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끼리는 없다 <제41회>
코끼리는 없다 <제41회>
  • 정수남 기자
  • 입력 2008-01-29 11:32
  • 승인 2008.01.29 11:32
  • 호수 42
  • 24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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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길 위의 행복(4)

그러나 강 승길은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낡은이’는 일그러진 그의 얼굴에서 비로소 사태를 짐작한 듯 얼굴이 굳어지기 시작했다.

“자재 상황은?”

“잘 되어가고 있습니다.”

“주문한 것들은?”


“내일 오후에 준비하도록 조치해놨습니다.”

‘낡은이’는 강 승길의 속셈을 이미 알고 있다는 듯이 곧바로 대꾸했다.

공사 현장에서 가장 중요한 직책은 경비였다. 그들은 공사 인부의 동정은 물론, 자재 수급과 차량 운행까지 총괄하고 있었다. 특히 공사 현장에는 늘 자재가 노지에 산적해 있게 마련이었고, 하루에도 수 백 대의 차량들이 흙과 모래를 싣고 드나들고 있었기 때문에 그만큼 감시의 눈을 크게 뜨고 있지 않으면 아니 되었다. 그래서 대개 경비의 총책은 자신이 믿을 수 있는 심복을 꽂아놓는 게 관례처럼 되어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강 승길의 인선은 옳은 셈이었다. 셰퍼트가 되어야 해, 세퍼트……. 사실 전문적 기술이 전혀 없는 이 바닥의 ‘아이들’을 현장에서 써먹을 수 있는 방법이란 그것밖에 없기도 한 것이었다.

“‘도자’업자 좀 조져대!”

“알겠습니다!”

강 승길은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는다는 듯이 어금니를 짓씹었다.

건설업에서는 대개 발주자와 계약을 체결한 원청업체가 전문 하청업체들에게 공사를 쪼개어 맡기는 게 관례로 되어 있었다. 그러면 하청업체들은 또 적당히 자기의 이익금을 챙긴 뒤 다른 하청업체들에게 공사를 떠넘기게 마련이었다. 따라서 원청을 맡은 업체는 그만큼 많은 하청업체를 협력업체처럼 거느리고 있는 게 통례였다.

더구나 불도저를 비롯한 굴삭기, 크레인 등, 중장비 업자들은 원청업체가 아직 장비를 구비하지 못한 기업일 경우, 원청업체에 빌붙어 먹고 살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따라서 ‘오야지’의 눈에 들기 위해서는 먼저 그의 수족이나 다름없는 경비원들의 눈에 들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절차였으며, 그들의 요구를 ‘물며 겨자 먹기’ 식으로 들어주어야 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강 승길이 자금을 마련하는 방법은 그 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었다. 일테면 자재를 입고시키지도 않고 입고시킨 것처럼 가장, 사용한 것으로 회계장부를 조작, 자재대금을 빼돌리는 방법도 있었으며, 인부들의 임금을 실제 지불하는 액수보다 높게 책정하여 차액을 빼돌리는 방법 등 다양했다. 그러니까 이미 그 많은 방법을 통해 재미를 보아온 그가 그날은 김 국진 이사에게 한 방 먹은 꼴이었다. 젊은 놈이 싸가지 없이 나를 가지고 놀았다 이거지? 강 승길은 갑자기 정수리가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작은 마마를 앓은 흔적이 얼굴에 그대로 남아 있는 ‘낡은이’가 발라맞추는 말투로 다시 소곤거렸다.

“통장에 입금시킬까요?”

“가방에 넣어와.”

“알겠습니다.”

“소문나지 않게 해.”

‘낡은이’는 허리를 구십 도로 꺾었다. 덤프트럭이 내려오다가 출입구에서 전표를 찍는 것을 창밖으로 바라다보며 강 승길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문득 그림자조차 찾을 수 없는 ‘깜씨’와 그 여자가 생각난 탓이었다. 이 짜아식들은 도대체 뭣들 하고 자빠진 거야!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그는 솟구치는 불뚝성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주먹으로 테이블을 힘껏 내려쳤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형님?”

‘낡은이’가 짐짓 놀랐다는 투로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그는 벌써 강 승길의 속마음을 꿰뚫고 있는 듯 했다.

그가 알고 있는 바에 의하면, 문제는 지난 몇 달 동안 ‘아이들’을 총동원하여서 전국 방방곡곡을 이 잡듯이 뒤져보았지만 ‘깜씨’의 코빼기조차 찾아볼 수가 없었다는 데 있었다. 쑥고개 ‘뱀대가리’ 집에서 며칠 묵었다는 것 외에는 별다른 단서 하나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강 승길의 고민은 ‘깜씨’가 꿰어 차고 ‘잠수’를 탄 그 여자의 출산일자가 이미 지났다는 데 있었다. 그것은 이제 잡아야할 사람이 둘에서 셋으로 더 늘어났다는 것을 의미하며, 또한 그만큼 일이 생각대로 풀려가지 않는다는 것을 뜻하기도 하였다.

“노인네까지 빼돌렸어, 이 짜아식이!”

