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범선 장편소설

이 소설을 한 노병의 연인에게 헌정합니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특정한 국가, 부대, 인물들은 사실과 전혀 관련이 없는 가공의 소재들이며 작가의 작품 창작 활동에 의해 집필된 픽션 소설임을 밝혀 둡니다.
노병에게 告함
노병들이여
벌써 잊었는가.
아직도 오천 명의
우리 전우들이 남십자성이
영롱한 열대의 밤하늘에
푸른 중대기를 앞세우고
씩씩하게 군가를 부르며
군화 소리도 요란하게
행진을 하고 있다.
우리는 귀국선을 탔고
그들은 낯선 이국의 밤하늘을
아직도 떠돌며 행군을 계속하고 있다
노병들이여
창문을 열고 남쪽 밤하늘을 바라보라
하얀 잔별 은하수 저 멀리
목이 터져라 진짜사나이를 부르며
밤새 행진을 하며
먼 바다를 건너오고 있는
옛 전우들이 보이지 않는가.
노병들이여!
언제 그들도 우리처럼
귀국선을 타게 할 것인가
계절이 변해 자연은 가고
사람은 떠나고 마음은 변해도
오직
불변의 정신으로 그들은 귀국의 그 날을 기다리고 있다.
(킬러밸리-노병에게 고함- 중에서)
-지난 일을 돌이켜 생각함-
예천비행장 인근 유천중학교,
늦가을 을씨년스러운 바람이 불 때마다 교정에 서있는 느티나무 낙엽이 우수수 떨어지고 있었다. 땅 바닥에 떨어진 낙엽은 운동장 구석을 이리저리 굴러다니며 무더기를 이루고 있었다. 낙엽은 바람에 따라 스산한 소리를 내며 누런 흙먼지와 함께 하늘 높이 치솟아 올랐다간 운동장 저편 바닥에 떨어지면 저 만치 굴러갔다.
한때 9학급이나 되었던 아담한 학교가 이젠 3학급으로 학생이 줄어들어 휑하니 넓기만 한 운동장에는 말라비틀어진 잡초가 휴경지의 묵밭처럼 우거져 있었다.
파란 도색이 군데군데 벗어진 본관 건물은 이제 막 넘어가는 늦가을 햇살을 받아 유리 창문들이 거울처럼 반짝거리고 있었다.
하교시간이 지나 학생들이 모두 집으로 돌아간 텅 빈 교정은 적막하다 못해 깊이 잠든 바다와 같았다.
갑자기 깊은 정적을 깨고 “딩동 딩동 딩딩 동동…….”
하고 차임벨이 울기 시작했다. 일과시간이 입력 된 차임벨은 학생들의 등하교와 상관없이 혼자 시종을 울리며 열심히 일하고 있었다.
이제 막 서산에 지는 저녁노을이 주홍빛으로 물들며 무대 위에 조명처럼 본관 건물을 비추고 있었다. 수많은 유리 창문들이 주홍빛 거울
처럼 반짝거리며 노을을 반사하고 있었다.
해가 서산에 기울며 한 조각 먹구름이 햇살을 가리자 순식간에 거울처럼 반짝거리던 창문들이 잠들어 버렸다
본관 교사가 어둠 속에 잠기자 텅 빈 교정은 한층 더 깊은 적막 속에 잠겨들었다.
갑자기 짙은 먹구름이 사이로 한줄기 황금빛 햇살이 무대 위 조명처럼 본관 교사 제일 끝 교실을 비추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누군가 강렬한 황금빛 조명을 무대 위로 비추는 것 같았다. 자연이 순간적으로 만들어 놓은 조화였다.
어디서 왔는지 하얀 배추나비 한 마리가 힘겹게 날게 짓을 하며 본관 건물로 날아가고 있었다. 철이 지난 나비의 힘에 겨운 날개 짓은 애처롭다 못해 위태롭기 그지없었다.
