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끼리는 없다 <제37회>
코끼리는 없다 <제37회>
  • 정수남 기자
  • 입력 2008-01-02 13:19
  • 승인 2008.01.02 13:19
  • 호수 38
  • 24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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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길 위의 행복(1)
“뭐라고 그래요?”

염 은옥이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곧 오겠다고 하는데요.”

다시 액셀러레이터를 밟으면서 차 일만은 그녀를 안심시켰다.

“정말 엄마까지 부르실 거예요?”

자동차가 가평을 벗어나자 염 은옥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녀에게는 그것이 가장 큰 관심사인 듯 했다. 차 일만을 돌아보는 눈이 더욱 커져 있었다.

“그럼요. 왜, 믿지 못하겠어요?”

“아니요, 믿어요.”

“함께 살아요, 이젠 우리 모두. 그게 은옥 씨의 소원 아니었어요?”

이때였다. 그녀가 눈물을 글썽이며 차 일만의 볼에 기습적으로 입술을 갖다 대었다. 차 일만은 어안이 벙벙했다. 그러나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갑자기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달콤하고 싱그러운 로즈 우드 향으로 자동차 안에 가득 찼다.

“엄마까지 신경을 써주셔서 정말 고마워요.”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산바라지를 은근히 걱정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뒷좌석에 실은 가방의 내용물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그녀는 비로소 속내를 털어내었다. 그것은 그동안 그녀가 마련해 두었던 출산 준비물로, 그 속에는 아이가 입을 배냇저고리를 비롯해서 가재손수건, 목욕용품, 젖병, 싸개 등이 들어있다면서, 그녀는 여차하면 아이를 혼자 낳아 뒷단도리까지 할 요량이었다고 말했다.

“아이는 축복받아 마땅한 생명이에요. 안 그래요?”

그녀는 부끄럽다는 투로 웃었다. 차 일만은 머리를 끄덕거렸다. 그것은 맞는 말이었다. 그녀가 구태여 설명하지 않아도 탄생이 얼마나 고귀한 것이라는 것쯤은 그도 이젠 잘 알고 있었다.

차 일만은 문득 자신의 어머니가 보고 싶어졌다. 어머니도 나를 낳으실 때 이런 마음을 가지고 계셨을까. 세월이 지나 이제는
그 모습을 떠올리는 것조차 희미해졌지만, 그래도 그는 꿈속에서처럼 어머니가 눈앞에 나타난다면 단박에 알아보고 달려가 안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다시 어린 시절 배 다른 형을 삽으로 찍어버리고 가출한 행위를 후회했다. 그때 한 번만 참았으면 좋았을 것을……. 그 일만 아니었다면 어쨌든 어머니와 생이별은 하지 않았을 것이며, 자신의 운명도 이렇듯 시궁창에 내던져지는 신세는 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그를 안타깝게 했다.

차 일만은 어머니가 아파하는 게 무엇보다 싫었다. 의붓아버지한테 머리끄덩이를 잡힌 채 매 맞는 것도 그랬지만 매 맞은 뒤 피멍이 든 얼굴로 아파서 우는 모습은 정말 보기 싫었다. 왜 일방적으로 당하고만 있을까. 어머니 특유의 그 앓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그는 주체할 수 없는 복수심에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쥐어보곤 하였다. 모두 다 때려죽이고 싶었다.

“아이의 이름은 무어라고 지을까요?”

염 은옥의 갑작스런 물음에 차 일만은 당혹스러운 표정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가 멋쩍게 웃어버리자 그녀는, “아이의 이름은 애 아빠가 지어주어야 하는 것도 몰라요? ”하며, 그것이 당연하다는 투로 되물었다.

자동차가 의암댐을 거쳐 춘천 시내로 접어들면서 차 일만은 다시 긴장하기 시작했다. 혹시라도 차질이 생길 경우에는 큰 낭패를 볼 수도 있다는 우려가 다시 머리를 치켜들었기 때문이었다. 병원 문제도 그랬으며, 앞으로 숨어 살아야 할 거처 또한 걱정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염 은옥은 목적지가 가까워오자 더욱 신바람이 난다는 얼굴빛이었다.

‘뺑끼’는 약속대로 불이 꺼진 세무서 앞에 서 있었다. 차 일만이 차에서 내리자 그가 절룩거리며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준비는?”

“다 해놨어.”

엄지손가락을 치켜 올리며 ‘뺑끼’가 눈을 찡끗했다. 말할 적마다 한 쪽 눈을 찡끗거리는 버릇은 여전했다. 차 일만은 그러나 주변을 경계의 눈빛으로 한 차례 훑어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새벽 두 시가 넘은 시각의 주변은 무덤 속처럼 고요했다.

