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드디어 7중대는 마른 실개천을 중심으로 분대별로 매복에 들어갔다. 실개천은 폭이 20m 정도 되는 작은 개활지를 끼고 있었다. 오솔길은 실개천을 건너 500m 지점에서부터 ‘Y’ 자로 급커브를 그리며 킬러밸리로 이어져 있었다.
마른 실개천에는 바윗돌로 듬성듬성 징검다리가 놓여 있었다. 주변이 어두워질수록 실개천 바닥은 더욱 희게 드러났었다.
징검다리 정면에는 홍영식 중위의 화기 소대가 LMG와 크레모아를 설치하고 있었다. 중대 전면에는 28발의 크레모아와 39발의 조명탄을 가느다란 인계 철선으로 거미줄처럼 걸어 놓았다.
화기 소대 왼쪽에는 제 2소대가 화망을 짜느라 바쁘게 뛰고 있었다. 만약 오늘밤에 킬러밸리에 은신하고 있는 적들이 나온다면 먼저 화기 소대가 설치한 조명탄에 걸릴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인계 철선은 순식간에 조명탄을 대낮처럼 환하게 터트릴 것이고 곧이어 28발의 크레모아가 벌집처럼 터지고 중화기와 M16 총탄이 소낙비처럼 쏟아질 것이다.
화망이 구성되자 박동수 중대장은 개미허리에게 통신 점검을 지시했다. 개미허리가 통신 점검을 시작했다. 그는 무전기의 송신기에 입을 대고 ‘후우’ 하고 불었다. 그때마다 각 소대에서 ‘훅’ 하고 짧은 입김으로 회신이 왔다. 이곳은 적지이기 때문에 음성으로는 교신을 할 수가 없었다. 따라서 그들은 입김으로 교신을 하고 있었다. 개미허리가 점검 완료를 보고하자 박동수 중대장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아, 무전기 이상 없지? 외부 교신 끊고 무전기 재워.”
“알겠습니다.”
박동수 중대장은 흐뭇했다. 대대에서는 7중대가 킬러밸리에 은신하고 있는 적을 치려고 매복 중인 것을 꿈에도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중대의 최종 교신 좌표는 오후에 헬기로 보급품을 수령한 위치였다. 대대에서는 7중대가 그 좌표에서 오늘밤 매복하는 것으로 알고 있을 것이다.
7중대는 외부와 교신도 중단한 채 매복에 들어갔다. 한 가지 걱정은 오늘밤에 킬러밸리의 적들이 움직이지 않을까 염려스러웠다.
“좆같은 새끼들! 오늘밤 엿 먹어 봐라. 이 도꾸가 그렇게 쉽게 물러설 줄 알았어? 부하를 죽이고도 꽁지를 사타구니에 끼고 도망치는 그런 비겁한 인간 인 줄 알았어? 어림없다. 개새끼들아!”
쏴아.
갑자기 스콜이 쏟아지자 박동수 중대장은 깊은 상념에서 퍼뜩 깨어나 제 정신으로 돌아왔다.
“우와 씹팔! 무신 비가 와 이래 오노? 변 일병, 이거 어데 치우면 되겠노? 미치겠다.”
임태호 상병은 쏟아지는 소낙비를 맞으며 투덜거렸다. 옆에 있던 변을수 일병이 판초우의를 내밀자 임태호 상병은 화를 벌컥 냈다.
“치워라 임마, 디질려고 환장했나?”
영문을 모르는 변을수 일병은 멀쑥해서 우의를 자기가 뒤집어썼다.
“하! 이 자슥, 이기 등신이네. 임마, 고참이 판초우의 입지 마라카는데 니, 와 말 안 듣노?”
임태호 상병이 인상을 쓰며 노려보았으나 변을수 일병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씨레이션 비스킷을 꺼내 입 속에 넣고 우물거리며 판초 우의를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고참들은 쏟아지는 폭우 속에서도 우의를 결코 입지 않았다. 그들은 결정적인 순간에 우의가 얼마나 거추장스러운 물건인가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매복에 들어간 7중대는 깊은 정적 속에 잠겨 들었다. 쏟아지는 빗속에서 개골, 개골하고 청개구리가 울었다. 이따금 비에 젖은 짐승들의 우우 하는 신음소리와 풀벌레들의 울음소리도 들렸다.
병사들은 오늘 낮에 있었던 일들을 귀엣말로 속삭이며 씨레이션 깡통을 까서 저녁을 먹고 있었다. 그들은 세차게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되어 버렸다.
순식간에 손에 든 비스킷이 폭우에 녹아 흐물거렸다. 병사들은 손에 묻은 비스킷을 혓바닥으로 핥으며 허기진 뱃속을 달래야만 했다. 잠시 후 지금부터 움직이는 모든 물체는 사살하라는 명령이 하달되었다.
변을수 일병은 서둘러 왼쪽 손목에 인계 철선을 묶었다. 매복을 서는 병사들은 쌓인 피로로 자기도 모르게 깜빡 잠이 들었다.
따라서 그들은 매복 중에 가느다란 인계 철선으로 서로의 손목을 묶고 매복에 들어갔다. 깜깜한 야간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손목을 묶은 채 청각을 곤두세우고 매복을 섰다. 병사들은 매복 중에 깜박 잠이 들어도 유사시에는 전우들이 인계 철선을 당겨 잠을 깨워 주었다.
폭우처럼 세차게 쏟아지던 빗방울이 잠시 후 가랑비로 변했다. 변을수 일병은 우의 속에 턱을 묻고 고개를 움츠렸다. 하루 동안 흘린 끈 적한 땀과 비에 젖은 몸뚱이에서 풍겨 나오는 비릿하고 괴괴한 자신의 체취, 콧속으로 스며드는 달콤한 온기와 풋풋한 체온이 느껴졌다.
아, 지혜가 보고 싶다. 단 한번 만져본 지혜의 작고 하얀 젖가슴과 오디알 같은 까만 젖꼭지가 그리웠다. 지혜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작고 달콤한 입술과 미소 지을 때마다 하얗게 드러나 보이는 덧니. 그녀의 웃는 모습이 희미하게 떠올랐다.
“넌, 내 꺼야.”
우지혜가 다가오며 말했다. 그래, 난 지혜 거야. 지혜가 보고 싶다.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꺼이꺼이 소리 높여 실컷 울고 싶었다. 월남으로 떠나기 전에 변을수 일병은 오음리에서 면회 온 우지혜와 함께 마지막 외박을 나왔다. 두 사람은 말없이 한강 백사장에 앉아 강 건너 명수대를 바라보았다.
변을수의 손끝이 우지혜의 이마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치켜 올렸다. 그리고 손가락은 초생달 같은 눈썹으로, 코끝으로, 입술로 옮겨 다니며 그녀를 애무했다.
<다음호에 계속>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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