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권영준이 초등학교 1학년 때의 일이었다. 그녀는 아들과 함께 고향 단곡으로 다시 돌아왔다. 권영준의 학교생활도 자연히 끝이 나 버렸다.
단곡으로 귀향한 모자는 살림을 일구는데 전력을 다했다. 단곡댁은 얼마나 지독했는지 어린 권영준을 인근 김 이사 댁에 머슴살이를 시켰다. 권영준의 나이 열두 살, 새끼 머슴은 어머니가 몹시 보고 싶었다. 권영준은 새털같이 함박눈이 내리는 섣달 그믐날 밤에, 혼자서 삼십리 밤길을 걸어서 어머니를 찾아왔다.
어머니와 아들은 밤새 껴안고 울었다. 그리고 이른 새벽에 떠나기 싫다고 고집을 부리는 어린 아들을 어머니는 매정하게 쫓아 버렸다.
권영준은 다시 눈이 첩첩이 쌓인 산길을 걸어 주인집으로 되돌아갔다.
단곡댁은 이렇게 억척스럽게 살림을 모아 권영준이 입대할 무렵에는 사과 300주, 밭 3000평, 논 열 마지기로 마을에서는 부농이 되었다. 권영준은 월남에 온 후에 월 전투 수당 55불 80센트를 한 푼도 쓰지 않고 매달 어머니에게 송금 했다.
더구나 그는 입대 전에 결혼까지 한 가장이었다. 그의 처는 장성 석탄 광산에 근무하는 광부의 딸이었다. 강원도 새댁의 미모는 보는 사람들마다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큰 키에 모란꽃같이 화사한 얼굴, 그리고 온화한 성품과 후덕한 인정은 어머니의 마음을 아주 흡족하게 만들었다.
권영준은 임신 6개월의 아내를 두고 입대를 했다. 그는 원통에 주둔하고 있는 보병 부대에서 근무 중 아내가 아들을 출산했다는 편지를 받았다. 아들의 이름은 세호라고 했다.
전방에서 근무하는 동안, 그는 한 번도 휴가를 가본 적이 없었다. 그는 전방에서 일등병 계급장을 21개월이나 달았으나 진급을 하지 못했다. 그에 비해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동기생들은 병장으로 진급한 전우도 있었다. 월남에서 그는 병장으로 진급을 했다.
이곳은 전투 지구로 기간만 되면 바로 진급이 되었다.
한 번도 만난 본적이 없는 아들이 엉금엉금 기어서 권영준 병장의 무릎 위로 올라왔다. 권영준 병장은 처음에는 아들을 안아주고 얼러주었으나 총상을 입은 상처 부위가 너무 쑤시고 아파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신경질을 내며 아들놈을 왈칵 뒤로 밀어 버렸다.
권영준 병장은 잠에서 깨어 일어나 앉았다. 비록 꿈이었지만 아들을 밀어낸 것이 미안했다. 한번이라도 아들을 보고 죽었으면 원이 없을 것 같았다.
갑자기 대변이 보고 싶었다. 그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일어나 어기적거리며 전방에 보이는 넓은 바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바지를 끌러 내렸다. 그는 자욱한 안개와 새벽이슬에 젖은 발밑을 무심코 내려다보다가 가볍게 탄성을 뱉었다.
발아래는 작은 관목들이 푸름을 자랑하듯 바위 틈새를 비집고 서 있었고 아득히 내려다보이는 계곡에는 강물이 흐르고 있었다.
멀리 보이는 산등성이에는 기암괴석들이 피어오르는 새벽안개 속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정말 보기 드문 절경이었다. 드디어 기나긴 겨울의 터널을 빠져 나온 것이다.
거울같이 맑은 강물은 S자 모양의 긴 협곡을 지나 하구로 흘러가고 있었다. 이제 막 검은 협곡의 능선 위로 찬란한 아침 햇빛이 공작의 깃털처럼 활짝 날개를 펴며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황금빛 햇살이 협곡을 부챗살처럼 환하게 비추자 건너다보이는 대안이 엷은 안개 속에 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도원경이다, 도원경!”
권영준 병장이 바지를 올리며 자기도 모르게 탄성을 지르자 잠을 깬 병사들이 모여들었다.
“우아, 이기 우예 된 기고? 내사 마 도통 정신을 몬 차리겠다. 여기가 어디고?”
임태호 상병이 수선을 피우며 호들갑을 떨었다. 개미허리도 몹시 기쁜 모양이었다. 앙상한 흑백의 숲을 정처 없이 헤매다가 살아서 숨을 쉬는 푸른 숲과 맑은 강물을 바라보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리고 더 놀랄 일이 있었다. 병사들이 야영한 장소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재벌의 별장 같은 흰 석조 건물이 타는 듯 한 붉은 장미꽃 속에 몸을 숨기며 수줍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건물은 달력 속의 그림처럼 우아하고 단정했다.
월남은 거의 한 세기 동안 전쟁을 치른 나라였다. 그런데 깊은 정글 속에 그런 우아한 건물이 있다는 것이 믿어지질 않았다. 더구나 미군들은 베트공들의 은신처인 정글을 초토화시키는데 몰두 하고 있었다.
새벽에 눈을 뜨니 바로 코앞에 밀림이 우거진 긴 협곡과 푸른 강물, 그리고 흰 석조 대리석 건물이 전쟁과는 전혀 상관없이 오만하게 버티고 있다니 놀랄 일이었다.
초록의 카펫처럼 잘 손질된 푸른 정원, 베란다 위로 구름처럼 피어있는 넝쿨장미, 그리고 미풍에 여유 있게 흔들리는 야자수, 정녕 그곳은 무릉도원이었다.
누가 어떤 목적으로 저런 건물을 정글 속에 지었을까? 한 눈에 확 드러나는 저 건물이 어떻게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리지 않고 이렇게 살아남아 있을까? 병사들은 홀린 듯 석조 건물을 바라보았다. 그때였다. 현관문이 열리더니 흰 아오자이 차림의 아가씨가 기지개를 켜며 정원으로 걸어 나오고 있었다. 이른 아침의 훈풍에 아오자이 자락이 깃발처럼 펄럭였다. 한 눈에 보아도 뛰어난 미인이었다.
아가씨는 신고 있던 샌들을 벗어 던지고 잔디밭에 쪼그리고 앉았다. 그리고 아오자이 자락을 두 손으로 걷어 올리고 바지를 홀랑 까 내렸다. 그리고 소변을 보기 시작했다.
“저기 뭐꼬? 콩까이 아이가. 변 일병, 니 눈에도 저기 보이나. 내가 허깨비한테 홀린 게 아이가? 저 가스나들이 여기까지 우앤 일이고? 와아! 사람 미치겠다, 우째면 좋노? 아이쿠 죽겠다.”
<다음호에 계속>
김범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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