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연(7)
하고자하는 말이나 편지의 내용
충남 대덕군 회덕면 보건소.
“언니, 월남에서 편지 왔어. 저번에 우리가 맹호 부대로 펜팔 보낸 거 있지? 그거 답장 같애.”
이미옥 간호원이 편지를 흔들며 강혜원에게 다가왔다.
“언니는 벌써 회답이 오는디 나는 왜 여태까지 안 온 디야. 같이 보냈는디… 언니 같이 보자, 으응?”
이미옥은 평소에 쓰지 않던 사투리로 애교를 부리며 편지를 강혜원의 눈앞에 흔들었다. 강혜원이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김이수? 맹호 부대에서 왔는데.”
강혜원은 편지를 받아 들고 책상 서랍 속에서 가위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편지 봉투를 잘랐다.
“언니 그 펜팔, 내가 하면 안 되우? 저녁 살께.”
이미옥은 강혜원의 손에서 편지를 뺏어 들고 큰소리로 읽기 시작했다.
“내 사연 날아날아 어디 메에 자리 하나. 산 넘고 바다 건너 멀고 먼 나라. 검은머리 다홍치마 마음 착한 아가씨 만나거든 내 사연 전하고 회답 받아 오라. 어머나! 정말 멋있다, 어쩜.”
강혜원은 말없이 그녀의 손에서 편지를 받아들고 읽기 시작했다.
강혜원!
왜, 이런 편지를 써야 하는지 나도 잘 모르겠군.
지난 월요일, 취사반 앞을 지나가는데 우연히 땅바닥에 떨어진 편지 한 통을 주었지요. 봉투 속에 알맹이는 없고 주소가 적힌 빈 봉투였습니다. 그것은 강혜원이라는 사람이 맹호 부대로 보낸 위문편지였습니다.
강혜원?
그녀는 어떤 아가씨일까? 편지의 내용에는 무엇이 쓰여 있었을까? 나는 이 편지를 보낸 아가씨의 얼굴을 마음속에 그리며 봉투를 반으로 접어 정글복 상의 호주머니 속에 넣어 두었습니다.
어쩌면 이 편지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아니면 오빠나 동생에게 보낸 편지일 수도 있겠지요.
나는 초소 근무를 서거나 야간에 매복을 나갈 때 혼자서 별빛에 편지 봉투를 보며 여러 가지 생각을 했습니다. 누구에게 보낸 편지였을까? 어쨌든 편지 봉투의 주소가 내 손에 들어온 것은 정말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나는 여태까지 편지를 보낸 일이 없습니다. 편지를 보낼 곳이 없었거든요. 솔직히 말해서 나는 편지를 쓰는 일이 다른 어떤 일보다도 더 싫어요. 나는 지난해에 잠시 귀국을 했다가 다시 월남으로 왔습니다. 이곳에서는 재파월자 라고 부르지요.
작년에 귀국했을 때 나는 그곳 군대 생활에 적응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양구에서 추운 겨울을 보내면서 밤마다 꿈속에서 월남 생활을 그리워했지요.
따뜻한 날씨와 어두운 밤하늘에 떠오르는 남십자성의 영롱한 별빛, 자장가처럼 들리는 포성과 요란한 총성. 그리고 이따금 길게 꼬리를 그리며 떨어지는 붉은 조명.
조용한 밤이 왜, 그렇게 무섭고 두려웠던지? 정말 그런 생활이 싫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다시 월남으로 돌아 왔습니다. 난, 이곳이 좋아요. 총소리와 포성이 자장가처럼 울리면 편하게 잠을 이룰 수가 있습니다.
이런, 제기랄!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야?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갈보에게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지.
이 편지를 보면 계집애들이 나를 비웃을 거야. 놈팡이들과 함께 이 편지를 돌려보며 큰소리로 웃겠지? 잘 먹고 잘 살아라, 갈보야!
우린 곧, 킬러밸리로 간다. 그 쪽으로 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르는데 무슨 말인들 못하겠어? 잘해봐라, 망할 년아!
나는 죽지 않는다. 난, 불사신이야. 총알도 나를 피해간다 구. 그런데 내가 죽을 것 같아? 천만에 말씀이다.
보내지도 않을 편지, 그만 쓰자. 미친놈의 독백이지. 내가 왜 이따위 마음 약한 짓을 하지? 아서라 그만두자,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는 여자에게 이 무슨 못난 짓인가?
강혜원, 너를 사랑한다. 나는 지금까지 어느 누구에게도 이런 말을 해 본 적이 없었거든. 그래서 너에게 한번 해보는 거야. 사실 난, 다른 전우들이 여자 애들을 죽도록 사랑한다며 편지를 쓰는 게 부러웠어.
그래서 너에게 한 번 해보는 거야. 네가 누구인지 나에겐 중요하지 않아. 사랑한다고 말하는 건 내 자유야. 언제 갈지도 모르는데 이유 같은 건 없어. 그
냥 해보는 소리야.
그럼 안녕, 갈보야! 우린 내일 떠난다.
김이수가 강혜원에게
“언니, 이 사람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냐? 무슨 편지가 이래, 펜팔도 아니고 욕도 아니고.”
이미옥 간호원이 손가락으로 머리 위를 빙빙 돌리며 말했다. 강혜원은 편지를 소중하게 접어 책상 서랍 속에 넣었다. 그리고 이미옥이 나가자, 다시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편지를 모두 읽은 그녀는, 창문가에서 보건소 마당에 서 있는 느티나무를 바라보고 있었다. 바람이 쌩 하고 불자 느티나무 잎사귀가 소리 없이 떨어지고 있었다. 송 기사가 오토바이를 타고 부르릉거리며 보건소 앞마당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녀는 얼굴을 들어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만 같은 늦가을 하늘을 쳐다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근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월남에서 보내온 편지는 장난으로 한 서신이 아니었다. 한 번도 만나 본 적이 없는 어떤 청년이 그녀를 애타게 부르고 있었다. 청년은 극도의 절망과 불안 속에서 얼굴도 모르는 그녀에게 구원을 청하고 있었다. 도대체 그는 어떤 청년일까?
강혜원은 16절 갱지 위에 조용히 답장을 쓰기 시작했다. 이따금 얼굴을 찡그리며 한숨을 내쉬기도 했다.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은 수심이 가득 차 있었다. 그녀는 보기 드문 미인이었다.
<다음호에 계속>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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