‘뺑끼’는 먼저 길 건너편에 있는 병원으로 염 은옥을 안내했다. 내 처제라고 했으니까, 그렇게 알아. 그는 앞서 걸어가며 소리 내어 크게 웃었다. 차 일만이 그의 곁으로 따라붙으며 거처에 대해서 확인하자, 그는 약속대로 방 세 개짜리 단층집을 춘천댐 부근에 보아두었다면서, 웃었다.

“당분간 낚싯배 타고 나하고 신선놀음이나 하자구!”

차 일만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병원 출입문을 밀면서 ‘뺑끼’가 한 마디 덧붙였다.

“초야에 묻혀 살아봐. 그것도 살만 해.”


# 탄생

아이는 진통을 시작한지 하루가 지나서야 겨우 세상 밖으로 나왔다. 양수가 파수된 뒤 진통이 점차 빨라지기 시작하자 태아의 하강 정도를 체크하던 의사는 초산인데다가 나이가 있어 위험하므로 제왕절제수술을 하는 게 어떠냐고 물었다. 자궁 입구의 경부가 생각만큼 벌어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염 은옥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진통이 올 때마다 뼈가 물러앉는 고통 때문에 진땀을 흘리면서도 그녀는 자연분만을 고집했다. 그리고 마침내 하루 만에 해낸 것이었다. 그것은 소망 산부인과에 입원한지 사흘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 기간 동안 꼼짝하지 않고 곁을 지켰던 차 일만은 아이가 탄생되기까지의 과정을 처음으로 자세히 목격할 수 있었다. 그것은 곧 신비로움이었으며, 경건함이었다. 숭고한 사랑의 진통이었다.

염 은옥은 신음소리조차 밖으로 뱉어내는 법이 없었다. 파도처럼 진통이 주기적으로 밀려올 때마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고통을 안으로 삼키곤 했다.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진땀을 흘리면서 참곤 하였다. 차 일만은 그녀의 손을 꼭 쥐었다. 그녀의 손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그러나 진통이 잠시 멎으면 그녀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다시 또 생글생글 웃곤 하였다. 미안해요.
하지만 그녀는 차 일만의 손은 놓아주지 않았다.

아이는 사내아이였다. 탯줄을 자른 간호사는 차 일만을 향해 자랑스레 아이를 번쩍 들어 보여주었다. 아이는 아주 작았다. 보잘 것이 없었다. 눈도 뜨지 못한 핏덩이에 불과했다. 아직은 누구를 닮았는지 가늠할 수도 없는 처지였다. 그러나 아이와 첫 대면을 하는 순간, 차 일만은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벅차올랐다. 저 머리카락조차 성근 조그마한 생명을 위해 내가 목숨을 걸었었구나. 그는 흥분했다. 알 수 없는 기쁨에 온몸을 떨었다. 그만큼 그것은 그에게 큰 충격이었다.

“약속을 지켜줘서 정말 고마워요.”

잠에서 깨어난 염 은옥은 눈물을 흘렸다.

“아이가 아주 건강하데요.”

차 일만은 손을 뻗어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붓기가 빠지지 않은 민낯이었으나 자신에게는 이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사랑스런 얼굴이었다.

사방이 밀페된 방은 바람 한 점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나 로즈 우드 향기에 흠뻑 취한 차 일만은 더운 줄도 몰랐다.

산후 몸 상태를 체크하기 위해 간호사가 들어오자 그녀가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쓸어 올리며 물었다. 아이는 언제쯤 안아볼 수 있어요? 하지만 그녀도 그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 곧 안아볼 수 있다는 것을.

소식을 들은 권 상사는 마치 자신이 득남을 한 것처럼 기뻐했다.

“그려, 이잔 형님두 애 아버지가 되었응께 으른처럼 좀 의젓하게 행세하시유.”

그는 어머니를 모시고 출발하기에는 장대비가 쏟아지는 그날 밤이 적기가 아니겠느냐고 물었다. 어머니의 성화는 차치하고서라도, 거센 빗줄기 때문에 강 승길이 풀어놓은 ‘아이’들의 감시도 소홀해질 것이며, 또 이런 날에는 설혹 누가 뒤따라 붙는다고 해도 좇아오기가 용이하지 않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그의 말은 맞는 말이었다. 쏟아지는 빗줄기 속에서의 추적이란 ‘선수’들끼리도 여간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돌다리도 두들겨보고 건너야 하는 법이었다. 차 일만은 그에게 그래도 곧장 경춘가도를 타지 말고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한두 바퀴 돌다가 오라고 명령하였다.

“그러니께 이번에두 수원 쪽으루 한 번 내빼뻔졌다가 에둘러 돌아서라는 야구쥬?”

속셈을 알겠다는 투로 권 상사가 큰 소리로 웃었다.

“그나저나 아들하구 상견례는 하셨슈?”

<다음호에 계속>

정수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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