킬러 밸리 제 9회
킬러 밸리 제 9회
  •  기자
  • 입력 2008-05-08 16:14
  • 승인 2008.05.08 16:14
  • 호수 732
  • 56면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쌔앵, 쌔앵.”

원형 톱이 거대한 소나무 원목을 절단할 때는 동력의 힘이 모자라 쌔에앵 하고 소리를 내지만, 원목이 완전히 절단되면 쌩 하는 굉음을 내며 끊어졌다.

“저 새끼, 또 지랄하는군.”

정재만 병장이 중얼거리는 소리에 신동협 병장은 잠에서 깨어났다.

“무슨 소리야, 저게?”

“전에 봤잖아, 개미허리가 목검 돌리는 소리야.”

“목검 돌리는 소리라고?”

“응, 손목에 고리를 단 목검이 회전하며 내는 소리야.”

“왜 저러는 거야? 야밤에 기분 나쁘게…”

“겁주는 거야.”

“겁을 줘, 누구에게?”

“공팔과 손무삼 하사에게 경고를 하는 거야. 조심해 임마, 뉘들은 죽은 목숨이야. 뭐 그런 거겠지. 저 목검이 회전하는 소리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냐. 무술 고단자들만이 가지고 있는 깊은 공력에서 나오는 소리야. 야밤중에 날카로운 쇳소리로 상대방을 위협하는 거야. 내가 마음만 먹으면 네놈들은 귀신도 모르게 처치할 거야, 하고.”

“왜, 개미허리가 그들을 협박하는 거야. 뭐 땜에?”

“자세히는 모르지만 개미허리 김 하사는 일진으로 이곳에 왔다가 귀국했는데 다시 재 파월 차출을 당했다더군. 그가 이곳으로 다시 왔을 때 포대에
는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어. 인천 부두 깡패 손무삼, 해녀기둥서방 방이용, H공대 기계과 2학년에 재학 중 입대한 공팔, 고래잡이 원양어선의 포수 맹도기, 헤비급 복싱 선수 양대철 등이 독불장군인 개미허리 김 하사를 경계하기 시작했지”

신동협 병장은 그의 말에 끌려 들어가지 시작했다. 입대 전에 건달 생활을 하던 그들이 전쟁이라는 특수상황에서 어떤 짓을 하고 있는지 묘한 호기심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정재만 병장은 먼저 공팔에 대해 이야기를 풀기 시작했다.

공팔 구상원은 충북 태생이라고 했다. 그는 혈혈단신의 전쟁고아라고 했다. 두뇌가 비상하고 똑똑한 구상원은 고아원에서 초등학교를 마치고 중학교에 진학을 하자, 토마스라는 미군 군속의 집에 하우스 보이로 들어갔다고 했다. 토마스는 영리한 구상원을 친자식처럼 키워 고등학교를 마치고 대학까지 진학을 시켰다고 한다. 대학 재학 중 토마스가 미국으로 귀국하자, 구상원은 월남으로 왔다고 했다. 부대 내에 알려진 그의 사생활은 그게 전부였다.

그는 이틀에 한 번씩 고국의 어떤 여자에게 편지를 보내고 있었는데, 답장도 그 간격으로 도착하고 있었다. 그에게는 그게 삶의 전부인 것 같았다.

평소 전우들은 자기가 사귀는 여자에 대한 자랑도 하고 고국에서 보내 온 애인의 편지를 보여 주기도 했다. 그러나 구상원은 한 번도 그의 편지를 보여주는 법이 없었다. 그는 비밀이 아주 많은 괴팍한 친구였다.

자칭 제임스 본드보다도 한 수 위라는 공팔은, 돈이 생기는 일이라면 어떤 위험도 마다하지 않았다.

공팔은 부대 안에서 할 일 없이 빈둥거리다가 닷지차를 몰고 해녀기둥서방과 함께 시도 때도 없이 슬며시 사라졌다. 공팔이 가는 곳은 미군들의 전투 지역이었다. 격전지는 그에게 돈벌이가 되는 곳이었다. 우리가 부르는 그의 주특기는 육군 본부에도 없는 ‘008’이었다.

언젠가 한번, 공팔은 정재만 병장에게 마빡을 치러 가자고 꼬셨다. 정재만 병장이 거절하자 공팔은 앙케로 가서 붐붐을 하자고 유혹을 했다. 정재만 병장이 솔깃해서 따라 나섰다.

닷지차 운전은 해녀기둥서방이 하고, 선임 탑승에는 공팔, 무전병으로 정재만 병장, 그렇게 셋이 갔다.

닷지차는 19번 도로에 올라서자 시속 160km의 속력으로 무섭게 질주했다. 정재만 병장은 바람에 날리는 철모의 끈을 바짝 조여 매었다. 닷지차는 1대대 구역을 통과하여 앙케패스로 접어들었다. 까마득히 올려다 보이는 절벽 틈새로 아군 매복조의 새까만 얼굴이 보였다.

닷지차는 전속력으로 앙케패스를 지나 앙케 시가지로 들어갔다. 도로에 매복해 있던 흑인 병사들이 손짓으로 인사를 건네 왔다.

해녀기둥서방의 운전 솜씨가 점점 더 거칠어졌다. 앙케 시가지를 빠져 나와 산악지대로 접어들었다. 1차선 도로 양 옆 언덕 위에는 수많은 미군 전차들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전차는 포신을 도로에 겨냥한 채 살기등등한 모습으로 통과 차량들을 주시하고 있었다.

1차선 도로의 좁은 계곡을 통과하자 고슴도치처럼 삼중 철조망을 두른 목조 가교가 나타났다. 삼엄한 미군들의 검문소였다. 공팔이 따이한 작전 차량이라고 하자 미군이 통과 시켜 주었다. 한참을 가자 다시 2차 검문소가 나타났다.

검문소는 계곡을 가로지르는 목조 가교를 통제하고 있었다. 삼중 철조망의 바리케이드를 열고 한 손에 M16 소총을 든 흑인 병장 이 닷지차를 정지시켰다.

“이런 촌놈의 새끼들! 맹호도 몰라봐? 너 임마, 세수도 안 했잖아? 그러니 맨날 당하지. 세수 좀 해라. 세수해서 남 주니.”

해녀기둥서방이 흑인 병사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그러나 흑인 병사는 무슨 말인지 몰라 멍하니 쳐다보기만 했다. 그들은 몹시 지쳐 있었다. 정글복은 진흙투성이며 몹시 남루했다. 그들을 눈동자와 하얀 이빨만 살아 있었다.

“전방 2km 지점에서 교전 중이다. 아군은 퇴각 중이다. 돌아가라.”

흑인 병장이 손을 내저으며 통행을 저지했다. 그는 입 속 가득히 하얀 거품을 물고 있었다.

“위 마스트 고(우리는 가야 한다). 우린 작전 차량이야.”

공팔이 흑인 병장을 달래느라 진땀을 빼고 있었다.

“깜상! 니 까불래.”

해녀기둥서방이 눈알을 하얗게 부라리며 흑인 병사를 노려보았다.

“오케이, 우린 책임 못 진다. 패스(통과)!”

흑인 병사가 손을 흔들자 다리를 가로막고 있던 두 대의 탱크가 길을 열었다.

꽝꽝.

 기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