킬러 밸리 제 35회
킬러 밸리 제 35회
  • 김범선  
  • 입력 2008-11-06 13:27
  • 승인 2008.11.06 13:27
  • 호수 758
  • 56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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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소대는 불이 활활 타오르는 갈대밭으로 퇴각하고 있었다. 병사들은 피투성이가 된 채 전우들을 부축하며 한라산으로 집결하고 있었다. 105mm 포와 155mm 포의 포탄들이 전면과 측면의 적들을 차단하기 위해 우박처럼 떨어지고 있었다.

105mm 포의 5개의 조명탄이 밤하늘 높이 한 줄로 매달려 떨어지고 있었다. 제일 아래쪽의 조명탄이 지면에 가까워져 불이 꺼지면 꼭대기에서 다시 새로운 조명탄이 터졌다. 조명탄은 강렬한 불빛으로 끊임없이 전선을 대낮처럼 환하게 밝혀 놓았다.

밝은 조명 속에서 H21 헬기 한 대가 어렵게 착륙을 했다. 병사들은 벌떼처럼 몰려들었다.

헬기가 부웅 떠오르자 동체 속으로 기어들지 못한 병사들은 창문가에 대롱대롱 매달려 날아가고 있었다.

또 다른 헬기 한 대가 불빛 속에서 착륙을 시도했다.

병사들을 태우고 하늘로 떠오르던 헬기 한 대가 포탄에 맞고 불덩어리가 된 채 곤두박질을 해버렸다. 또 다른 한 대는 조종석에 포탄을 맞고 그 자리에서 폭발해 버렸다. 순식간에 헬기 착륙장은 불바다로 변했다. 그 와중에 박동수 대위가 포탄의 파편에 맞고 쓰러졌다.

그때야 비로소 박동수 중대장은 우군의 포성과는 전혀 다른 포성을 들을 수가 있었다. 그 포성은 멀리 킬러밸리에서 들려오는 적의 포 소리였다. 적군의 포격은 헬기를 정확하게 공격했다. 헬기들은 착륙을 포기하고 철수했다.

병사들은 탈주로가 봉쇄되자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메뚜기처럼 사방으로 흩어졌다. 막강한 7중대의 병사들이 산 설고 물 설은 낯선 나라의 정글 속으로 도망치고 있었다.

박동수 중대장은 큰 대자로 누워 밤하늘을 쳐다보았다. 눈물이 두 볼을 타고 흘러 내렸다.

그때 조명탄 불빛 속에 잠깐 개미허리의 모습이 보였다.

“깜상, 내 이럴 줄 알았다. 너 땜에 7중대는 박살 난기야. 이기 다 니 놈이 동정해서 풀어준 꼬마 녀석이 우릴 이렇게 만들었어. 잘해 봐라. 개새끼들아! 행님은 먼저 간다.“

무전기를 벗어서 내동댕이치며 개미허리는 투덜거리며 혼자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삐익 삐익, 여긴 벽돌장 육이다. 벽돌장 팔은 응답하라.”

갑자기 무전기 신호가 떨어졌다. 신동협 병장은 깜짝 놀라 수신기를 집어 들었다. 어느새 비가 세차게 쏟아지고 있었다.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를 맞으면서 깜빡 잠이 든 것 같았다. 수신기를 잡은 팔목을 타고 빗물이 줄줄 흘러내려 소매 속으로 기어 들어갔다. 스쿨이 오는 모양이다. 신동협 병장은 손으로 입을 가리며 대답했다.

“벽돌장 팔이다, 송신하라.”

“갈매기님, 큰일났습니다. 벽돌장 칠이 당하고 있습니다. 역 매복에 걸린 것 같습니다.”

“칠이 역매복에 걸려?”

“예, 감청 하다가 들었습니다, 총소리가 요란하고 김 하사님이 울부짖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고맙다, 수도 고구마(수고).”

신동협 병장은 재빨리 무전기의 주파수를 7중대로 맞추었다. 그러자 개미허리의 울부짖는 소리가 전파를 타고 흘러 나왔다.

“좌표 367259로 포 지원 바란다. 타앙 탕탕..... 본 대는 전멸한다. 빨리빨리. 왓! 오뚝이가 떨어진다. 지원용 헬기가 당했다. 철수하라 철수하라. 본 대는 전멸…”

“벽돌장 칠, 여긴 팔이다. 김 하사, 김 하사…”

신동협 병장이 다급하게 개미허리를 불렀다. 그러나 개미허리는 정신이 없었다.

“적이 몰려온다, 새카맣게 몰려온다. 사격하라, 응사하라. 탕탕탕…”

“어이 김 하사, 김 하사!”

신동협 병장이 다급하게 불렀다.

앙케와 빈케에서 날아오는 105mm포와 155mm포의 조명탄이 밤하늘을 대낮처럼 환하게 밝혀 놓았다. 신동협 병장은 북쪽 하늘을 쳐다보았다. 많은 조명탄이 밤하늘을 아름답게 수놓고 있었다. 조명탄은 나란히 한 줄로 서서 천천히 검은 밤하늘을 환하게 밝히며 떨어지고 있었다. 청백색의 강렬한 불빛이 눈이 부시게 아름다웠다. 조명탄의 포성과 총성이 천지를 진동하고 있었다.

“신 병장, 무슨 일이야. 저긴 7중대 지역 아닌가?”

중대장 박형돈 대위가 물었다.

“7중대가 전멸 당하고 있습니다.”

“뭐야? 7중대가! 교신을 해봐.”

“두절됐습니다.”

“통신이 끊겨? 큰일 났군.”

신동협 병장은 고개를 들고 밤하늘을 쳐다보았다. 어느새 스콜이 끝나고 먹구름 사이로 핏빛 보름달이 잠깐 얼굴을 내밀고는 슬며시 사라졌다. 신동협 병장은 그 달빛이 마치 7중대의 불행을 예고하는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웠다.


죽음의 계곡

죽은 자와 곧 죽게 될 자의 계곡

변을수 일병은 선인장과 칡넝쿨로 뒤엉킨 정글 속으로 숨어들었다. 여태까지 이렇게 두려운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도대체 적이 어디 있단 말인가?

사방에 적군이 깔려 있는 것만 같았다. 자꾸만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갑자기 적군이 불쑥 나타날 것만 같았다. 극심한 공포가 파도처럼 밀려 왔다. 철모 속에서 흘러 내려 볼을 타고 입 속으로 스며드는 짭짤한 맛, 그것은 바로 비릿한 피의 맛이었다. 팔이 하나 떨어져도 머리가 깨져도 여기서 살아나 갈 수만 있다면 더 이상 무엇을 바라겠는가? 오직 생존만이 변을수 일병의 목표였다. 살고 싶었다.

꽝!

지근거리에 터지는 포탄과 함께 그는 앞으로 폭 고꾸라졌다. 샛노란 현기증에 머리가 빙그르 돌며 눈앞에 수많은 반딧불들이 반짝거리며 지나갔다. ‘개미허리 김 하사가 입버릇처럼 번개 씹 하는 걸 봤다더니 이걸 두고 하는 말이구나.’

<다음호에 계속>

김범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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