킬러 밸리 제 21회
킬러 밸리 제 21회
  •  기자
  • 입력 2008-07-31 13:56
  • 승인 2008.07.31 13:56
  • 호수 744
  • 56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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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등병에게는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위엄과 권위가 있었다. 그는 이 소동을 마음껏 즐기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여유와 느긋함이 있었다.

“용무는?”

신동협 병장이 딱딱한 목소리로 물었다.

“집 찾아온 것도 죄냐? 에헤헤…”

그는 박장대소를 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감자(수감자 출신)인가?’

신동협 병장은 기가 막혀 이등병을 노려보았다. 간혹 남한산성을 거쳐 온 수감자들 중에는 이런 장난을 치는 병사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 사람은 군대 생활을 하기에는 너무 늙고 나이도 많이 들어 보였다. 그는 마흔 살도 더 돼 보이는 것 같았다. 머리카락이 모두 빠진 문어 대가리에, 쪼글쪼글하게 주름진 얼굴, 그리고 꾸부정한 어깨와 허리가 매우 낯설게 보였다.

“야, 너 몽두리 아냐? 여긴 어떻게 왔어?”

갑자기 등 뒤에서 나타난 101 후송 병원 인사계 박 상사가 반색을 하며 늙은 이등병에게 다가갔다.

“어이 박 상사, 아직도 여기 있어?”

늙은 이등병은 껑충 뛰며 박 상사와 포옹을 했다. 그리고 몹시 반가워했다.

“야 임마, 몽두리! 너 아직도 제댈 못했어? 너도 참 한심한 인간이다, 얼마나 남았냐?”

“오 개월.”

“아이쿠! 이 자식아, 군대 생활을 이등병으로만 17년을 하는 놈은 내 평생에 처음이다. 우리 같은 말뚝이라면 또 모를까.”

“잘 봐 주라 임마, 나 여기서 제대하게. 정명호는 요즘 어디 있나?”

“니네 부대 인사계야. 정 상사가.”

“정명호가 인사계야? 아직 제댈 안 했어?”

“넌 인제 죽었다 임마, 이히히. 같이 입대한 동기생들 중에는 그 애와 나, 둘이 남았어. 이젠 너 꺼정 셋이지만… 오늘밤에 우리 집에서 같이 저녁 하자. 정말 반갑다, 이 친구야!”

이튿날 새벽 점호 시간에 중대장은 장무수 이병은 제대가 얼마 남지 않은 고참으로 정식으로 열외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노병이 무사히 제대할 수 있도록 모두들 도와주라고 말했다.

그가 구만리 부대에 전입을 온 후 가장 먼저 한 일은 매일 무엇인가 꼼꼼하게 수첩에 메모를 하는 일이었다. 처음 신동협 병장은 그가 무엇을 그렇게 열심히 쓰는지 알 수가 없었다. 신동협 병장은 그 일을 몹시 궁금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매일 남아 있는 제대 날짜를 셈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그건 아니었다.

그가 수첩에 꼼꼼하게 메모해 놓은 내용은 부대 인근 주민들의 환갑이나 결혼, 돌잔치, 이사, 집수리, 생일 등을 기록한 것이었다.

그는 매일 아침 점호를 마치면 인근 부락으로 외출을 나갔다. 그가 이른 아침부터 부대 밖을 나가서 하는 일은 주민들의 잔치 집을 찾아가서 돼지를 잡아주거나 자질구레한 잔심부름을 거들어 주는 일이었다.

그는 집수리를 하는 집을 찾아가서는 방구들을 고쳐 주거나 부엌을 수리해 주었다. 콩 타작을 하는 집에서는 타작을 거들어 주고, 환갑집에 가서는 그 집 친척들보다 더 열심히 일을 했다. 모르는 사람들은 그가 잔치 집과 아주 가까운 친척으로 오해를 했다.

특히 상갓집에서 그의 역할은 아주 뛰어난 것이었다. 그는 우선 상주를 만나 문상을 한 후, 바로 두건을 하나 얻어 썼다. 그리고는 문상객이 오면 열심히 곡을 하기도 하고 손님 접대를 했다. 그가 아주 슬픈 목소리로 “어이, 어이” 하고 통곡을 하면 다른 사람들은 덩달아 슬피 울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을 울리는 데도 아주 특별한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아마도, 그는 자기 일이라도 그렇게는 지극 정성으로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가 하는 일이 상갓집에 방해가 되거나 피해를 주었다면 사람들이 싫어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주인의 마음이 아주 흡족하도록 일을 해 주었다.

장례식이 끝나면 상주는 코가 땅에 닿도록 그에게 절을 하며 후하게 일당을 쳐서 사례를 했다. 그는 그 분야에서 아주 뛰어난 전문가였다.

때때로 주민들은 그의 솜씨가 필요해서 별도로 모셔 가기도 했다.

그때는 일당을 아주 두둑이 쳐서 받았다. 그는 유능한 목수이며 시멘트 일을 잘하는 미장공이며, 잘 훈련된 기능공이었다.

그는 부대 밖으로 나갔다가 귀대 시에는 맨손으로 돌아오는 법이 없었다. 잔치 집에 일을 거들기 위해 외출한 날은 잔치 음식을 얻어 왔다. 농사일을 하기 위해 외출하는 날은 감자, 고구마, 콩 등을 닥치는 대로 얻어왔다. 영내에는 굶주림에 지쳐있는 많은 병사들이 그가 가져오는 음식물로 허기를 달래고 있었다. 어느새 그가 하루 일과를 마치고 영내로 돌아오면 졸병들은 그의 손을 쳐다보는 버릇이 생겨났다. 그는 병사들의 구세주였다. 간혹 그는 위병소 앞에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그 날은 민간인의 제과 차가 P.X에 빵을 납품하는 날이었다. 빵 차는 아주 오래된 고물 차로 위병소 앞의 언덕길을 오르기가 힘이 들었다. 그는 민간인의 빵 차를 밀어주고 그 대가를 빵으로 받았다. 물론 비공식적으로 말이다. 트럭의 뒤를 밀어주는 척하며 빵을 훔치는 것이었다. 그리고 허기에 지친 졸병들에게 나누어 먹였다. 언제부터인가 그는 일등병 계급장을 달고 다녔다. 정확히 언제부터 그가 일등병 계급장을 달고 다녔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그는 이등병에서 더 이상 진급을 할 수가 없는 사고자였다. 그런데도 그는 일등병으로 진급해 있었다. 물론 마이가리(가짜)였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면 중대원 모두가 그를 한 계급 진급시킨 것이었다. 중대장까지도 그를 “장 일병 장 일병” 하고 불렀다. 어느 날엔가 인근 공병 중대 병사들이 집단으로 야간에 탈영을 시도한 적이 있었다. 그들은 달이 없는 그믐날 밤에 두 대의 덤프트럭을 훔쳐 타고 부대를 집단으로 빠져 나왔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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