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끼리는 없다
코끼리는 없다
  • 정수남  
  • 입력 2007-12-24 17:05
  • 승인 2007.12.24 17:05
  • 호수 37
  • 24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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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춥고 긴 여름(10)

# 히든카드

차 일만은 다시 마른 침을 삼켰다. 그만큼 이번 일은 신중을 기해야 하는 일이었다. 자칫 잘못했다가는 지금까지의 계획이 모두 허탕이 될 수도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궁리를 짜보아도 해답은 역시 ‘뼁끼’밖에 없었다. 그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는다는 것이 위험스런 일이기는 하였으나 어차피 이 일이 강 승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한 고육지계라면 그래도 지금은 그에게 배팅하는 것이 가장 확률이 높다고 판단되었다.

젠장 맞을……. 차 일만은 다시 담배를 빼어 물었다. 길은 외길이었다. 그 길밖에는 길이 보이지 않았다. 하기야 일찌감치 ‘복만네 아이’들로 바람을 잡게 한 것도 따지고 보면 모두 다 그것을 위한 포석이 아니었는가. 그러나 그는 불안했다. 긴장이 온몸을 흔들었다. 잠시 뒤 그는 다시 확인을 하기 위해 버턴을 눌렀다. ‘뺑끼’는 여전히 자신만만한 음성이었다.

“뭘 꾸물거리고 있어? ‘돼지’ 속성 몰라? 그놈은 옛날부터 한 번 뜬 자리는 다시 쳐다보지도 않는 놈이잖아.”

그는 껄껄 웃고 있었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지금까지 강 승길은 한번 검색한 곳을 다시 뒤진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옛날 통계에 불과했다. 그것을 믿고 섣불리 움직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의외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것이었다.

“걱정 말고 빨리 출발해. 장고 끝에 악수 나온다는 이야기도 있잖아.”

‘뺑끼’의 마구발방은 여전하였다. ‘똘만이’들한테 칼침을 맞아 다리를 저는 사람답지 않게 아직도 호기는 살아 있었다.

마침내 차 일만은 결심을 굳혔다. 그는 지체 없이 권 상사를 불러들였다.

“오늘 뜨기로 했다.”

그가 들어서자 차 일만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다른 변경 사항은 없는 거지유?”

그는 어디로 향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아, 이눔의 독립꾼 신세……. 그는 혼자 푸념을 늘어놓다가 차 일만이 지시한 대로 염 은옥의 어머니에게 연락을 취했다.

“잘 기셨쥬? 일전에 지가 말쌈드린대루 지금 곧 갈팅께 잠시 내려왔으믄 하는디유. 자세한 말씀일랑 차 타구 가믄서 드릴께유…….”

다행스럽게도 염 은옥의 어머니는 지난번처럼 토를 달지 않았다. 그가 폴더를 접자 차 일만이 다시 한 번 확인을 시키듯 입을 열었다.

“안양까지는 아주 천천히 몰고 가는 거 알고 있지? ‘돼지네 아이’들이 마음 놓고 따라 붙을 수 있게 하란 말이야. 그러다가 병원 앞에서부터는 수원 쪽으로 디립따 밟아버리는 거야. 알겠지?”

권 상사는 머리를 끄덕거렸다. 그러니까 이번 작전에서 자신이 맡은 역할은 대미를 장식할 마지막 바람잡이 역할이었다. 그만큼 그것은 위험도가 높은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쯤은 그에게 식은 죽 먹기보다도 쉬운 일이었다. 그래도 한때는 카레이서를 꿈꾸던 자신이 아닌가. 하긴 그 바람에 군대 시절부터 영창을 제 집처럼 드나드는 신세가 되긴 했었지만…….

“그러니께 수원까정 내려갔다가 다시 원위치 시키라는 말씀인 거잖유?”

권 상사의 얼굴은 덤덤했다. 두 사람이 똑같은 말을 묻고 대꾸하는 것이 벌써 몇 번째인가. 그래도 차 일만은 미덥지 못하다는 얼굴이었다. 짐을 정리한 뒤 밀린 숙박료를 지불하고 여인숙을 빠져나가는 권 상사의 등에 대고 같은 말을 다시 한 번 더 되풀이하는 것이었다.

“나가자마자 휘발유부터 입빠이 때려 넣는 거 잊지 마. 기름 떨어지면 만사 쫑 이니까.”


# 대탈출

자정 무렵 차 일만은 이윽고 천천히 여인숙을 나왔다. 소나기가 한 차례 퍼붓고 지나간 거리는 기름칠을 한 것처럼 번들거렸다. 연락을 받은 염은옥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투로 곧장 내려왔다. 자동차 뒷좌석에 큰 가방을 옮겨 싣는 그녀의 얼굴에서는 긴장한 빛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보다는 오히려 어딘가로 여행을 떠나는 사람처럼 설레는 모습이었다. 목적지도 알려주지 않고 연득없이 서두르는 그의 행동에 대해서도 그녀는 따지려들지 않았다.

“약속을 지켜줘서 고마워요.”

