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끼리는 없다 <제40회>
코끼리는 없다 <제40회>
  • 정수남 기자
  • 입력 2008-01-22 11:42
  • 승인 2008.01.22 11:42
  • 호수 41
  • 24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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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길 위의 행복(3)

사실 이 세계에서의 결혼이란 그리 흔하지 않았다. 열 명이면 하나 정도나 사모관대를 입어볼까, 대부분은 그냥 오다가다 길거리에서 만난 여자와 짝을 맺어 가시버시로 사는 게 보통이었다. 그래서 오늘 ‘형님’하고 사는 여자는 ‘형수님’으로 불렸고, ‘아우’와 사는 여자는 ‘계수님’으로 불렸다. 그러나 그나마도 유흥업소 종업원 출신들이 많아서 가끔은 어제까지 형수로 불렸던 여자가 어느 날 자신이 일하는 업소에 나와 술을 따르는 경우도 허다했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비록 약식이기는 하였으나 혼례식까지 버젓이 치룬 그는 정말 자신이 행운아 같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었다. 더구나 지금은 ‘잠수’를 타고 있는 급박한 상황이 아닌가.

밤이 깊었다. 마당도 조용했다. 차 일만을 안주 삼아 떠들썩하게 술판을 벌이던 ‘뺑끼’와 권 상사, 복만이도 수상좌대로 어느새 자리를 옮긴 모양이었다. 사위가 먹물을 뒤집어 쓴 것처럼 고즈넉했다. 습기를 머금고 불어오는 밤바람 사이로 부엉이 울음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려왔다.

“피곤하실 텐데, 그만 누우세요.”

염 은옥이 스위치를 내렸다.

신방이라고 해서 독별난 것은 없었다. 방은 벌써부터 차 일만이가 혼자 거처하던 곳이었으며, 또 두 사람 모두 이성을 통해 한두 차례씩 상처를 받았던 경험이 있는 터이었기 때문에 쑥스러울 것도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처지였다. 하지만 이상했다. 불을 끄고 자리에 누웠으나 가슴은 쉽게 진정되지 않았다. 그 점은 염 은옥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한참동안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결국 더 이상 침묵의 무게를 감당하기 어렵다는 듯이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술 가져올까요?”

“술은, 무슨…….”

“그럼, 불을 다시 켤까요?”

“놔두세요.”

발치에 오도카니 앉아 있는 염 은옥을 향해 차 일만이 팔을 뻗었다. 허리에 팔을 두르자 그녀가 한 차례 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녀를 가만히 끌어당겼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그녀가 차 일만의 가슴 위로 쓰러졌다. 그녀는 떨고 있었다. 떨림이 그대로 온몸에 전달되어져왔다.

홑겹이나 다름이 없는 염 은옥의 옷을 벗기는 데에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차 일만에 의해 마지막 속옷이 벗겨지자 그녀는 부끄러운
듯 차 일만의 가슴에 얼굴을 깊이 파묻었다. 차 일만이 그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앞으로 우린 정말 꼭 잘 살아야 해요.”

“저는 걱정 안 해요. 일만 씨가 계시니까.”

“건태와 함께 보란 듯이…….”

“정말 그렇게 살 수 있을까요?”

차 일만은 염 은옥을 힘껏 껴안았다. 더 이상 대답은 필요 없었다. 몸을 돌려 그녀 위에 오른 그는 서둘러 입술을 찾았다. 그리고는 몹시 갈증 난 사람처럼 그녀의 입술을 감빨기 시작했다. 그녀의 입술은 새로 돋기 시작한 풀처럼 연하고 보드라웠으며, 체액은 칡꽃 같은 들큰한 향을 풍기고 있었다.

염 은옥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가 입술에서 목으로, 목에서 귀, 다시 가슴으로 입술을 옮겨가는 동안 그녀는 그의 목을 다시는 놓지 않을 사람처럼 꼭 끌어안고 있었다. 허리를 더듬던 그의 손이 아래로 내려와 둔부와 넓적다리 부근, 치부를 훑고, 또 쓰다듬을 때에도 그녀는 결
코 그의 목을 놓지 않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염 은옥의 숨소리가 점점 가빠지기 시작했다. 몸에서 땀기가 느껴졌다. 하지만 차 일만은 잠시도 멈추지 않았다. 로즈우
드 향에 취한 듯, 그는 그녀의 몸에서 한시도 입술을 떼지 않았다. 젖무덤에 코를 묻자 그녀의 입에서 비음이 가느다랗게 새어나왔다. 사랑해요……. 마침내 염 은옥의 몸을 연 차 일만은 그녀 안으로 자신을 깊숙이 밀어 넣었다. 그리고는 힘차게 언덕을 뛰어오르기 시작했다. 사랑해요. 사랑해요. 사랑해요……. 이윽고 고개 마루에 도달한 그는 숨을 길게 내쉬며 자신을 한 방울도 남김없이 모두 쏟아내었다. 빈 몸이
된 뒤에서야 그는 비로소 오랫동안 걷던 걸음을 멈추었다.

