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끼리는 없다 <제42회>
코끼리는 없다 <제42회>
  •  기자
  • 입력 2008-02-05 10:00
  • 승인 2008.02.05 10:00
  • 호수 43
  • 24면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제4장 길 위의 행복(4)

아침녘에 배를 타고 나오는 낚시꾼들은 게접스럽게 눈곱이 낀 얼굴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너나없이 묵직한 아이스박스를 둘러메고는 어린아이처럼 히득히득 웃곤 하였다.

덕분에 ‘뺑끼’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그에게는 밤낮이 따로 없었다. 미끼와 채비를 비롯한 낚시용품도 팔아야 했으며, 좌대에서 주문이 오면 곧바로 담배와 술, 식사까지도 배로 실어다 주어야 했다. 낚시꾼들은 성질이 매우 급했다. 저마다 화급을 다투듯이 불러대기 일쑤였다. 곁에서 그의 아내가 도와주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손이 열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차 일만은 그런 그를 볼 적마다 그가 옛날의 ‘뺑끼’가 아니란 것을 새삼스럽게 실감하곤 하였다.

“야, 좀 쉬엄쉬엄 해라. 사타구니에 바람 들것다!”

“짜아식, 메뚜기도 한철이라는 걸 모르냐?”

그는 차 일만의 지청구도 대수롭지 않다는 얼굴이었다. 아침부터 예약 문의를 몇 군데 받고난 뒤 아내가 장만해준 음식을 들고는 다시 절름거리며 좌대를 향해 뛰어나갔다. 하긴 수상좌대란 일단 오르고 나면 사방이 고립된 섬이나 다름없는 곳으로서 누가 도와주지 않으면 스스로 무엇 하나 취할 수가 없는 곳이었다.

결국 차 일만과 권 상사는 ‘뺑끼’를 돕기로 작정하고 나섰다. 그도 싫은 기색은 아니었다. 뭐, 이까짓 일에 니들까지 떼거리로 나서냐, 하면서도 그는 각자가 맡을 몫을 나누어주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러나 차 일만에게는 낚시꾼들을 실어 나르는 일을 맡기고, 권 상사에게는 좌대를 보수, 정리하고 청소하는 일을 맡기면서도 그는 주의를 주는 것만큼은 잊지 않았다.

“절대 티를 내지 말아야 해. 알았지? 소문이 나서, 니들이 여기 ‘짱’ 박혀 있다는 게 만의 하나라도 ‘돼지’ 귀에 들어간다면 어떻게 되겠어?”

두 사람은 머리를 끄떡거렸다. 그것은 오히려 차 일만이 말해 주고 싶었던 것이었다.

하기야 이곳에 들어와서 ‘뺑기’의 생각을 따르기로 한 게 그것 하나만은 아니었다. 혼례를 치루고 난 며칠 뒤였다. 낚시터란 사방이 터진 곳이라는 것을 전제하고난 그가 그래서 이제부터는 더욱 조심해야 한다면서, 염 은옥을 처제로, 차 일만을 아랫동서로, 권 상사를 동서의 동생으로, 어머니를 장모로 위장하자고 제의했을 때에도 두 사람은 다만 머리를 주억거렸을 뿐이었다. 더구나 누가 물으면 서울에서 문구 사업을 하다가 실패하여 잠시 들어온 것이라고, 입까지 맞추자는 데에는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어때, 내 생각이?”

“그르케 허시쥬, 뭐.”

권 상사는 금세 이해가 간다는 얼굴이었다.

“어차피 난 쫄따구니께 상관이 없지유, 뭐. 허지먼서두 형님은 쪼께 껄쩍지근허긋시유? 하루 아침에 ‘뺑끼’ 형님의 아랫동서가 되어뿐졌으니께.”

그러나 차 일만은 그게 중요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렇게까지 마음을 써준 그가 고마울 따름이었다. 짜아식, 이젠 많이 컸네, ‘짱구’도 제법 굴릴 줄 알고……. 그는 ‘뺑끼’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옛날 껍죽대며 촐랑거리던 그가 아니란 것을 비로소 실감할 수 있었다.

하지만 권 상사는 금세 싫증을 느꼈다. 일도 손에 익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낚시꾼들의 비위를 맞춘다는 것도 쉽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래서 시간만 나면 어디서고 퍼질러 자는 게 버릇이 된 그는 이따금 낚시꾼들과 부딪쳐 차 일만을 긴장시키기도 하였다. 그 점은 차 일만도 마찬가지였다. 배를 젓는다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펼쳐놓은 낚싯대를 피해 좌대에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하는 것도 그랬지만, 시도 때도 없이 불러대는 낚시꾼들의 성화란 정말 화장실에 가서 뭣 볼 짬이 없을 지경으로 종일 이어졌다. 그런 속에서도 염 은옥은 차 일만을 채근하였다. 멀리서 낚시꾼의 소리가 들릴 때마다 차 일만의 옆구리를 찔러대기 일쑤였다. 기왕 도와주기로 작정하셨으면 열심히 도와 드리세요……. 그날 아침에도 그녀는 손바닥에 생긴 물집을 탓하는 그를 깨워 밖으로 내몰았다.

“어이, 동서!”

새소리를 들으면서 그가 한 차례 기지개를 켜고 있을 무렵이었다. 호수를 덮고 있던 싸한 공기를 뚫고 ‘뺑끼’의 웃음소리가 메아리처럼 들려왔다. 벌써 낚시꾼들의 호출이 있었던 모양인가. 그는 어느새 물안개가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수면 위에서 웃고 있었다.

