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이다, 스위치. 크레모아 스위치!”
누군가 소리쳤다. 그때서야 변을수 일병은 정신을 차리고 손에 들고 있던 크레모아 스위치를 누르려고 했다. 순간, 변을수 일병은 뒤로 벌렁 나가 떨어졌다. 옆에 있던 임태호 상병이 M16 소총의 개머리판으로 변을수 일병의 손목을 쳐버렸기 때문이다.
그와 동시에 전면에 설치한 조명탄이 청백색의 강렬한 섬광을 내뿜으며 터졌다. 조명탄 섬광 속에 적의 모습이 선명히 드러났다.
타타탕!
임태호 상병이 벌떡 일어서며 M16 소총으로 비로 쓸듯 갈겨 버렸다.
바로 옆에 매복해 있던 1분대의 전면 크레모아가 꽝 하고 터졌다. 그런데 놀랍게도 크레모아 파편에 쓰러진 것은 적이 아니라 매복해 있던 아군이었다. 병사들은 무서운 비명 소리를 지르며 때굴때굴 굴렀다.
그때야 변을수 일병은 조명탄의 섬광 속에서 조금 전 그가 설치한 크레모아를 자세히 볼 수가 있었다. 크레모아는 야간에 전, 후면을 구분하기 위해 후면에 흰 페인트를 칠해 놓았었다. 그런데 어느새 크레모아는 모두 반대편으로 돌려져 있었다. 물론 적이 공격을 하기 전에 해놓은 짓일 것이다. 화기 소대가 아군의 크레모아에 당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변을수 일병은 임태호 상병이 소총의 개머리판으로 그의 손목을 친 이유를 이제야 알 수가 있었다. 만일 변을수 일병이 크레모아 스위치를 눌렀다면 그는 팔천 발의 파편을 정면으로 맞고 몸은 산산조각이 났을 것이다. 다행히도 월남 고참인 임태호 상병이 그것을 눈치 채고 변을수 일병의 손목을 쳐서 목숨을 구한 것이다.
탁!
본부 소대 매복 지점에서 적색 조명탄이 하늘 높이 솟아올랐다. 눈이 빠지도록 기다리던 공격 개시 신호였다.
따르르륵 따르르륵.
LMG와 M16 소총이 불을 뿜기 시작했다. 그러나 교전 시간이 길어질수록 7중대는 점점 괴멸 당하고 있었다.
박동수 중대장은 도대체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적의 주력은 어디 있는가? 적의 병력은 얼마나 되는가? 제 1소대 지역과 중앙의 화기 소대, 그리고 본부 소대까지 공격을 받고 있었다.
“아냐, 이건 아니야.”
박동수 중대장은 놀라서 비명을 질렀다.
처음 그의 생각은 킬러밸리 입구에 은밀하게 매복하고 있다가 오늘밤에 빈딩성으로 출동, 적의 소규모 병력을 칠 생각이었다.
그런데 정반대의 현상이 벌어지고 있었다. 7중대는 보기 좋게 적의 역매복에 걸려 그물 속의 고기들처럼 꼼짝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더구나 밤새도록 미쳐 날뛴 북과 꽹과리 소리와 정우병 상병의 처절한 비명 소리에 병사들은 완전히 혼이 빠져 있었다.
귀신도 모르게 매복해 있다고 생각했던 소대들이 적의 벌떼 같은 집중 화력을 받고 순식간에 무너졌다.
더욱 기절할 노릇은 조명탄과 크레모아로 구성한 중대 화망이 도리어 병사들을 죽이고 있었다. 이것은 예삿일이 아니었다.
“김 하사, 철수 헬기를 요청하라 빨리! 전 중대는 한라산으로 후퇴! 명령이다, 전 중대는 한라산으로 집결하라.”
박동수 중대장이 다급하게 후퇴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중대는 퇴각 명령도 내리기 전에 이미 후방 엄호조가 무너지고 있었다. 석종수 하사의 분대가 괴멸 당한 것이다.
개미허리는 무전기를 열고 A포대의 FDC와의 교신을 시도했다. 그러나 좀처럼 무전기가 연결이 되지 않았다.
“김 하사! 포는 어떻게 됐냐? 포는 뭐하고 있는 거야?”
박동수 중대장은 벌떼처럼 밀려오는 수많은 적들을 향해 M16 소총으로 사격하며 고함을 질렀다.
부상당한 병사들의 울부짖음과 신음소리, 무서운 외마디 비명소리, 예광탄의 붉은 포물선, 그리고 폭음과 눈부신 섬광이 밤하늘에 가득히 울려 퍼졌다.
그때 A포대의 FDC와 연결이 되었다. A포대의 무전병은 신동협 병장이었다. 하지만 개미허리는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정신이 없었다.
갑자기 꽝 하는 폭음과 함께 105mm 포탄이 날아오기 시작했다. 마침내 우군의 포 지원 시작된 것이다.
팍 하는 소리와 함께 밤하늘 높이 청백색의 눈부신 섬광이 터졌다. 강렬한 청백색의 조명은 교전 지역을 대낮같이 환하게 밝혀 놓았다. 우군의 155 mm 포의 조명탄도 터졌다.
그때야 박동수 중대장은 전선을 한 눈에 볼 수가 있었다. 마른 실개천을 중심으로 매복해 있던 중대를 포위하고 북과 꽹과리를 치며 다가오는 수많은 검은 그림자들이 보였다.
이렇게 많은 정규 병력이 도대체 어디서 왔단 말인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엄청난 적의 병력을 보자 박동수 중대장은 입이 딱 벌어졌다. 우박처럼 쏟아지는 적의 총탄에 사랑하는 그의 부하들이 사력을 다해 저항을 하고 있었다.
오정호 중위의 화기 소대가 한라산으로 퇴각하며 처절하게 저항하고 있었다. 정영일 중위의 제 2소대가 조명탄의 불빛 속에서 적과 육탄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나 역부족이었다. 매복은 완전히 실패였다.
“후퇴, 후퇴하라! 한라산으로 집결하라.”
박동수 중대장은 목이 메여 소리쳤다. 그때였다. 남쪽 하늘 저 멀리서 우르릉, 우르릉 하며 헬기가 철수 지원 헬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제 1소대장 김영길 중위가 어깨에서 피를 흘리며 박동수 중대장에게 다가왔다.
“중대장님, 여깁니다! 빨리 이쪽으로.”
<다음호에 계속>
김범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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