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끼리는 없다 <제39회>
코끼리는 없다 <제39회>
  • 정수남 기자
  • 입력 2008-01-15 10:17
  • 승인 2008.01.15 10:17
  • 호수 40
  • 24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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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길 위의 행복(2)

하나님, 우리 건태를 지켜 주시옵소서그날부터 어머니의 기도에는 자연스럽게 건태라는 이름이 앞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아이도 자기 이름을 아는 것일까. 아이는 이름이 불러질 적마다 배내 웃음을 짓곤 하였다.


# 합방

염 은옥의 어머니는 딸과 차 일만의 합방을 그냥 묵인하지 않았다. 예식장을 잡아 정식으로 혼례를 치룰 처지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형식은 갖추어야 한다고 고집을 부렸다. 당사자들이 손사래까지 쳐가며 마다했으나, 그녀는 딸이 머리를 올리는 것을 보는 게 소원이라며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았다. 늙은이 소원 들어달라고, 권 상사와 ‘뺑끼’까지 동원해가며 극성을 떨어댔다.

“냉수 한 그릇을 떠놓고서라도 식은 꼭 치르도록 해.”

그 소리를 들을 적마다 차 일만은 고개를 외로 꼬았다. 아직까지도 노출은 금물이었다. 언제 어느 때 강 승길의 ‘아이들’이 쳐들어올지 모르는, 비상시국에 한가하게 잔치라니……. 하지만 며칠이 지나지 않아 염 은옥까지 가세하자 차 일만도 결국은 두 손을 들고 말았다. 청첩장까지 돌릴 수는 없는 입장이지만, 국수라도 말아 아는 사람 몇 명 불러서 나누고, 기념으로 사진 몇 장 찍자는 데에는 딱히 거절할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그럼 그렇게 하지요, 뭐.”

차 일만으로부터 승낙을 받아낸 어머니는 뛸 듯이 기뻐했다. 고마워, 고마워. 그 다음부터는 모든 게 일사천리였다. 삼칠일이 지나기 바쁘게 일방적으로 날짜를 잡은 어머니는 혼례식에 필요한 기구와 기물, 의복까지 수소문해 빌려왔다. 처음 말하던 것과는 달리 규모가 조금씩 커졌다. 혼례란 의식을 통하여 남녀 간의 육체적 정신적 결합을 인정받는 것임으로 절차가 매우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모든 것에는 절차와 순서가 있어.”

혼례를 치룰 장소는 마당으로 정했다. 집례선생은 ‘뺑끼’가 부른 동네 어른이 맡기로 했다. 기러기 아범은 권 상사가 맡았고, 수모는 ‘뺑끼’의 아내가 맡았다. 초청받은 하객은 서울에서 부랴부랴 올라온 복만이까지 합쳐서 고작 다섯 명뿐이었다. 그러나 전안례에 이어서 교배례, 합근례까지, 홀기에 따라 잔치가 벌어지자 낚시꾼들이 자리를 뜨지 않은 탓에 구경꾼들은 마당을 가득 메웠다.

두 사람이 표주박 잔에 술을 나누어 마시고, 집례 선생으로부터 덕담까지 듣고 나자 어머니는 비로소 만족해하는 얼굴이었다. 잘 살아야 해. 사진을 몇 컷 찍은 뒤 빌린 한복을 돌려주기 위해 벗고 있는 염 은옥의 곁에 앉아 연신 눈물을 찍어내고 있었다.

차 일만은 얼떨떨했다. 그러나 싫지는 않았다. 혼인이란 우리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남녀 두 사람의 즐거움뿐만 아니라 가정이라는 공동체를 통해 사회 발전의 원동력까지 되는 것입니다……. 그는 집례선생의 덕담을 들으면서 비로소 자신이 이젠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실감했다.

“아무래도 헌 신랑 같다 야. 저렇게 늙고 새까만 신랑이 어디 있냐, 안 그래?”

‘뺑끼’와 권 상사가 야기죽거리며 놀려댔으나 차 일만은 대거리를 하지 않았다. 긴장을 푼 두 사람의 얼굴에 술기가 묻어나자 그는 더욱 불안해지기 시작하였다. 사전에 권 상사에게 언질을 주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이제 와서 그를 나무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술잔을 돌리고 있는 그들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그는 혼자 주변을 살폈다. 그나마 낮술은 안 먹는다고 사양하는 복만이가 곁에 있어 다행이었다.

잔치는 여름 해가 저물녘까지 이어졌다. 오전 참에 치룬 예식도 제법 길었으며, 국수 시중도 만만치가 않았다. 공짜를 좋아하는 건 낚시꾼들도 마찬가지여서 한 그릇을 비우고 나면 곱빼기로 또 한 그릇을 주문하는 것이 예사였다.

“신혼여행도 없이…….”

복만이가 머리를 긁적거렸다.

“나중에 가지, 뭐.”

차 일만이 대꾸했다.