“오늘 조황은 좀 어때?”

“삼 번과 칠 번 다이는 제법 괜찮은데, 나머지는 영 신통치가 않아. 이 짜아식들이 밤중에 수문을 열어놨던 모양이야. 물이 한 자나 빠졌더라고.”

“십일 번은?”

“거기야 개판 오 분 전이지, 뭐. 영감님 얼굴이 밤새 영 말이 아니더라고!”

다시 큰 소리로 웃으며, ‘뺑끼’가 가운데 손가락을 높이 치켜들었다. 그의 웃음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차 일만은 자신이 지금 쫓기고 있다는 불안감이나 숨어산다는 긴장감 따위를 모두 잊어버리게 되었다. 씨버, 계집의 얼굴은 허여멀건 게 아주 천연덕스럽더라니까! 그는 배를 차 일만에게 넘겨주고는 절름거리며 곧장 권 상사를 깨우러 올라갔다.

11번 좌대는 어젯밤 늦게 남녀 한 쌍이 탔다. 그런데 그 두 사람은 첫눈에도 도통 어울리지 않는 쌍이었다. 육십 대가 훨씬 넘어 보이는, 깡마른 남자와 이제 막 삼십 을 넘긴 듯한 여자가 낚시가방 하나를 달랑 메고 오른 것이었다. 사용료를 받으면서 차 일만이 힐끔 쳐다보자 남자는 쑥스러운 듯 외면한
채 딴청을 부렸다. 저녁 식사는 어떻게 할 것이냐고 물었으나 남자는 귀찮다는 투로 손사래를 쳐댔다.

‘뺑끼’가 올라간 지 얼마나 지났을까. 이윽고 권 상사가 하품을 입에 물고 내려왔다.

“안즉 밤낚시꾼덜 ‘시마이’ 할 시간두 멀었구만 저 형님은 왜 꼭두새벽부텀 곤히 자는 사람을 깨우구 야단인지 모르긋슈. 아, 형님이 좀 이야구 해 줘유, 난 늦잠 체질이라구유. 거기다가 여름꺼정 타구……. 증말 살이 마르구 피가 마를 지경이라니께유.”

권 상사는 그러나 차 일만이 대꾸를 해주지 않자 금세 시들한 표정을 지었다.

차 일만은 담배를 한 대 빼어 물었다. 권 상사의 말이 모두 틀린 것은 아니었다. 밤낚시꾼들이 빠져나가는 시간대는 대개 오전 10시경이었다. 여름의 뜨거운 햇살이 사위로 퍼져가기 시작할 무렵이 되어서야 낚시꾼들은 미련을 버리고 하나 둘 자리를 털고 일어나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비로소 배를 목청껏 불러댔다. 그 시간이 되면 차 일만 뿐만 아니라 권 상사도 바빴다. 밤새껏 농탕치다가 간 좌대를 말끔히 청소하는 시간대도 그때였다. 좌대마다 돌아다니며 낚시꾼들이 남기고 간 미끼를 씻어내고, 빈 캔과 담배꽁초, 소주병 등을 치운 다음, 낚시꾼이 앉을 수 있도록 준비를 해줘야 하는 것이 권 상사의 임무인 것이었다. 그러니까 그는 아침에는 비교적 한가한 편이었다. 하지만 ‘뺑끼’는 게으름을 피우는 그를 그냥 놔두지 않았다. 이 장사는 여름 한 철 벌어서 일 년 먹고 살아야 하는 거야. 그는 잠시만 권 상사가 눈에 안보여도 그를 찾아내어 허드렛일이라도 시켜야 직성이 풀리는 것 같았다.

씨버, 이건 내 체질이 아닌디……. 권 상사가 혼잣말을 해대며 담배를 꺼내 물었다. 차 일만이 안쓰럽다는 눈으로 그를 돌아다보았다. 왜 모르겠는가, 자신 때문에 생고생을 하고 있다는 것을……. 호수에서는 어느새 물안개가 걷혀가고 있었다. 좌대에 앉은 낚시꾼들의 모습이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하였다.

맨 끝 쪽으로 자리 잡은 11번 좌대에도 사람의 모습이 얼비치고 있었다. 수면을 응시한 채 꼼짝하지 않고 있는 낚시꾼들의 모습이란 마치 오래 전부터 있어왔던 호수의 한 부분처럼 느껴졌다.

마침내 낚시꾼들의 아침 식사 시간이 된 모양이었다. ‘뺑끼’가 절름거리며 쟁반을 들고 내려오자 권 상사가 뛰어가 그것을 받아왔다. 씨버, 그려두 먹구
는 살긋다구덜……. 그는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혼자 비웃적거리면서도 그 일을 몇 번 더 반복한 뒤 배를 밀고 올라탔다.

“일 번은 라면 네 개짜린디유.”

‘뺑끼’가 건네준 쪽지를 훑어보며 권 상사가 말하자 차 일만은 배의 방향을 좌측으로 틀었다. 아침상 배달은 매일 똑같은 순서였다.

차 일만이 다시 긴장하기 시작하는 때는 바로 이때부터였다. 순례하듯 좌대를 돌아다니면서도 그의 시선은 늘 낚시꾼들의 동태를 살피고 있었다. 혹시라도 강 승길의 ‘아이들’이나 그들의 끄나풀들이 낚시꾼을 가장하여 들어왔다면 이때가 바로 판단하기 좋은 시간대였던 것이었다.

<다음호에 계속>

 기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