킬러 밸리 제 33회
킬러 밸리 제 33회
  •  기자
  • 입력 2008-10-23 13:28
  • 승인 2008.10.23 13:28
  • 호수 756
  • 56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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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상병, 정 상병.”

남호구 병장이 귀를 틀어막으며 중얼거렸다.

‘그럼, 이 비명 소리는 낮에 행방불명이 된 정 상병의 목소리란 말인가?’

변 일병은 공포에 떨었다.

“전마들이 일부로 직이지 않고 납치한 기라. 우리를 칠라꼬 정 상병을 요 부근 어딘가에 묶어 놓고 칼로 살점을 넝마 조각처럼 기리고 있는 기라. 우리가 분노와 공포에 질려 사격을 하도록 유도하고 있는 기라. 저 소리에 기가 질려 우리가 사격을 하면 위치가 노출되는 기야. 고기 전마들의 작전 아이가.”

임태호 상병이 중얼거리며 이를 갈았다. 그때 정우병 상병의 비명 소리가 다시 터져 나왔다.

“중대장님! 빨리 죽여줘요. 제발 빨리 좀 죽여줘요. 야, 이 새끼들아! 죽이려면 빨리 죽여라. 비겁하게 칼로 그리지 말고 한 방에 죽여라. 죽여라, 죽여...”

변을수 일병은 울컥 토했다. 자꾸만 배속이 울렁거리며 메스꺼워졌다.

정우병 상병은 강원도 명주군이 고향인 순박한 시골 청년이었다. 그는 입대 전에 아버지와 함께 울릉도 부근의 어장에서 오징어를 잡는 어부였다. 제대 후에 그의 꿈은 작은 동력선을 구입해서 아버지와 함께 울릉도 어장으로 나가 오징어 낚시를 하는 것이었다.

아직도 소년티를 채 벗어나지 못한 정우병 상병은 아침까지만 해도 변을수 일병에게 애인 사진을 보여주며 귀국 후의 꿈을 설계하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무슨 잘못이 있단 말인가?

변을수 일병은 고개를 들고 칠흑같이 어두운 밤하늘을 쳐다보았다. 시커먼 먹구름 사이로 재빨리 얼굴을 내밀고 사라지는 보름달이 보였다.

아, 오늘이 보름날이었던가? 달빛마저 고국의 그것과 달랐다. 붉은 핏빛으로 물든 요사스러운 달무리. 우린 너희들과 싸우고 싶지 않다. 누가 월남 오고 싶어 온줄 아니? 너희들은 잘 모르지만 우리에게는 3년이라는 국방의 의무가 있다. 강제로 끌려온 거야. 군대 생활 3년을 못 때우면 우린 취직도 못해. 장가도 못가. 거긴 반도라 탈영해서 도망 갈 곳도 없어. 우리가 전방에서 추운 겨울에 얼마나 고생을 한 줄 아니? 이것 봐라, 얼어서 발톱이 모두 빠졌잖아. 우리들은 3년간을 군대에서 보내야 사회생활을 할 수 있다. 제발 우릴 그냥 보내 다오. 고향에 있는 가족들의 품으로 무사히 돌아 갈 수 있게 그냥 보내 다오. 우린 너희들과 싸우기 싫어.


제17편 광란의 꽹과리 미칠 듯이 시끄러운 소리

쿵짝 쿵짝.

또다시 요란스러운 꽹과리 소리가 울부짖기 시작했다. 변 일병은 손목시계를 흘깃 바라보았다. 파란 불빛의 야광 시계 바늘이 10시 2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마음껏 갈겨 보고 싶다. M16 소총으로 타타타 하며 속이 후련하도록 갈겨 보고 싶었다. 정우병 상병을 저렇게 갈기갈기 찢어 죽일 바에는 차라리 단 한방의 총탄으로 죽여 버리고 싶다. 밤이 새도록 발광을 하는 저 미친 자들을 죽이고 싶다. 가슴속이 후련하도록 갈기갈기 찢어 죽이고 싶다.

화산처럼 활활 타오르는 분노, 용암처럼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증오심, 미칠 것만 같은 적개심이 온 몸을 휘감아 돌았다.

“임마 자슥, 이기 미친 놈 아이가? 니, 직금 대가리 처박고 뭐 하노? 기도하는 기가? 목숨이 눈앞에서 왔다 갔다 카는 데.”

갑자기 눈앞에서 불이 번쩍 튀었다. 옆에 있던 임태호 상병이 소총의 개머리판으로 변을수 일병의 철모를 내리친 것이다. 충격으로 눈앞이 아찔한 게 머릿속이 빙그르르 돌았다.

어둠과 귀청을 찢는 꽹과리 소리, 그리고 울부짖는 비명 소리… 눈에 보이지 않는 적들은 그 짓을 밤새도록 되풀이를 했다.

시간은 어느새, 01시 30분.

병사들은 점점 적이 노리는 대로 자포자기 상태에 빠져들었다. 끊임없이 계속되는 공포와 미칠 것 같은 분노를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적들은 처음에는 20분 간격으로, 이제는 5분 간격으로 북과 꽹과리를 치다가는 뚝 그쳐 버리는 행동을 반복하고 있었다. 이젠 조용한 정적이 더 무섭고 불안했다.

그때였다. 쾅 하는 폭음과 함께 지축이 흔들리며 2소대 3분대가 매복하고 있는 지점에서 섬광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불길이 밤하늘 높이 치솟아 올랐다. 매복 지점은 갈대와 잡목에 불이 붙으며 대낮같이 환하게 밝아졌다.

곧이어 16발의 박격포 탄이 우박처럼 그곳을 강타하기 시작했다.

불길 속에서 석종수 하사가 이끄는 분대가 M16 소총으로 난사를 하며 헬기의 착륙장으로 퇴각하기 시작했다. 석종수 하사의 분대를 향해 수많은 붉은 예광탄이 날아가고 있었다. 엄청난 병력이 사격하는 집중 화력이었다. 예상치 못한 적의 공격에 3분대는 우왕좌왕하며 퇴각하기에 급급했다.

꽝!

갑자기 화기 소대 전면에 설치한 크레모아가 지축을 울리며 터졌다.

“악!”

이용호 병장이 불빛 속에서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벌떡 일어섰다. 이용호 병장뿐만 아니라 분대원 배주환 일병과 김성보 상병도 온 몸에 붉은 피를 흠뻑 뒤집어 쓴 채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그들은 크레모아의 파편에 맞은 것이다.

크레모아는 전면에서 침투하는 적들을 살상하기 위해 우군이 설치한 것이다. 그런데 크레모아의 폭발과 동시에 매복해 있던 아군의 분대장과 병사들이 그 파편을 맞은 것이다. 그들은 몸을 일으키자마자 적의 벌떼 같은 집중사격을 받고 나무토막처럼 힘없이 나 동그라졌다.

변을수 일병은 이 어처구니없는 일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만 같았다. 가위에 눌러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비명을 지르는 악몽, 이게 정말 꿈이라면 얼마나 좋겠는가?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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