땅거미가 지기 시작하자 복만이도 결국 술자리에 합세했다. ‘뺑끼’가 수상좌대에 이차를 벌써 준비해두었다는 것을 보면 그들의 술판은 쉽사리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땐 증말 미안혔다. 그렇지만 그거이 형님이나 내 본심이 아니라는 건 니두 잘 알잖여? 권 상사가 지난번 일을 다시 사과하는 모양이었다. 그를 보고 있으면 미안한 마음이 드는 것은 차 일만도 마찬가지였다. 지난번 바람막이로 나섰던 ‘아이들’ 네
명이 강 승길이 데리고 있는 ‘새끼 오야지들’에게 ‘죽사발’이 된 것도 결국은 모두 자신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그럴까. 술잔을 받는 복만이의 얼굴이 전보다 많이 초췌해 보였다.

씨벌 눔의 시상……. 권 상사가 혼잣말처럼 푸념을 해댔다.

차 일만은 그러나 그 자리에 ‘째보’와 ‘주먹코’, ‘떨새’가 끼어있지 않다는 것이 다행스러웠다. 지금 같은 세상에 누구를 믿고 자신을 노출시킬 수 있단 말인가. 그런 의미에서 따지자면 권 상사는 야속하게 생각할지 몰라도 그들의 초청 제의를 거절한 것은 썩 잘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려두 낭중에 들으믄 솔찮이 서운해 할 틴디…….”

권 상사의 얼굴에는 섭섭하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나 차 일민은 단호했다. 의리 좋아하지 마. 돈 몇 푼 쥐어주면 하루에도 열두 번씩 배신을 밥 먹듯이 하는 이 바닥의 생리를 아직도 몰라? 아침까지 친구였던 놈이 해 떨어지기 전에 ‘코 풀어버리고’ 뒤돌아서는 게 이 세상이잖아. 그렇게 볼 때 적은 사방팔방에 산재해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 지역만 해도 그랬다. ‘뺑끼’는 이 지역의 ‘아이들’이란 대부분 유흥업소에 종사하는 ‘쫄따구’들이니까 신경을 꺼도 된다고 장담했다. 그러나 차 일만의 생각은 달랐다. ‘지역구’들이라고 해서 만만히 여기고 방심했다가는 나중에 뒤통수를 맞을 수도 있는 것이었다. 사건은 아주 작은 것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늘 보아오지 않았던가. 차 일만에게는 그것조차도 조심하고 경계할 대상이었다.

밤이 깊어가자 어머니는 건태를 안고 건너갔다. 오늘밤은 아무 생각 말고 푹 자. 에미도 피곤할 터이니까 일찍 눈 붙이고……. 그녀는 아직 더운 기운이 가시지 않은 방의 문까지 꼭 닫아주었다. 하지만 그것이 두 사람의 합방을 위한 배려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잘 살아야 돼. 차 일만은 순간 염 은옥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혼나셨죠? 괜히 저까지 고집을 부려서…….”

염 은옥이 미안하다는 투로 말했다.

“아니예요, 어머니 말씀대로 떳떳해서 좋네요, 뭐…….”

차 일만은 마른 침을 삼켰다.

“그렇게 이해해 줘서 고마워요.”

그를 쳐다보며 염 은옥이 흰 치아를 드러내고 웃었다. 차 일남은 그녀의 곁으로 바투 다가앉으며 어눌하게 말했다.

“미안해요. 저는 은옥 씨에게 꼭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혀드리고 싶었는데…….”

그것은 사실이었다. 어릴 적부터 그는 막연히 혼자 다짐을 하곤 했었다. 신부들이 입는, 레이스가 화려하게 달린 그 하얀 웨딩드레스를 자신의 아내에게 꼭 입히겠다는……. 그러나 그 생각은 이제 아쉽게도 접어야 할 것 같았다.

“미안해요, 제 몸이 깨끗하지 못해서…….”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차 일만은 염 은옥의 어깨를 부드럽게 안았다. 염 은옥은 잠자코 있었다. 로즈 우드 향이 코끝에 간지럽게 와 닿았다. 어머니는 바깥에 나가서도 잔소리를 해대는 모양이었다. 갑자기 권 상사와 ‘뺑끼’의 목소리가 왁자하게 들려왔다.

“아, 헌 신랑을 초저녁부터 신방에 들여앉히면 어떡합니까.”

“어련히들 알아서 잘 헐 긋인디, 어머님이 공연히 초 치구 간장 치구 하시는 거 아닌지 모르긋슈…….”

말을 마친 권 상사가 큰 소리로 웃었다.

뒤이어 복만이의 노래 소리가 들려왔다. 삼각지 로터리를, 헤메 도는 이 발길……. 취했지만 그의 실력은 여전했다. 섣부른 가수는 명함도 내밀지 못한다는 그의 노래 소리가 밤하늘에 나지막하게 울려 퍼졌다. 그러나 차 일만은 방안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사랑하는 여자를 안고 있다는 게 꿈만 같았다.

“약식이지만 어머니 말씀대로 이렇게 혼례를 치루고 나니까 갑자기 내가 행운아인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바깥에 있는 아이들한테도 자랑스럽고…….”

차 일만은 팔에 힘을 주었다. 그녀의 숨소리가 가깝게 들려왔다.

<다음호에 계속>

정수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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