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렁찬 장병들의 함성이 마른하늘을 가득 채우며 울려 퍼졌다. 새벽잠에 취해 있던 작은 새들이 화들짝 놀라 떼를 지어 하늘로 날아올라갔다.
깊은 정적 속에 잠겨 있던 빈케의 들판이 장병들의 함성으로 미친 듯이 광란하기 시작했다. 연대장이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는 이제 떠날 시간이다. 명심해라, 적을 잡는 일보다는 고국에 돌아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 한 사람도 귀국선에 낙오하는 사람이 없도록 하라.”
이 순간부터 너를 낳아준 부모님도 위험에서 너를 지켜 줄 수가 없다. 위기에서 너를 구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전우뿐이다, 전우를 내 몸처럼 아끼고 보호하라. 부모님도 잊어라, 애인도 잊어라.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을 망각하라.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하나뿐인 나를 지키는 것이다.
연대장의 훈시가 끝나기 무섭게 여명의 붉은 노을 속에 수많은 헬기들이 새카맣게 날아오고 있었다. 대형 치누크, H21 헬기, 코브라, 수송용, 지휘용, 전투용 헬기들이 여름 강가의 고추잠자리들처럼 서로 고도를 달리하며 다가오고 있었다. 하늘을 새카맣게 뒤덮은 헬기들은 착륙 순서
를 기다리면 연병장 상공을 수없이 선회하고 있었다.
착륙한 헬기들은 한치 앞도 보이지 않게 흙먼지를 날리며 연병장을 난장판으로 만들어 놓았다.
“3중대 3중대! 8번 헬기는 연병장 동편, 6중대 6중대, 니들은 뭐하나? 빨리 승선하라! 21번 헬기는 대기하라.”
지휘소 고성능 마이크가 악을 쓰기 시작했다.
“2중대 오뚝이는 5번 코너로, 2중대 오뚝이는 5번 코너.”
2중대 병사들이 와아! 하는 함성 소리와 함께 철모와 전투배낭을 달가닥거리며 헬기 쪽으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안개처럼 자욱한 흙먼지 속에서 장병들의 함성과 고성능 마이크의 빗발치는 명령, 헬기의 둔탁한 프로펠러 소음, M16 소총과 철모가 부딪치는 소리, 그리고 쉴 새 없이 흘러내리는 끈적끈적한 땀으로 연병장은 혼란스럽기 그지없었다.
변을수 일병은 현기증으로 눈앞이 어질어질한 게 쓰러질 것만 같았다. 마치 러시아워 시간에 복잡한 차도 한복판에 서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앞뒤, 좌우로 공기를 찢어 놓는 헬기들의 프로펠러 소리로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야, 서편 연병장에 혼자 서있는 사병! 너, 거기서 뭐하냐? 가족을 잃었어? 병신자식! 몇 중대냐, 7중대 3소대? 7중대 3소대! 어디 있나? 총을 들고 ‘야’ 하고 소리쳐라. 일병, 너의 소대는 남쪽 3번 구역, 2번 코너에 있다.”
서편 연병장 한 구석에서 넋을 잃고 헤매던 변을수 일병에게 지휘소 마이크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지만 그는 어디로 가야할 지 몰라서 당황하고 있었다.
한 무리의 H21 헬기의 편대가 요란한 폭음과 함께 북쪽 하늘로 날아 올라갔다.
또 다른 헬기의 편대는 떠오르는 태양을 정면으로 받으며 동쪽 하늘로 날아갔다.
“변일병 변일벼엉, 아 이 자슥아, 그 쪽이 아이라카이 그러네. 빨리 이쪽으로 오이라. 정신 채리라, 이런 촌놈의 자슥!”
임태호 상병이 방금 풀썩하고 내려앉은 헬기 쪽으로 뛰어가며 변을수 일병을 소리쳐 불렀다. 그때서야 변을수 일병은 정신을 차리고 3번 구역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박동수 대위가 집합한 소대원 앞에서 소리를 질렀다.
“3소대 1분대!”
“예!”
“대답 소리가 작다, 그 소리에 V. C들이 놀라겠나?”
중대장 박동수 대위가 사병들의 사기를 높이려 애를 쓰며 다시 한 번 목청을 돋우었다.
“3소대 1분대.”
“예엣!”
병사들이 악을 쓰며 대답했다.
“좋다, 승선!”
와아 하는 함성을 내지르며 3소대 1분대가 헬기 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프로펠러의 회전속도가 빨라지며 헬기가 공중으로 치솟아 올랐다.
34번 헬기의 프로펠러가 위잉 하고 고속으로 회전을 하며 공중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헬기는 곧장 기수를 동쪽으로 돌리고 떠오르는 아침 햇살을 정면으로 받으며 날아가기 시작했다.
변을수 일병은 헬기의 열린 문을 통해 밖을 내려다보았다. 아찔한 현기증과 함께 순식간에 연병장이 멀어져 갔다. 아직도 연병장에는 헬기들이 복작거리고 있었다.
“변 일병, 니 저리 좀 비키 봐라.”
임태호 상병이 방탄조끼를 홀랑 벗어 헬기 바닥에 깔고 앉았다.
“조끼 입어요.”
헬기의 소음 때문에 변을수 일병이 임태호 상병에게 악을 쓰듯 말했다.