나비는 바람이 불 때마다 이리저리 밀리며 본관 건물 쪽으로 겨우 날아가고 있었다.
누더기가 다된 날개로 힘겹게 날아가던 나비는, 이제 막 한줌 햇살이 비추는 맨 끝 교실의 유리 창문에 겨우 달라 불었다. 날개 끝이 찢어져 너덜너덜한 나비는 마치 먼지가 잔뜩 낀 유리창 속을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
녀석이 유리창 속을 들여다보자 손바닥만 한 햇빛이 들어오는 교실 안에는 초로의 한 남자가 담임 책상에 앉아 무엇인가 끌쩍거리고 있었다. 그는 아마 학급일지라도 정리하는 것 같았다. 그는 이따금 무엇인가 잘 안 되는지 오른손에 든 볼펜 끝으로 앞 이마를 톡톡 치다가
는 다시 쓰곤 했다.
그리고는 싫증이라도 났는지 볼펜을 내려놓고 책상 위에 놓인 꽃병을 들여다 보았다.
화병 속에는 하얀색 국화꽃 두 송이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마주보고 있었다. 한동안 오른쪽 손바닥으로 턱을 괴고 무엇인가 깊이 생각하던 그가, 왼쪽 손등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주먹을 쥔 손을 눈앞에 들고 들여다 보기 시작했다. 벌어진 새끼손가락과 구부러진 중지 손가락이 그의 코앞에서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그는 왼쪽 손이 불편한 것 같았다.
그는 주먹을 쥐고 있던 왼 손을 천천히 펴기 시작했다. 그의 손바닥 안에는 작은 수첩이 들어 있었다. 그는 그 수첩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낡아서 비닐 조각이 너덜거리는 녹색 수첩표지에는 하얀 글씨로 ‘해외파견장병수첩’이라고 쓰여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별이 그려진 닷 모양의 마크와 대한민국 국군이라는 글씨가 보였다.
그가 불편한 엄지와 중지 손가락으로 비닐 표지를 넘기자 수첩 갈피를 끼운 투명 비닐과 하얀 내표지가 나타났다. 내표지에는 검정 글씨로 ‘한월친선’ 이라는 글씨와 함께 교차된 양국 국기, 그리고 악수하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한동안 수첩을 들여다보고 있던 그는 투명 비닐의 앞표지 속에서 작은 사진 한 장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는 콧등에 내려앉은 돋보기안경을 오른 쪽 중지 손가락으로 밀어 올리고는 들여다 보았다.
그는 엄지와 중지 손가락으로 들고 있는 흑백의 낡은 사진이 잘 보이지 않는지 팔을 뻗어 한 줄기 햇빛이 들어오는 창가로 의자를 돌려 앉았다. 그리고 사진을 들여다 보았다.
그 사진 속에는 두 사람의 병사가 포연이 자욱한 야전진지의 샌들 백 위에 서있었다. 오른손에 M16 소총을 들고 만세라도 부르듯 두 팔
을 활짝 뻗고 하늘을 처다 보고 웃고 있는 병사는 날씬한 몸매에 허리가 가늘고 삼각 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는 마치 하늘을 향해 박장대소를 하며 조롱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그 병사의 옆에는 왼손에 총을 쥐고 하얀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고 있었다. 그는 중키에 둥근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는 두 팔을 처 들고 있는 병사를 옆에서 보며 웃고 있었다. 그들의 머리위로는 새카맣게 많은 H21 헬기의 편대가 지나가고 있었다. 사진 속의 그 청년은 이
젠 초로의 늙은이가 된 그와 많이 닮아 있었다.
갑자기 본관 교사 건물 위로 “탁탁탁” 하는 소리를 내며 예천 비행장에서 발진한 헬기 편대가 교사 지붕 위를 지나가기 시작했다. 헬기가 운동장을 지나 건물 지붕위로 날아들자 교실이 들썩거리며 유리 창문들이 나뭇잎처럼 파르르 몸을 떨기 시작했다. 한 대, 두 대, 세 대, 네 대.
