킬러 밸리 제 26회
킬러 밸리 제 26회
  •  기자
  • 입력 2008-09-05 09:43
  • 승인 2008.09.05 09:43
  • 호수 749
  • 56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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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미허리

개미처럼 가는 허리

장몽두리가 녀석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말라깽이가 깜짝 놀라 펄쩍 뛰었다. 그는 몹시 당황하는 것 같았다.

녀석이 장몽두리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리고 서서히 얼굴에 웃음이 번지기 시작했다.

“군인 양반, 늙은 이등병.”

말라깽이가 중얼거렸다.

“이제야 기억이 나는 모양이군, 알아보겠어?”

“잊을 리가 있나.”

“자아, 안으로 들어가서 이야기하자고.”

장몽두리가 말라깽이를 데리고 사무실로 들어갔다.

“여긴, 어떻게 왔어?”

“애들이 사람을 죽였어. 그래서 입대를 했지. 군대보다 더 안전한 곳이 어디 있겠어? 여긴 못 쫓아 올 거라는 생각을 했지. 그런데…”

“사고를 쳤나?”

“아냐, 짜부들이 내가 입대한 걸 눈치를 챘다더군. 연락이 왔어. 그래서 아무 이유 없이 소대장 따귀를 몇 대 갈겼더니 여길 보내더군. 여기보다 더 안전한 피난처가 어디 있겠어.”

“잘 왔어, 백호. 그런데 포항서는 왜, 내게 돈을 줬나? 생전 처음 보는 이등병한테…”

“난, 자는 척하며 널 관찰을 했지. 넌, 보통 사람이 아니었어. 그 눈빛이 섬뜩했지. 난, 속으로 깜짝 놀랐지. 만일 이 친구가 적이라면 큰일 났다는 생각이 들더군.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넌 황급히 눈길을 피했어. 그때 내 적은 아니로구나 하는 확신이 들었지. 마음을 놓고 널 찬찬히 살폈지. 나이에 비해 계급은 이등병, 감자라는 생각이 들더군. 안됐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래서 호주머니를 털었지.”

“그땐 정말 고마웠어. 그 돈으로 포항에서 하룻밤을 잘 보냈어. 여긴 내 나와바리(구역)이고 넌, 내 친구야. 니가 원하는 건 내가 모두 해줄 수가 있어. 걱정 말고 편히 쉬라고. 너네 집 안방처럼 생각해.”

“짜부들이 여기까지 찾아오면 어떡하지?”

“걱정 마라, 그땐 널 월남으로 보내주지. 거기 까진 못 찾아갈 걸. 흐흐흐…”

“정말?”

얼마 후 장몽두리는 대구 제일의 주먹 백호를 월남으로 보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 백호가 바로 개미허리였다.

장무수 일병의 이야기는 거기서 끝났다. 그 뒤, 신동협 병장은 개미허리와 평생을 두고도 잊지 못할 가슴 아픈 추억을 맺게 되었다.

신동협 병장은 장무수 일병과 작별 인사를 하고 위병소를 빠져 나왔다. 그리고 중대 진입로를 지나 아스팔트가 곱게 깔린 큰길에 내려섰다.

신동협 병장은 고개를 길게 뽑아 산 위에 고즈넉이 서 있는 중대 막사를 쳐다보았다. 장무수 일병이 아직도 위병소 정문 앞에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신동협 병장은 2년 전 어느 날, 눈보라가 사정없이 몰아치던 겨울밤에 이곳에 도착했다. 그날 밤은 영하 29도가 넘은 엄청나게 추운 날씨였다.

중대 막사는 칼날같이 높은 산들이 병풍처럼 빙 둘러싸고 있는 분지 속에 위치하고 있었다. 병사들은 인가가 없는 외딴 계곡 속에 곰처럼 움츠리고 있었다. 막사 지붕까지 쌓인 눈, 살갗을 에는 무서운 추위,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짐승들처럼 먹을 것을 찾아 헤매는 폭설 속에 감옥이었다.

한 주먹도 안 되는 보리밥과 멀건 콩나물국은 강추위 속에 기본적인 체온을 유지하기에도 힘이 들었다.

누더기 군복에는 손가락만 집어넣어도 손톱 끝에 이가 집혀 나왔다. 이는 시도 때도 없이 기어 나왔다. 이는 머리카락 속에서 굼실굼실 기어 나와 하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콩나물국 속으로 툭 떨어지기도 했다.

밤에는 언제나 목에 걸고 다니는 DDT 주머니의 고약한 약품 냄새 때문에 두통을 앓았다. 병사들은 겨울 6개월 동안 한 번도 목욕을 한 적이 없었다. 도대체 물이 있어야 목욕을 하지 않겠는가. 꽁꽁 얼어붙은 개울물은 이듬해 유월에야 몸을 적실 수가 있었다.

신동협 병장은 그런 생활을 2년 동안이나 이곳에서 했다. 그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 즉 사람은 굶주림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못할 짓이 없다는 교훈을 힘들여 배우고 있었다. 그것은 가장 뼈아픈 삶의 방식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할 수만 있다면 다시 구만리 중대로 돌아가고 싶었다. 이제 막 위병소 정문을 떠났음에도 밤이면 살갗을 마주하고 같이 잠을 청하던 전우들이 벌써 그리워졌다. 그는 손등으로 흐르는 눈물을 훔치며 중얼거렸다.

“이젠, 어쩔 거여, 어떻게 살지?”

장몽두리가 몹시 보고 싶었다. 형님처럼 살갑게 대해 주던 그에게 돌아가 목놓아 실컷 울고 싶었다. 그런데 가만, 장몽두리가 월남엘 가면 누군가를 만나 보라고 말했는데…

메뚜기 허리, 매미 허리? 아참, 이제야 생각이 나는군. 개미허리라고 했지.

등 뒤에서 갑자기 끼익 하는 소리와 함께 헌병 백차가 급정거를 했다. 깜짝 놀란 신동협 병장은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찡 좀 봅시다.”

운전석 앞자리에 앉아 있는 병장이 거만하게 손을 내밀었다. 신동협 병장은 허둥지둥 군복 상의 호주머니로 손이 갔다. 외출 증명서가 있을 리가 없었다.

‘내겐 그런 것은 없다. 난, 전쟁터로 가는 몸이야. 죽을 지도 모르는데 뭐가 겁나겠어?’

신동협 병장은 헌병 병장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난, 그런 거 없소. 파월 잡니다.”

“아 그렇습니까, 단결, 군단까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타시죠.”

헌병의 자세는 조금 전과는 달리 백 팔십 도로 변했다. 신동협 병장을 태운 백차가 멀리 보이는 군단을 향하여 38교를 건너기 시작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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