킬러 밸리 제 30회
킬러 밸리 제 30회
  •  기자
  • 입력 2008-10-01 11:09
  • 승인 2008.10.01 11:09
  • 호수 753
  • 56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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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녀는 못들은 척하고 하얗게 얼어붙은 들판 길을 사정없이 달리고 있었다.

“언니 펜팔 하는 사람 어때, 괜찮아?”

“얼굴도 모르는데.”

“말 안 해도 언니 마음 다 알아. 사랑을 해본 사람은 안다 말야.”

비포장 오솔길을 달리는 자전거는 몹시 덜커덩거렸다. 그리고 그때마다 그녀의 펑퍼짐한 엉덩이는 자꾸만 들썩거렸다.

강혜원은 자전거의 뒷자리에 앉은 채 어둠 속에 잠겨 있는 높은 산들을 쳐다보았다.

이제 막 둥근 달이 검은 능선 위로 천천히 솟아오르고 있었다. 달이 떠오르자 짙은 어둠 속에 잠겨있던 들판이 금방 환하게 밝아졌다. 달빛이 스며들지 않는 건너편 계곡은 괴괴하고 음산한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자전거가 달리자 둥근 달도 자전거를 따라오고 있었다.

추수가 끝난 텅 빈 들판, 하얗게 서리가 내린 논바닥, 빈 들판에 홀로 서 있는 전봇대, 그리고 앙상한 두릅 나뭇가지에 걸린 폐비닐 조각이 삭풍에 펄럭이고 있었다.

강혜원은 음산한 겨울 들판이 무서웠다. 그녀는 이미옥의 등허리를 두 손으로 껴안고 어깨에 고개를 파묻었다. 그녀의 따뜻한 체온이 엄마의 품처럼 젖가슴에 와 닿았다.

월남에서 김이수는 수많은 편지를 그녀에게 보내왔었다. 강혜원도 하루건너 김이수에게 편지를 보내고 있었다.

아직도 그녀는 김이수의 첫 편지를 잊지 못하고 있었다. 처음 시작할 땐 장난삼아 시작한 펜팔이 이젠 하루라도 답장이 오지 않으면 불안하고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요즘 그녀의 기분은 월남에서 보내오는 김이수의 편지에 좌우되고 있었다.

‘내 사연 날아날아 어디메에 자리하나.

산 넘고 바다 건너 멀고 먼 나라.’

처음에는 싱겁기만 하고 아무런 의미가 없던 말들이 날이 가고 달이 갈수록 점점 더 마음 속 깊이 자리하고 있었다. 혜원은 퇴근한 후 자취방에서 김이수가 보내온 편지를 읽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다.

김이수의 편지는 강혜원을 애타게 찾는 한 남자의 피맺힌 절규가 들어 있었다. 그의 편지 속에는 가슴 저 밑바닥에서부터 전해오는 짜릿한 슬픔과 애타는 그리움이 군데군데 묻어 있었다.

주님께서 그녀에게 김이수를 인도하신 것이다. 처음에는 단순히 펜팔로 보내온 편지가 그녀에게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오는 이유를 강혜원은 알고 싶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이유를 발견했다. 그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주님께서 그녀의 배우자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려 주신 것이다.

그때부터 강혜원은 하루에 한 번씩 김이수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녀의 하루 일과는 김이수가 보내온 편지에 답장을 쓰는 것으로 시작이 되었다. 이젠 같이 근무하는 이미옥이나 송 기사, 두 사람 모두 강혜원의 행동을 이해하고 감싸주었다. 강혜원이 월남으로 편지를 보낼 때마다 김이수는 반드시 답장을 보내왔다. 그리고 답장이 하루만 늦어지면 김이수는 몹시 화를 내는 편지를 보내왔다. 한 번도 만나 본 적이 없는 남자가 그녀에게 호통을 치고 있었다. 그녀 역시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 드리고 있었다.

강혜원은 출근할 때마다 책상 위에 놓인 김이수의 사진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김이수가 그녀에게 보내온 단 한 장의 흑백사진이었다.

사진 속에 그는, 철모를 푹 눌러쓰고 상의를 벗은 채 총을 들고 있었다. 호리호리한 몸매에 가느다란 허리는 김이수가 몹시 허약하고 나약한 사람처럼 보이게 했다. 그는 총을 장난감처럼 들고 있었다.

사진을 처음 보는 순간, 강혜원은 무척 놀랐다. 사진 속의 김이수는 그녀에게 전혀 낯선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강혜원의 다른 반쪽이었다.

오늘 아침, 출장을 나오기 바로 전에 강혜원은 김이수로부터 편지 한 통을 받았는데 평소와 달리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평소 김이수의 편지는 암호처럼 언제나 ‘내 사연 날아날아 어디메에 자리하나’로 시작되었다.

그런데 오늘 아침에 받은 편지는 여느 것과 달랐다. 담배 은박지의 뒷면에 볼펜으로 황급히 갈겨 쓴 짧은 글귀였다.

‘혜원, 당신이 있기에 나 또한 있다오. 어떤 일이 있더라도 반드시 돌아가겠소. 기다려 주오’.

그 짧은 문장이 하루 내내 그녀의 마음속을 휘젓고 다녔다. 어쩐지 불안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반드시 돌아가겠소. 기다려 주오.’

그에게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할 어떤 특별한 사정이라도 생겼단 말인가? 강혜원은 이미옥의 허리를 꼭 껴안은 채 시름에 겨워 산마루에 걸린 둥근 달을 쳐다보았다. 순간, 그녀는 알 수 없는 불안에 몸을 떨며 공포에 사로잡혔다.

이제 막 검은 산 그림자 위로 떠오르는 둥근 달의 테두리가 붉은 핏빛으로 물들여져 있었다. 요염하고 음산한 핏빛 달무리는 불길한 죽음의 그림자였다.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이 절대 절명의 위기에 처했을 때 암컷이 본능적으로 느끼는 초자연적인 현상이었다. 강혜원은 이미옥의 등 뒤에 고개를 파묻고 왈칵 울음을 터뜨렸다.


제16편 역매복

적의 매복 지점을 사전에 알고 은밀하게 숨어서 기다림

박동수 중대장과 선두 소대가 매복 지점에 도착하자 주변은 어느새 짙은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먹구름이 기차 화통의 검은 연기처럼 무럭무럭 피어오르며 순식간에 저녁 하늘을 캄캄하게 뒤덮어 버렸다.

“스콜이 올 모양이야, 빨리 서두르자.”

박동수 중대장은 장선호 중위를 재촉했다. 박동수 중대장은 기분이 좋았다. 매복 지점은 멀리서 볼 때보다는 이상적인 장소였다. 진지 주변은 듬성듬성 솟아있는 바위와 갈대로 뒤덮여 있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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