여름밤은 짧았다. 어느 새 먼동이 터오는 모양이었다. 희뿌옇게 밝아오는 창밖으로 수면을 차고 튀어 오르는 잉어들의 물소리가 벌써 새벽을 깨우기 시작하고 있었다.


# 회색과 쥐색의 차이

공사는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토목공사도 수방공사도 공정에는 차질이 없었다. 토질도 대부분이 마사토인 까닭에 애를 먹이지 않았으며, 벌목도 말썽 없이 진척되어가고 있었다. 덤프트럭들이 개미떼처럼 오르락내리락 하는 산은 벌써 민둥산이 되어가고 있었으며, 고도도 많이 낮아져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현장에 나온 강 승길은 그러나 긴장을 늦출 수가 없었다. 공사 진척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 김 국진 이사가 황 회장을 모시고 곧 오겠다는 전갈을 해왔기 때문이었다.

“공사에 장애 요인은 없어?”

“없습니다.”

“암반은?”

“없었습니다.”

현장소장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벌을 서는 학생처럼 그는 차렷 자세로 강 승길이 물을 적마다 단답식으로 대답했다.

강 승길은 머리를 끄덕거렸다. 그렇다면 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암반이 발견되면 굴삭기에 유압 해머를 장착하여 파쇄를 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 범위가 클 경우에는 자칫 공정에도 차질이 생기게 마련이었던 것이었다.

황 회장과 김 이사는 오전 10시가 넘어서야 도착했다. 그들은 강 승길을 비롯한 간부들의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곧장 현장 사무실로 들어섰다.

“잘 되어가지요?”

“예에, 지금까지는 차질 없이 잘 진행되고 있습니다.”

황 회장 앞에 서서 브리핑을 하는 강 승길의 얼굴은 자신도 모르게 굳어 있었다. 그것은 아침나절 자신 앞에 섰던 현장소장이나 조금도 다를 바가 없는 것이었다. 다행히도 황 회장은 만족해하는 모습이었다. 먼지바람을 일으키는 덤프트럭을 가리키면서 이따금 곤댓짓을 해대곤 하는 그의 얼굴에서 강 승길은 공천이 계획대로 잘 풀려가고 있다는 것을 쉽사리 직감할 수 있었다.

오히려 까다로운 보충 질문을 해대는 사람은 김 이사였다. 골프장 부지 확보 때부터 직접 관여해온 탓에 이곳의 지형지물에 대해서 누구보
다 확실히 알고 있는 그는 조그마한 허점도 그냥 넘어가지 않겠다는 투로, 질문을 송곳처럼 쏘아대었다. 특히 강 승길이 적당히 넘어가려고 작정했던 배수 처리 공사를 그는 황 회장 앞에서 놓치지 않고 끄집어내었다.

“골프장은 늘 자연에 노출되어 있게 마련입니다. 한해도 있지만 수해도 겪을 수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빗물이 빨리 빠지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잔디의 성장은 물론이고 코스도 습기를 머금게 되어 지면이 들뜨게 되지 않겠어요? 골프장은 멤버들의 입소문으로 그 가치가 올라가는 것인데, 그렇게 된다면 게임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하게 된다는 것은 기정 사실 아니겠습니까?”

그는 강 승길이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으나 상관하지 않고 토관의 직경과 맨홀의 숫자와 크기 등까지 꼼꼼히 체크하였다. 결국 그날 현장 확인은 그의 승리로 끝난 셈이었다. 배알이 뒤틀렸지만 강 승길은 두 손을 들고 말았다. 어쩔 수 없이 배수공사의 공정을 대폭 확충 수정하겠다고 구두로 약속하고만 것이었다.

강 승길은 입맛이 썼다. 그는 두 사람이 떠나고 난 뒤에도 자리를 뜰 줄 모르고 있었다. 씨바, 공과 사는 철저하게 구별하자, 이거지!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아무리 혼자 분을 삭이려고 해도 안면을 싹 바꾼 채 따지고 들던 그의 얼굴을 생각하면 울화가 치밀었다. 짜아식, 내가 지 ‘시다바리’야, 뭐야. 골치 아파하던 뒤치다꺼리를 청소해 주니까, 이젠 나 몰라야? 그러나 공기를 단축시켜 추가 공사까지 수주를 받으려면
그의 비위를 건드려서는 아니 될 일이었다.

그는 다시 현장 소장을 불렀다. 그리고는 김 국진 이사가 했던 것과 똑같이 배수 공사를 설계도면대로 수정하라고 지시했다.

“그건 사장님이 특별 지시하셨던 것 아닙니까?”

“그땐 그랬지만, 지금은 아니야. 알겠어?”

강 승길은 핏대를 올렸다. 그래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그를 쫓듯이 내보내고 이번엔 ‘낡은이’를 호출했다. 경비 총책을 맡고 있는 ‘낡은이’는 들어서면서부터 반죽 좋게 꺼떡거렸다.

<다음호에 계속>

정수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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