H21헬기는 일렬종대로 편대를 지어 북쪽 하늘로 날아가고 있었다.
갑자기 흑백 사진 속에 허리가 잘록한 청년이 두 팔을 높이 쳐들며 소리를 질렀다.
“잘해봐라, 개새끼들아! 난 킬러밸리로 간다, 우하하핫…….”
“짤칵”
흑백 사진 위로 굵은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초로의 사내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사진 속에 물방울을 자꾸만 훔쳐내고 있었다.
H21 헬기가 중대의 보급품을 진지에 하역을 할 때 머리위로는 수많은 헬기 편대들이 저공비행으로 지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녀
석이 벌떡 일어서면 지나가는 헬기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잘해봐라 개새끼들아! 난 킬러밸리로 간다,”
신동협 병장이 개미허리와 찍은 사진은 이 한 장뿐이었다.
곧이어 녀석은 창문이 없는 헬기바닥에 풀쩍 뛰어 올랐다. 그리고 두 다리를 달랑거리며 손을 흔들었다.
헬기의 프로펠러가 회전 속도를 높이자 순식간에 비행고도가 높아지면 점점 멀어져 갔다. 그리고 헬기는 빨간 고추잠자리처럼 점점 작아지며 멀어져갔다.
병사의 묵시록
기갑연대 연병장, 04시 45분.
“주님이신 우리 하느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창조하셨고 만물은 주님의 뜻에 의하여 생겨났으며 또 존재합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두려워하지 말아라.
나는 처음과 마지막이고 살아 있는 존재이다. 그리고 죽음과 지옥의 열쇠는 내 손에 있다. 그러므로 너는 네가 이미 본 것과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들과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기록 하여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 바다 건너 저편에는 장병들을 사랑하는 부모와 형제 그
리고 처와 자식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장병들이 무사히 그들의 품안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군목과 군종 신부가 차례로 장병들의 무운을 빌며 간곡하게 기도를 올렸다. 기도 소리는 텅 빈 빈케의 새벽 들판을 메아리가 되어 울려 퍼졌다. 연대는 바야흐로 맹호 A호 작전에 돌입하고 있었다. 이번 작전은 적의 우기 공세를 사전에 차단하기 위하여 한 달간 예정으로
전개될 것이다.
간밤에 달아오른 대지와 하늘이 이제 막 기지개를 켜며 잠을 깨고 있었다. 우기를 한 달 앞둔 대지와 정글은 새벽임에도 불구하고 무쇠처럼 벌겋게 달아 있었다. 어느새 봉숭아 꽃잎 같은 핏빛 노을이 새벽하늘을 붉게 물들이기 시작했다.
연병장도, 군목의 기도 소리도, 장병들의 얼굴도, 무대 위의 배우들처럼 붉은 조명 속에 물들기 시작했다.
이른 새벽이지만 전투배낭을 메고 있는 장병들의 등은 어느새 군복 밖으로 흥건히 젖은 땀이 촉촉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관자재보살, 행심반야 바라밀다시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 사리자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역부여시 사리자 시제법공상…”
군목의 기도에 이어 군종 스님의 독경 소리가 넓은 연병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장병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 숙연히 고개를 숙이고 깊은 정적 속에 잠겨 들었다.
핏빛 노을 속에 울려 퍼지는 독경 소리와 함께 조금 전부터 우르릉, 우르릉 하는 천둥소리가 아득히 먼 곳에서부터 들려오기 시작했다.
천둥소리는 마치 멍석을 말아 올리듯 천천히 밀려오고 있었다.
“연대, 차렷!”
짧고 날카로운 구령 소리가 고성능 마이크를 통해 울려 퍼졌다.
“조국과 부모님께 받들 어이 총!”
“맹호!”
<다음호에 계속>
김범선
저작권자 © 일요서울i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