“짜샤, 남자는 불알이 질 중요한 기라. 전번 작전 때는 헬기 바닥으로 총알이 올라왔다 아이가.”
“어유, 저 새끼! 또 구라치네.”
남호구 병장이 전투배낭 뒤에 달고 다니던 방탄조끼를 입으며 말했다.
“그라 몬, 내 말이 틀린다 말인 교? 저 노마한테 물어 보까, 남자는 불알이 질 중요하제 그자? 철수야!”
임태호 상병이 헬기의 우측 창 밖에 달랑 매달려 있는 발칸포 사수인 흑인 스미스 일병에게 말을 걸었다. 스미스 일병은 무슨 말인지 몰라 웃
으며 무조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봐라, 내 말이 맞지. 저 노마도 맞다 안 카나.”
임태호 상병이 의기양양하게 남호구 병장을 바라보았다.
“철수가 아니고 스미스다, 스미스! 뭘 제대로 알고 거짓말을 해야지.”
남호구 병장이 흑인 병사의 명찰을 보고 말하자, 흑인 병사는 두 팔을 벌리고 어깨를 으쓱거리며 씩 웃었다.
“개미허리 김 하사님도 그때 봤다. 김 하사님, 내 말 맞지 예?”
임태호 상병이 개미허리에게 동의를 구했다.
“임태호, 너 요즘 군기가 빠졌어. 번개 씹 하는 거 볼래?”
“와캄니꺼 성님, 잘몬 했심더. 애인 하나 구해 줄 끼요? 참한 가스나 하나 있심더.”
개미허리가 임태호 상병의 뒤통수를 쥐어박았다.
“니 말을 믿는 것보다는 차라리 베트콩의 말을 믿겠다. 에라, 이 자식아!”
개미허리는 순간 강혜원이란 이름을 떠올렸다.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여자였다. 그런데 왜 애인이라는 말에 강혜원을 떠올렸는지 모를 일이었다. 갑자기 헬기의 동체가 심하게 요동을 치며 흔들거렸다.
“운전수 니 임마! 난폭 운전 할 끼가? 내릴 때 차비는 몬 준다, 알 것 제?”
임태호 상병이 헬기 조종사를 보고 능청을 부렸다. 병사들은 갑자기 기분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마치 초등학교 운동회 날처럼 흥겹고 즐거웠다. 답답하고 숨이 막히던 가슴과 목구멍이 확 뚫리는 것만 같았다. 고함을 지르고 싶었다. 막 소리치며 울고 싶었다.
지난밤에는 어느 누구도 제대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사단 작전이 곧 있을 거라는 소문이 돌고부터는 제대로 밥을 먹을 수가 없었다.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어쩌다 잠이 들어도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악몽에 시달렸다. 언제나 죽고 죽이며 쫓기는 꿈에 시달렸다.
낯선 이국에서 죽음, 부상, 불행, 그 모든 것들이 자신의 일이었다. 사소한 사건들, 조그마한 일에도 신경이 곤두서고 운명과 연결을 지어 생각을 했다.
벙어리처럼 말 한마디 없이 침울한 전우, 무엇인가 혼자서 중얼거리며 편지를 쓰는 병사, 사소한 일에도 시비를 거는 전우, 유쾌한 척 수다를 떨면서 괜히 기분이 좋은 척하는 전우.
모두가 평소에 그답지 않게 조금씩 변하고 이상한 행동을 했다.
처녀들의 팬티를 속옷에 껴입으면 총알을 맞지 않는다고 했다. 병사들은 외출 시에 여자들을 찾았다. 그리고 아가씨들의 팬티를 얻어 오기도 하고 훔쳐 오기도 했다. 그리고 속옷에 껴입었다.
병사들은 그것을 서로 사고팔기도 했다. 하나뿐인 목숨을 구하는 일에 무슨 짓인들 못하겠는가?
D-day를 기다리는 동안 가족들을 생각하고 애인을 그리워하며 동물처럼 행동을 했다. 병사들은 내일을 점치려 무척 애를 썼다. 두려움과 공포는 산불처럼 걷잡을 수 없이 마음속으로 번져 나갔다. 불을 진압하려 애를 쓰면 더욱 더 불길이 솟아올랐다. 그리고 종내는 자포자기 상태에
빠져들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적들이 병사들을 죽이는 것이다.
그러나 이젠 문제가 없었다. 내일을 두려워하며 눈에 보이지 않는 적과의 싸움도 끝이 났다. 지금은 눈에 보이는 적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적은 가장 무섭고 두려운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들은 정체가 없었다. 모습과 형체가 보이지 않는 마음속의 적이었다.
지금부터 눈에 보이는 적은 사람이었다. 적이여 올 테면 와라, 우린 죽어도 좋고 살아도 좋다. 이미 우리는 이렇게 하늘에 떠있지 않는가?
변을수 일병은 낙천적인 임태호 상병이 좋았다. 그는 허세가 심하지만 두려워하거나 무서워한 적은 없었다. 마치 봄 소풍을 떠나가는 초등학생처럼 언제나 마음이 들떠 흥청거렸다.
변을수 일병은 임태호 상병과 함께라면 죽음도 겁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34번 헬기는 이제 막 떠오르는 아침 해를 마주보며 동쪽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다음호에 계속>
김범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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