들을 소속 부대로 스카우트하기 위해 정신없이 뛰어 다니고 있었다.
행정병들이 전투력이 뛰어난 병사들을 스카우트하는 일은 아주 중요한 일이었다. 예하 부대에서는 똘똘하고 용기 있는 병사들을 원하고 있었다. 연병장에는 수많은 월남 신병들이 예하 부대로 팔려나가기를 기다리며 서성거리고 있었다.
이곳은 전투 지역이라 사전에 병력을 인수한 후에 인사 명령이 떨어졌다. 행정병들은 주특기에 맞게 배정된 인원을 소속 부대로 데리고 가서 부대 특명으로 인사 명령을 보고했다.
오늘 대대에서 인수해야 할 병력은 32명이다. 그런데 아직도 9명이 부족했다. 대대 인사계 정인수 하사는 서둘러 나머지 인원을 챙기고 있었다. 그러나 약삭빠른 부대는 어느새 정원을 확보하여 병사들을 트럭에 싣고 휑 내빼고 있었다.
신동협 병장은 그들보다 동작이 빠른 부대가 몹시 부러웠다. 그리고 한층 더 애간장이 탔다. 사단의 망할 자식들은 꼭 이렇게 오후 늦은 시간에야 병력을 나눠주었다.
예하 부대의 귀대 할 길을 생각해 봐라. 부대 안은 이중 삼중으로 철통같이 경비를 하니 개미 새끼 한 마리도 침범하지 못하지만 사단 정문 밖에만 나가면 모두가 적이다. V.C와 첩자들이 병력의 이동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다. 더구나 갈 길이 먼 예하 부대는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하면 애간장이 타고 똥구멍이 간질간질했다.
어둠이 끼면 그때부터 세상은 V. C들의 차지였다. 해가 진 뒤에 도로 위에서 어물쩍거리다가는 어느 귀신이 잡아가는 줄도 모르고 죽었다. 우리나라 토종 귀신이 잡아가면 애걸하며 사정이라도 해보지, 여기 귀신은 말이 통하지 않는 타국이 아닌가?
지난번 쏭카우 주둔 부대의 병력 인수 차량들이 적의 기습을 받은 뒤부터는 사단에서도 정신을 차리고 서둘러 병력을 분배해 주었지만 오늘은 무슨 영문인지 자꾸만 시간이 지연 되고 있었다.
“야 정 하사! 어떻게 됐냐? 인수 끝났어?”
안상도 중사가 트럭에 앉아 시동을 건 채 소리쳤다. 그도 몹시 다급한 모양이다.
“예, 끝났습니다. 에잇 좆같다, 그만 뜨자. 출발! 잘해 봐라, 개새끼들아!”
정인수 하사는 욕설을 퍼부으며 트럭에 뛰어 올랐다. 어느새 각 부대의 병력 인수 차량들은 경주를 하고 있었다. 넓은 사단 연병장은 전 속력으로 질주하는 트럭들이 일으키는 누런 흙먼지가 짙은 안개처럼 앞을 가리고 있었다.
지금 떠나는 차량들은 모두 다급했다. 그들은 시간에 쫓기고 있었다. 더구나 트럭에 타고 있는 신병들은 전투 시에는 도움이 안 되는 별 볼일이 없는 풋내기들이다. 수많은 트럭들이 먼저 사단 위병소를 빠져나가기 위해 전속력으로 질주하며 정문으로 달려갔다. 그것은 생과 사를 가름하는 필사적인 자동차 경주였다.
사태의 위급함을 깨달은 위병소에서는 정문을 활짝 열고 병력 인수 차량들은 무조건 통과시키기 시작했다. 돌대가리 같은 사단의 먹물들은 이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해녀기둥서방 방이용 병장이 솜씨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그는 앞서 가는 26연대 차량을 단숨에 밀어붙여 추월을 해 버렸다.
지금부터는 해녀기둥서방의 운전 솜씨가 병사들의 생명을 좌우하게 될 것이다. 퀴논 시가지를 빠져 나오자 19번 외곽 도로에는 차량 통행이 훨씬 줄어들었다. 2차선 아스팔트 도로가 텅 빈 운동장처럼 썰렁하게 비어 있었다. 이것은 위험시간이 그만큼 가까이 다가왔다는 신호였다. 바로 앞에는 미군 포차가 꽁지가 빠지게 달아나고 있었다. 자식들도 겁날 게다. 지금이 몇 시야?
<다음호에 계속>
김범선
저작권자 © 일요서울i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