강 승길이 아니꼽다는 투로 말했다. 그러자 ‘낡은이’는 그것이 마치 자신이 당한 일처럼 흥분했다.

“그렇다면 이제는 아주 길게 ‘짱’ 박겠다는 거 아닐까요?”

‘낡은이’가 묻자 강 승길이 머리를 주억거렸다. 장기화……. 그것은 강 승길의 예정에는 없었던 일이었다. ‘그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그는 그것을 단기전으로 간단히 끝낼 요량이었다. 그러나 이젠 어쩔 수 없이 장기화의 조짐을 보이고 있는 것이었다.

김 국진 이사에게 ‘마이가리’로 거짓말까지 한 처지인데…….

강 승길은 그 생각만 하면 뒷골이 쑤셨다. 그것은 시한폭탄이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깜씨’의 배포로 짐작해볼 때 그가 언제인가 자신의 앞에 여자와 아이를 데리고 나타나지 말라는 법도 없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원점에서 다시 시작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러니까 성질이 앞을 가린다는 거 아냐, 시방, 내가!”

강 승길은 이를 갈았다. 설마하니 그 여자가 혼자서 방문을 걸어 잠그고 아이를 낳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그렇다면 ‘깜씨’가 곁에 딱 붙어 있을 것이 분명했다. 또 그 사이 노인네까지 감쪽같이 빼돌린 것을 보면 이젠 어딘가에 맘 놓고 둥지를 틀었다는 것을 예상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그곳이야말로 자신의 손이 미치지 못하는 곳일 것이 확실하며, 장기화를 꾀하고자 하는 ‘깜씨’의 계략이 결국 성공하였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번엔 제가 한 번 나서 볼까요?”

‘낡은이’는 이때다 싶은 얼굴이었다. 공사 현장에서 경비 총책으로 먼지나 마시며 ‘오야지’ 밑을 닦아주는 것보다는 이런 때 공을 세워 자신
도 ‘본토’로 진출해 ‘때 빼고 광내보겠다는’ 야심이 역력했다. 그러나 그런 것을 모를 강 승길이 아니었다. 그는 ‘낡은이’의 제안을 단칼에 잘랐다.

“이 공사가 끝날 때까지는 넌 국으로 이곳에 ‘짱’박혀서 시킨 일이나 잘 하고 있어! 쓸데없이 밖으로 나댈 생각 말고, 알겠어?”

강 승길은 눈을 부라렸다. 그렇지 않아도 이 골프장 공사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으면 곧 그 일부터 다시 착수할 계획이었다. 그것은 결코 그냥 흐지부지 내버려둘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자신의 자존심과도 직결되었다. 감히, 누가 나를 능멸해! 그는 ‘깜씨’가 땅으로 꺼졌거나 하늘로 솟구치지 않았다면 지구 끝까지라도 쫓아가서 반드시 찾아내어 응징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그 일을 맡길 사람은 ‘낡은이’가 아니었던 것이었다.

김 국진 이사한테서 전화가 걸려온 것은 그로부터 약 한 시간이 경과될 즈음이었다. 그의 말투는 첫 마디부터가 조금 전과는 달리 매우 사근사근했다. 쫀쫀하게 뭐 그런 것으로 삐졌느냐는 투였다. 그러나 배알이 꼴려있던 강 승길은 통화 내내 불퉁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병 주고 약 주시는 겁니까?”

“제 입장도 좀 고려해 주세요.”

“그래도 말은 골라가며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이해하세요. 회장님 앞에서 체면 좀 세우고자 한 짓이니까…….”

김 이사는 큰 소리로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오늘 일은 그냥 웃어넘기십시오. 아, 사업 한두 번 해보셨습니까?”

“그래도 그렇지, 암튼 저는 불쾌했습니다.”

“순진하시기는…….”

김 이사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번엔 제가 사과하는 의미로 저녁을 한 번 멋지게 쏘겠습니다. 시간만 잡으십시오. 수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그의 웃음소리에서 강 승길은 뭔가 또 심상찮은 일을 자신이 맡아야 할 것 같다는 느낌을 지워버릴 수가 있었다.

교활한 놈……. 그러나 그것은 추가 공사를 수주 받기 위한 밑거름이 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볼 때 그렇게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그는 결국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그날 저녁으로 시간을 정하고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 차 일만, ‘뺑끼’의 동서가 되다

수상좌대는 주말이 되면 늘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붐볐다. 더구나 ‘뺑끼’네 좌대가 조황이 좋다는 소문이 난 뒤부터는 더욱 그러했다. 낚시꾼들의 자리다툼이란 과히 전쟁을 방불케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단골들은 일주일 전부터 미리 예약을 해두거나 아예 선금조로 계좌입금까지 시켜가며 자리를 확보했다. 낚시는 대개 밤낚시로 이루어졌다. 낮에 도착한 낚시꾼들은 대부분 밑밥이나 슬슬 뿌려주며 기다리다가 해가 질 무렵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하여 오전까지 낚았다.

<다음호에 계속>

정수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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