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였다. 갑자기 “따르륵” 하고 정적을 깨는 총소리가 들려왔다. 변을수 일병은 총알이 귓전을 스쳐 지나가자 이제 죽었다고 생각했다.
어둠 속의 적은 ‘따르륵 따르륵’ 하면 3발씩 점사를 하고 있었다. 그것은 사격을 아주 많이 한 고참들만의 솜씨였다. M16 소총은 자동으로 쏘면 순식간에 15발 탄창이 바닥나 버렸다. 따라서 고참들은 손가락을 방아쇠에 걸고 3발씩 점사를 하는 것이다. 병사들은 총소리만 듣고도 고참들을 가려냈다.
“저런 미친 놈.”
개미허리가 중얼거렸다. 변을수 일병은 개미허리가 말하는 뜻을 알지 못했다.
“저건 우군이야. 총소리가 앰십육이잖아.”
“변을수 일병은 그때서야 어둠 속의 적이 우군이라는 것을 짐작했다.”
“사격 중지! 누구냐? 손들고 나와라.”
개미허리가 총을 겨누며 어둠 속에다 소리쳤다.
“닌, 누고?”
적이 물었다.
“임마, 너 태호지?”
“김 하사님? 개미허리 김 하사님, 맞지요? 우왓! 살았다.”
환호성을 지르며 어둠에서 임태호 상병이 뛰어 나왔다.
임 상병은 정글복은 갈기갈기 찢어져 걸레가 되었고 철모를 쓰지 않은 이마에는 검붉은 피가 말라붙어 있었다.
“와아! 변 일병 아이가? 니도 살아 있었나. 내가 니를 울매나 찾았는지 아나? 나는 니가 디진 줄 알았다. 아이쿠, 이 문디이 자슥아!”
임태호 상병이 변을수 일병을 왈칵 껴안았다.
“자식! 또 이빨 까네, 흐흐흐.”
개미허리도 임태호 상병을 만나자 몹시 반가운 모양이었다. 하긴 중대가 박살이 났는데 살아서 다시 만났으니 왜 반갑지 않겠는가?
변을수 일병은 임태호 상병을 만난 것이 몹시 기뻤다. 마치 구세주라도 만난 기분이었다. 모든 일에 낙천적인 그를 만난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절망에 빠진 현재의 상황 속에서도 임태호 상병은 여전히 낙천적이고 여유가 있었다. 그는 벼락을 치는 하늘도 속여 먹을 친구였다.
“오늘밤이 제삿날이라고 생각하이 참말로 미치겠더라꼬. 그런데 저기 누고? 야 임마, 닌 누고? 아이고, 권 병장님 아인교? 우째다 요래댔는 기요? 많이 다칫서요?”
“견딜만하다. 너도 용케 살았구나.”
권영준 병장이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어딜 맞았어요?”
“복부에.”
“우째다 이래 당했는기요? 조심하제.”
임태호 상병은 수선을 떨자 조금 전까지 침을 했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바뀌었다. 얼이 빠져 있던 병사들이 갑자기 정신이 들었다.
“야 봐라, 변 일병! 니 깡통 좀 없나? 배고파 죽겠다마.”
임태호 상병은 죽는시늉을 하며 변을수 일병에게 손을 내밀었다. 변을수 일병이 호주머니 속에서 햄 한 깡통을 건네주자 임태호 상병은 게걸스럽게 먹어 치웠다. 그리고 또 수다를 떨었다.
“이히히! 어제 점심 때 남호구 병장과 이거 묵다가 디질뻔 안 했나? 햄 한 조각을 입에 처넣었는데 언 챘는지 배가 살살 아픈 기라. 그래서 똥 좀 눌라꼬 빙빙 돌다보이 적당한 데가 없는 기라. 그래가이고 조짜 보이 널찍한 바위가 보이더라. 옳다 요기가 명산 터다, 하고 막 싸는데 휙 하고 수류탄이 날아오는 거라. 워매 뜨거라, 하고 토끼는데 바지 올릴 새가 어딧더노? 꽝! 하는데 와 미치겠더라, 온통 바지에 똥칠을 안 했나.”
“이 자식, 어쩐지 냄새가 고약하더라. 에이 구려! 에퇘퇘퇘.”
개미허리가 코를 감싸 쥐며 뒤로 물러나 앉았다. 정말 임태호 상병의 몸에서는 이상한 냄새가 나고 있었다. 그러나 하나뿐인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판에 바지에 똥칠한 것이 문제겠는가?
“남 병장님은요?”
변을수 일병이 궁금한 듯 물었다.
“남 빙장님 말이가? 내카 같이 있었는데 수류탄이 날아기야. 3소대 조문기 하사가 산산조각이 나드라카이. 워매 뜨거라, 하고 한 손으로 허리띠를 잡고 다른 손으로는 정신없이 한 클립을 끌고 보이 남빙장님이 안보이더라. 그라이 우째겠노? 할 수 없이 혼자서 대머리산 쪽으로 도망을 쳤제. 고짜 가면 우군이 안 있겠나 하고.”
“야 임태호, 여기가 어디쯤 되냐?”
개미허리가 임태호 상병에게 물었다.
“중대가 깨질 때 조 하사님 하고 도망을 쳤는데, 조 하사님이 동쪽에 보이는기, 저기 대머리산이라꼬 카데요.”
“저기 보이는 게 대머리 산?”
“맞심더, 아홉 시 방향이라요.”
그러나 개미허리는 자꾸만 고개를 갸우뚱하며 생각에 빠져들었다. 그들은 킬러밸리 입구에서 매복 중 적의 역매복에 걸려 중대가 전멸 당 한 후 정글 속을 헤매고 있었다. 적의 추격에서는 완전히 벗어난 것 같았지만 현재의 위치를 알 수가 없었다. 울창한 밀림 속에도 새벽의 여명이 찾아 들었다. 원시림 나무 사이로 햇빛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악몽 같은 밤이 지나가고 다시 하루의 아침이 시작되고 있었다.
“야, 변 일병, 내 눈이 잘못된 기가? 저기, 와 저 지랄이고?”
잠에서 깬 임태호 상병이 두 손으로 눈을 비비며 말했다. 키가 큰 원시림들이 나뭇잎은 전혀 없는 앙상한 겨울나무로 가지로 변해 있었다. 그것은 마치 고등학교 생물 시간에 박제된 하얀 인간의 뼈대를 보는 것만 같았다. 울창하던 숲들은 고국의 겨울 산처럼 앙상하게 변해 있었다. 줄기만 남은 관목들, 말라비틀어진 칡넝쿨, 발목이 푹푹 빠지도록 쌓여있는 낙엽 등은 섬뜩할 정도로 낯설어 보였다.
<다음호에 계속>
김범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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