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동협 병장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사물함 문안에 스카치테이프로 붙인 여고생의 흑백사진이었다.
사진 속에 그녀는 이 소동을 모르는지, 머리에 가르마를 곱게 타고 덧니를 들러내며 활짝 웃고 있었다.
말라깽이 하사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전사자의 사물들을 씨레이션 상자 속에 차곡차곡 쑤셔 넣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청 테이프로 정성들여 봉하고는 상자를 들고 막사 밖으로 나갔다. 그 뒤를 이어 공팔도 어디론가 사라졌다.
“개미허리 저 새끼, 저만 뒤로 빠지고는… 비겁한 자식!”
팔베개를 하고 누워있던 병장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저 친구가 개미허리야?”
신동협 병장이 깜짝 놀라 정재만 병장에게 물었다.
“아는 사람이야?”
정재만 병장이 물었다.
“몰라, 신병이 어떻게 알겠어?”
“개미허리와 공팔은 조심해야 돼.”
“공팔은 또 누구야?”
“007, 008도 몰라? 그 공팔이야. 조금 전에 그 자식 말이야. 너도 곧 알게 되겠지만, 녀석들은 미쳤어.”
정재만 병장은 비꼬는 투로 내뱉었다. 신동협 병장은 왜 구상원 병장의 별명이 007을 닮았는지 궁금했다.
공팔은 늘 아침만 먹고 수송부의 해녀기둥서방과 함께 포대 밖으로 외출을 나갔다. 신동협 병장은 그가 어떤 임무를 띠고 부대 밖으로 나가는지 알 수 없었다. 그의 소속은 통신반으로 되어 있었지만 전혀 반장의 지휘를 받지 않았다.
녀석들은 닷지차를 타고 마음 내키는 대로 부대 밖으로 나다녔다. 공팔은 포대장 반복어의 지시만 받는 것 같았다. 부대 내에서 포대장 이외에 어느 누구도 그의 업무에 대해 간섭을 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독특한 그의 업무에 대해 조금씩 해답을 얻을 수 있었다.
포대에는 여섯 문의 105mm 대포와 수천 발의 포탄과 장약을 비축하고 있었다. 포탄과 장약은 무서운 폭발성과 인화성을 가지고 있어 언제나 위험했다.
포탄은 지상의 야적장에 나무로 만든 상자 속에 담긴 채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그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었다. 만일에 적의 박격포 기습으로 단 한 발의 포탄만 맞아도 포대는 산산조각이 나버릴 것이다.
반복어 포대장은 포탄 보관을 위해 지하 저장고를 만들고 싶어 했다. 포대는 오침 시간만 빼고는 한 사람도 열외 없이 지하 벙커 공사에 투입되었다. 일주일 동안 쉬지 않고 사질토로 된 모래땅을 두더지처럼 파고 흙주머니를 쌓아 지하 벙커의 외벽을 만들었다.
일주일 동안 전 포대원들은 폭염 속에서 노예처럼 밤낮으로 벙커 축조 작업에 달라붙었다.
그러나 단, 두 사람의 열외가 있었다. 그는 공팔 구상원 병장과 해녀기둥서방 방이용 병장이었다. 그들은 매일 아침만 먹고는 포대원이 개처럼 더위 속에 혓바닥을 빼물고 일할 때 슬며시 사라졌다.
그리고 해가 지고 어두워지면 어슬렁거리며 돌아왔다.
포수들이 두 사람을 비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포대장의 처사에 불평을 터트렸다.
그러나 반복어 포대장은 한마디 변명도 없이 작업을 독려하기만 했다. 벙커의 외벽이 완성되자 반복어는 작업 중지를 명령했다. 곧 닥쳐올 우기에 대비한 벙커의 지붕을 덮을 재료가 포대에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전 포대원들이 녹초가 되어 점심도 거른 채 오침에 들어갔다. 그런데 30분도 지나지 않아 다시 작업 명령이 떨어졌다.
아직도 잠이 덜 깬 포수들은 불평을 하며 벙커로 모여들었다. 벙커에는 어디서 구해왔는지 고무로 만든 루핑을 가득 실은 차가 서 있었다. 공팔과 해녀기둥서방이 땀을 뻘뻘 흘리면서 차에서 루핑을 하역하고 있었다.
벙커는 두 사람 덕분에 고무 루핑으로 지붕을 덮은 완벽한 포탄 저장고가 되었다. 포수들은 공팔 구상원 덕분에 우기에 고생을 덜게 되었다며 좋아했다. 아무도 공팔이 그것을 어디에서 가져왔는지 문제 삼지 않았다. 신동협 병장은 공팔이란 별명이 그의 범상치 않은 행동과 연관이 있다는 것만 눈치 챘을 뿐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었다.
신동협 병장은 그를 좋아할 수가 없었다. 그는 계급이 상병이면서 마이가리(가짜) 병장의 계급장을 달고 다녔다. 신동협 병장은 언젠가 기회가 오면 녀석의 건방진 버릇을 단단히 고쳐 주리라 마음먹었다.
병사(兵士)
전시에 가장 먼저 죽는 소모품
“준비이, 쏴아!”
“꽝, 꽈꽝.”
부관 신록 중위의 우렁찬 구령 소리가 벙커 안까지 들려 왔다. 여섯 문의 105mm 포가 일시에 사격을 하는 굉음은 지축을 흔들었다.
그리자 벙커의 천장에서 모래흙이 우수수 쏟아져 내렸다.
대지를 달달 볶던 열대의 태양이 뉘엿뉘엿 지기 시작하자 포대는 진지 주변에 위협사격을 시작했다. 이것은 포대를 기습하려는 V. C의 매복 지점을 사전에 포격으로 강타하는 것이었다. 포대를 노리는 적들에게 우세한 화력으로 위협사격을 하여 겁을 주는 일이었다.
건기에 접어들자 포대는 시도 때도 없이 사격 명령이 떨어졌다. 식사시간에도 사격 명령이 떨어졌고 포 다리를 베고 잠을 자다가도 명령이 떨어졌다. 포수들은 틈만 나면 잠을 잤다.
그러던 어느 날 밤이었다.
쌔앵, 쌔앵.
그날도 위협사격으로 녹초가 되어 잠이 든 신동협 병장의 귀에 낯익은 톱니바퀴의 쇳소리가 아련히 들려 왔다. 초등학교 4학년 겨울방학 때까지 살았던 동부동 신흥목재소에서 들려왔던 그 소리였다.
목재소에서는 밤이 늦도록 소나무 원목을 제지했다. 원반형의 날카로운 이빨을 가진 톱날은 밤이 새도록 소나무를 자르고 갈기갈기 찢어 놓았다.
<다음호에 계속>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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