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대에서 수집한 정보에 의하면 대머리 산은 지역 V. C들이 활동하는 주 무대였다. 지금까지 월맹 정규군들이 이곳에서 작전을 펴고 있다는 첩보는 없었다.
월맹군들은 야생의 바나나 잎사귀 사이로 머리가 들쭉날쭉하며 언덕을 내려오고 있었다. 거리가 멀어 말소리는 들리지 않았으나 무엇이 그렇게도 재미있는지 하얀 이빨을 활짝 드러낸 채 웃고 있었다.
“총소리를 내면 절대로 안 된다. 이걸로 해치워.”
개미허리가 M16 소총의 대검을 흔들며 말했다.
“함부로 총소리를 내다가는 어떤 일을 당 할는지 몰라, 이걸 써라.”
개미허리는 다시 한 번 대검을 쓰라고 강조했다.
변을수 일병은 대검을 빼든 채 파랗게 질려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개미허리가 그런 변을수 일병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목을 찔러.”
개미허리는 변을수 일병의 등 뒤에서 왼팔로 목을 감고 오른 손으로 늑골 아래 부분을 찌르는 시늉을 하며 시범을 보였다.
월맹 정규군 3명은 AK 자동소총으로 무장을 했고 다른 한 명은 허리에 45구경 권총을 차고 있었다. 월맹 정규군의 새카맣게 탄 얼굴과 하얀 이빨은 무척 강인하고 빈틈이 없어 보였다. 체격은 다소 왜소하나 여유가 있고 당당한 자세는 병사들을 겁나게 만들었다.
월맹 정규군들은 길을 잘 아는 듯, 집 뒤편으로 나 있는 능선을 따라 망설임 없이 내려오고 있었다. 그들은 이제 막 왼쪽의 바나나 숲 사이의 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개미허리 일행은 주방을 빠져 나와 집 뒤편에 있는 장미넝쿨 속에 몸을 숨겼다. 넝쿨 사이로 내다보이는 월맹군들의 모습이 조금 전보다 훨씬 더 가깝게 느껴졌다.
그런데 조금 전에 보였던 월맹군 4명 중 2명만이 걸어오고 있었다. 아마 2명은 뒤에 처져 소변이라도 보는 모양이었다. 곧이어 30m 정도 뒤쳐져 2명의 병사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너희 둘이 저놈들을 맡아. 명심해. 한 칼에 해치워.”
개미허리가 뒤에 앞서 오는 2명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나직이 속삭였다.
“뒤의 2명은 어쩌고요?”
임태호 상병이 긴장으로 숨을 헐떡이며 물었다.
“내가 알아서 긴다.”
개미허리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혼자서예?”
“짜식, 니 일이나 잘해.”
개미허리는 여전히 담담한 어조로 말한 후에 바람처럼 어디론가 사라졌다.
변을수 일병은 가슴속이 저려 왔다. 총도 아니고 칼로 사람을 쑤셔야 하다니…
갑자기 어금니가 욱신거렸다. 개미허리는 총소리를 냈다가는 사냥개에 쫓기는 토끼 신세가 된다고 말했다. 사냥개가 많으면 토끼는 어차피 죽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칼로 사람을 찔러 죽여? 총이 아니고? 변을수 일병은 도망을 치고 싶었다. 도저히 사람을 죽일 자신이 없었다.
저벅 저벅.
발자국 소리가 바나나 숲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변을수 일병은 눈앞을 가리는 바나나 잎사귀를 들추고 귀를 쫑긋 세웠다. 빨라지는 심장의 고동 소리와 함께 더 가까이 들려오는 발자국 소리가 천근의 무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저벅 저벅.
변을수 일병은 숨결이 턱에 닿아 헐떡거렸다. 젖가슴 사이로 더운 땀방울이 조르르 흘려 내렸다. 입 속에서는 찬바람이 일며 어금니를 딱딱 마주치게 했다. 변을수 일병은 임태호 상병을 흘깃 바라보았다. 그는 어금니를 깨물며 한쪽 무릎을 세운 채 단거리 선수처럼 기다리고 있었다. 손에 들린 대검의 칼끝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핏발 선 눈동자는 살기에 젖은 맹수의 눈빛처럼 번들거렸다.
자신이 살기 위해 다른 사람의 생명을 앗으려는 필사적인 몸부림이었다. 공포에 질려 하얗게 말라붙은 입술을 혀끝으로 축이는 모습은 바로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선 변을수 일병, 자신의 모습이기도 했다.
‘죽여라, 죽여. 닭 모가지를 비틀 듯 단칼에 죽여 버려!’
악마가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속삭였다.
‘제발 저리 가다오. 너를 죽이고 싶지 않다. 가까이 오지 마라. 이렇게 두 손 모아 빌게. 개자식아! 그렇게 죽고 싶어? 오, 하나님. 저 자식을 쫓아 주세요. 니가 죽는 건 내 잘못이 아냐. 난, 가까이 오지 말라고 분명히 말했어. 그렇게도 죽고 싶어? 좋다, 죽여주마.’
변을수 일병의 간절한 기도와는 정반대로 월맹 정규군들은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바나나 밑둥치 사이로 군화를 신은 그들의 발목이 보이기 시작했다.
‘용감한 병사는 순간에 살고 비겁한 병사는 영원에 죽는다.’
그렇다, 용감한 병사는 순간적으로 과감한 방법을 선택한다. 그리고 자기의 살길을 찾는다. 그러나 비겁한 병사는 마음에 갈등을 일으켜 주저하는 사이에 자기를 방어할 기회를 놓친다. 순간이 이어지는 그 영원한 시간의 터널 속에서 말이다.
‘죽이지 못하면 내가 죽는다.’
헛도는 레코드판의 노랫말처럼 그 말이 머릿속을 빙글빙글 돌아갔다. 드디어 월맹 정규군들은 바나나 숲 속으로 들어왔다. 그들이 내쉬는 숨소리까지 들려 왔다.
‘지금 죽여야 해.’
악마가 변을수 일병은 귀에 속삭였다.
변을수 일병은 어금니를 깨물고 혼신의 힘을 다해 대검을 적병의 가슴 속 깊숙이 찔렀다. 칼끝이 살 속을 파고들며 늑골과 찡하고 부딪쳤다. 목을 감은 왼팔을 동아줄처럼 바짝 조였다.
불의에 기습을 당한 적병은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며 격렬하게 몸을 비틀며 저항을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심한 경련을 일으키더니 곧 축 늘어져 버렸다. 그래도 변을수 일병은 적의 목을 풀어 줄 수가 없었다. 팔을 풀어주면 금방이라도 되살아나 악귀처럼 덤벼들 것만 같았다.
<다음호에 계속>
김범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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