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미허리가 폐허가 된 옛 사원을 총구로 가리켰다. 사원은 오랜 세월 동안 밀림의 우거진 숲으로 뒤덮여 인간들로부터 모습을 감추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비행기로 살포한 에이전트 오렌지(고엽제) 때문에 숲이 모두 낙엽으로 변하자 사원은 신비한 베일을 벗어 던지고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개미허리 일행은 곧 사원에 당도했다. 외부의 벽은 허물어지고 하늘을 찔렀던 높은 탑들은 땅바닥에 무너져 나뒹굴고 있었다. 탑의 기단 부에는 부처님의 좌상이 중생들에게 어둠을 밝혀주며 이 땅을 불국 정토로 만들고자 삼매에 빠진 모습으로 조각되어 있었다.
탑의 오른편에는 큰 바위에 양각된 마애삼존불이 각기 다른 방향을 향해 중생을 제도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편에는 수많은 석재를 쌓아서 만든 높은 기단 위에는 관음보살님이 자비롭고 온화한 미소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관음보살님은 수백 년 동안의 온갖 풍상에도 파손되지 않고 자비의 화신으로 남아 금방이라도 입을 열어 상호 모순된 대립과 반목의 세계를 살고 있는 억조 중생들에게 한바탕 설법이라도 할 것만 같았다.
무시광대 겁으로부터 모든 생명은 평등하고 존귀하며 남을 해치면 내가 죽고, 남을 사랑하면 내가 산다는 평범한 우주의 근본 진리를 관음보살은 가르쳐 주고 있었다. 그러나 무명에 사로잡힌 인간들은 나만 살겠다고 귀중한 다른 생명들을 함부로 살생을 하는 무지에 빠져 있었다.
사원의 규모는 웅장하고 호화로웠다. 아름드리 돌기둥과 허물어진 사원의 건물들이 한때 융성했던 남방불교의 특색을 대변하고 있었다.
왕조의 신하처럼 두 줄로 도열해 있는 작은 석탑들을 지나 앞으로 나아가자 한 기의 왕 묘와 잡초로 뒤덮인 큰 비석이 나타났다. 검은 돌이끼로 몸단장을 한 거대한 비석은 왕 묘의 주인공이 예사로운 인물이 아니었음을 말해 주고 있었다.
사원 가운데에는 성수가 흐르고 있었다. 샘물은 돌기둥 앞에서 잠시 숨결을 고른 후 졸졸 소리를 내며 폐허가 된 채 돌무더기만 뒹구는 광장을 지나 사원의 아래쪽에 인공으로 만든 정방형의 연못 속으로 흘러 들어가고 있었다. 거울처럼 맑은 연못 속에는 광장 위에 서 있는 7층 석탑의 외로운 그림자가 또 하나의 석탑을 만들고 있었다.
텅 빈 옛 사원의 을씨년스러운 모습과 음산한 기운은 일행을 더욱 두렵게 만들었다.
“죽어도 더 몬 가겠다, 여기서 쉬자.”
임태호 상병이 털썩 주저앉았다.
“미쳤어, 임마! 귀신 나올까 겁난다, 출발!”
개미허리가 사정없이 행군을 독려했다. 병사들은 사원을 버리고 다시 정글 안으로 들어갔다.
시계 바늘은 어느새 오후 4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죽음의 정글은 아무리 전진해도 끝이 없었다. 그리고 코끝으로 스며드는 지독한 악취는 병사들을 괴롭혔다. 그들은 빨리 이곳을 벗어나 삼라만상이 살아서 꿈틀거리는 밝은 세계로 나가고 싶었다.
또 다시 하루해가 저물자 정글이 어둠 속에 잠겨 들었다. 병사들은 허기에 지쳐 통나무처럼 쓰러져 잠이 들었다. 이따금 몹쓸 꿈이라도 꾸는지 짐승처럼 뒤척이며 신음 소리를 토하고 있었다.
도원경(桃源境)
이 세상에 도원경은 없다. 내 마음 속에 있을 뿐
복부에 총상을 입은 권영준 병장은 제대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는 상처 부위의 통증이 심해 이따금 혼수상태에 빠져들곤 했다.
그는 경북 북부 지방에서 태어나 입대 전까지 독가촌에서 농사만 짓던 순박한 청년이었다.
그의 어머니 단곡댁은 육이오 전쟁 중인 열아홉 살에 안동 권 씨 가문으로 시집을 왔다. 그러나 첫날밤을 겨우 치른 신랑은 이튿날 징집으로 끌려가 버렸다. 당시는 휴전이 임박하여 전투가 가장 치열했던 시기였다. 억세게도 재수가 없는 이 청년은 휴전을 일주일 앞두고 철원 지구 전투에서 중공군이 쏜 총을 맞고 전사했다.
신부는 신랑의 얼굴마저 자세히 기억하지 못했다. 더구나 결혼 당시에는 가세가 넉넉하지 못해 결혼사진도 찍어두지 못했다. 그녀는 얼굴도 자세히 기억하지 못하는 신랑을 위해 평생을 과부로 수절을 하며 살았었다. 다행히도 첫날밤에 수태한 태아가 권영준 병장이었다.
열아홉 살에 과부가 된 단곡댁은 온갖 고생을 다하며 아들을 키웠다. 그녀는 날품을 팔면서도 한 번도 개가할 생각을 하지 않고 억척스럽게 살았었다. 근동에 살고 있던 친정 오빠가 개가를 권유하자, 그녀는 동짓달 깊은 야밤에 젖먹이 권영준을 들쳐 업고 백 리 길을 걸어 읍내로 도망쳐 버렸다. 그리고 역전에 있는 대성 한약방에서 식모살이를 시작했다. 약국 주인은 아들이 없이 딸만 다섯 뿐인 방 주사였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때 이른 무더위로 밤새 뒤척이던 그녀는 속옷 차림으로 새벽녘에야 겨우 잠을 이룰 수가 있었다.
아랫도리를 시원하게 내놓고 잠이 들었던 그녀는, 가슴이 몹시 답답하여 눈을 떴다. 약국 주인 방 주사가 그녀의 배 위에서 삭신을 짓누르고 있었다. 어느새 그녀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으로 변해 있었다. 단곡댁이 비명을 지르자 방 주사가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단곡댁, 아들 하나만 놔줘. 제발 부탁이야!”
방 주사가 가쁜 숨을 헐떡이며 애원을 했다.
“뭐야, 이 개 같은 놈!”
단곡댁은 발길로 방 주사의 사타구니를 차 버렸다.
“어이쿠!”
방 주사가 사타구니를 감싸 쥐고 맴을 빙빙 돌았다. 그녀는 어린 영준을 깨워 약국을 나섰다.
<다음호에 계속>
김범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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