차 일만은 그녀가 조수석에 오르자 곧 액셀러레이터를 힘껏 밟았다. 길모퉁이를 돌았다. 꼭 어디에선가 강 승길이 튀어나와 뒷덜미를 낚아챌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그는 더욱 속도를 가했다. 이런 때의 속도란 흔히 생명과도 직결되곤 하였다. 달리는 차를 가로막고 린치를 가한 것이 어디 한두 번이었든가.

“어디로 가는지 궁금하지도 않아요?”

천호대교를 건널 때까지도 차 일만의 목소리에는 긴장이 묻어 있었다.

“몰라도 돼요. 어디면 어때요.”

염 은옥은 그를 돌아다보며 걱정 없다는 투로 말했다.

“몸은 이상이 없는 거죠?”

“그럼요. 아주 정상적이에요.”

차 일만은 다시 교문리 방면으로 핸들을 급히 꺾었다. 룸 미러를 통해 후방을 주시했다. 다행스럽게도 미행하는 차량은 눈에 띠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번 작전은 80퍼센트 정도 성공한 것이나 진배없는 일이었다. 그는 비로소 속도를 늦추며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저동차가 경춘가도로 접어들자 염 은옥은 비로소 권 상사와 어머니가 생각난 듯 궁금하다는 투로 물었다.

“권 선생님은 어떻게 되는 거예요?”

“곧 뒤따라 올 겁니다.”

차 일만은 다시 뒤를 살펴보았다. 역시 따라붙은 차량은 보이지 않았다.

“엄마한테 이야기는 들었어요.”

그녀는 곧이어 그 이야기를 자세히 설명했다. 처음 권 상사의 말을 듣고는 긴가 민가 했지만 결국 어머니는 차 일만을 믿고 따르기로 하였다는 것이었다. 엄마가 저더러 뭐라고 그랬는지 아세요? 그 사람 말이라면 기름을 끼얹고 불속으로 뛰어들라고 하더라도 믿어야 한데요. 그 이야기를 마치면서 그녀는 얼굴 가득 웃음꽃을 피웠다. “하긴, 이 세상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믿지 못한다면 누굴 믿을 수 있겠어요?”

그녀는 가평 휴게소에 당도할 때까지 내내 밝은 표정이었다. 차 일만은 그곳에서 자판기 커피를 뽑아들고 약속대로 뼁끼 에게 다시 연락을 취했다. 늦은 시간인데도 그는 춘천 시내에 나와 벌써부터 기다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짜아식, 빨리 오지 않고 아직까지 뭐하고 자빠져있는 거야. 너 지금 똥개 훈련시키냐? 남은 졸려 죽겠구만.”

뺑끼는 태평스럽게 전화를 받았다. 농담까지 건네는 그에게서 차 일만은 왠지 모를 여유를 느낄 수 있었다. 그렇다면 주변 낌
새에 대해서는 더 이상 묻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거리는 어두웠다. 이따금 텅 비어있는 도로를 전속력으로 질주하는 자동차의 헤드라이트가 어둠을 가르고 있었다. 차창을 내리자 습기를 머금은 밤공기가 밀려들어왔다. 시동을 걸 때쯤 통화가 된 권 상사는 첫 마디부터 염 은옥을 걱정하고 있었다.

“안즉 도착하지 못하신겨? 형수님 뭉청 배고플틴디…….”

권 상사는 차 일만을 나무라듯 혀끝을 찼다. 그의 입을 통해 차 일만은 염 은옥이가 아침부터 아무 것도 입에 넣지 않았다는 것을 비로소 알 수 있었다. 권 상사가 다시 입을 열었다.

“형님이 하명하신 대루다 철두철미하게 끝내버렸으니께, 이젠 그 일일랑은 걱정 붙들어 매슈.”

수화기 저쪽에서 들려오는 그의 말투에는 어느새 자랑이 섞여 있었다.

“개네들이 따라붙지는 않았어?”

차 일만은 그것이 제일 궁금했다. 그러나 권 상사의 대답은 의외로 싱거웠다.

“쥐새끼 한 마리두 없든디유.”

권 상사의 웃음소리가 고막을 울렸다. 곧 갈팅께 기둘리슈. 그는 이어서 복만이네 아이들이 끌려갔다는 것까지 덧붙여 들려주
었다.

“딱부리가 직접 나서설랑 보쌈을 했다구 하는디유.”

‘딱부리’까지 나섰다면……. 차 일만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렇다면 자신이 던진 미끼에 강 승길이 걸려든 게 확실했다. 복만이에게는 좀 미안한 느낌이 들었으나, 일이 그렇게 되었다면 죽사발나게 얻어터질 그 아이들은 결국 권 상사를 통해 흘린 거짓 정보를 토설할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수원 어디로 간다는 말은 들었습니다만……. 그 다음은 불을 보듯 뻔했다. 쑥고개 ‘뱀대가리’한테 잠시 의탁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을 강 승길은 아이들의 토설을 사실로 믿고 지금쯤 그 쪽을 이 잡듯이 뒤지고 있을 게 분명했다. 그래서 어머니까지 동원하였던 것이 아닌가.

<다음호에 계속>

정수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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