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춥고 긴 여름(9)

하지만 그가 등 뒤에서 이런 일을 꾸밀 줄을 그녀는 상상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후회해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현지는 눈을 감았다.
‘딱부리’는 널브러져 있는 여자를 구두코로 한 번 툭, 건드려보았다. 여자가 꿈틀거리자 그는 이내 아이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그만 포장해.”
그의 말투는 여전히 짧고 무거웠다. 그가 한 마디를 내뱉자 ‘아이’들은 다시 여자에게 달려들었다. 그들은 서둘러 여자의 두 팔과 두 다리를 꼼꼼히 묶었다. 입에도 청색 테이프를 붙였다.
“멀리 갈 물건이니까 포장 똑바로 해. 상하지 않도록.”
‘딱부리’가 다시 여자에게 다가갔다. 그는 체액과 피가 굳어있는 여자의 아래 부분을 휴지로 깨끗이 닦아준 다음 알몸인 채로 드러나 있는 허리부근과 둔부, 그리고 젖가슴을 마치 의사가 환자를 진찰하듯 몇 차례에 걸쳐 손바닥으로 쓸어보았다. 그리고는 반짝거리는 목걸이를 단번에 끊어 쥐었다. 쌍녀언, 그래서 소크라테스 같은 위인이 진작부터 니 주제를 알라고 경고한 거야, 알겠어? 자기 주제를 알고 까불었어야지. 그가 입을 씰룩거리며 일어서자 ‘아이’ 하나가 그에게 여자의 핸드백을 건네주었다. 핸드백 안에는 화장품 몇 가지와 손수건, 그리고 만 원짜리 지폐 석장과 천 원짜리 지폐 두 장이 들어있는 지갑이 전부였다. 주민등록증이나 면허증 같이 신상을 밝힐 수 있는 증명서는 아무 것도 눈에 띠지 않았다.
“씨바, 신용카드도 한 장 없는 년이로구먼.”
그는 핸드백을 멀리 집어던졌다.
그러자 가까이 서있던 ‘아이’가 빠른 말투로 물었다.
“더 건질 게 없는 년 같은데요?”
“맞아, 씨바.”
“그럼, 그냥 부쳐버릴까요?”
그는 머리를 끄덕거렸다.
이윽고 큰 마대자루를 들고 기다리던 ‘아이’ 둘이 여자에게 다가갔다. 그들은 익숙한 솜씨로 여자의 머리에 자루를 씌우기 시작하였다. 여자가 몇 번 크게 몸부림을 쳐댔으나 그들의 손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살아있는 새 한 마리를 포획하여 자루에 가두는 것처럼 그렇게 여자를 쉽게 다루었다. 조심해. 뒷짐을 진 채 두 사람의 작업을 감독하던 ‘딱부리’가 다시 짧게 잔소리를 해댔다. 비싼 물건이야.
# 웃음소리
새벽이었다. 황 회장은 단잠을 자다가 전화 벨소리를 들었다. 누구야? 그는 짜증이 났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시간대에 자신에게 전화를 할 사람은 없었던 것이었다. 특히 상대가 다른 사람이 아닌 김 국진 이사라는 것을 알게 되자 그는 더욱 화가 치밀었다.
“뭐야, 지금이 몇 시인 줄 알고 있어?”
“예, 회장님!”
수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김 이사의 목소리는 평소와 달랐다. 그는 떨고 있었다. 황 회장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의 목소리에서 뭔가 또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래, 이번엔 또 뭐가 잘못되었나?”
황 회장은 마른 침을 삼켰다. 그는 되도록 침착해지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그날만큼은 그를 엄습했던 불길한 예감이 빗나갔다는 것이 김 이사의 입을 통해 금세 밝혀졌다.
“이번엔 그런 게 아닙니다.”
김 이사는 여전히 떨고 있었다. 아침까지 저 혼자 알고 있기에는 너무 기쁜 소식이어서……. 그는 말끝을 흐리면서도 기쁜 내색을 감추지 않았다.
“혹이 하나 또 해결되었습니다, 회장님.”
새벽잠에서 깬 황 회장은 그 말의 의미를 금세 이해할 수가 없었다. 혹이라면, 지난 번 염 은옥을 처리한 것으로 이미 끝난 게 아닌가. 그러다가 그는 비로소 현지를 떠올렸다. 아, 그 여자……. 그러나 그는 이번에도 모른 척 시치미를 뗀 채 침착하게 되물었다.
“혹이라니?”
“퇴계로 오피스텔…….”
김 이사는 분명하게 현지를 가리켰다. 이번엔 정말 발 빠르게 처리했군. 황 회장은 쾌재를 불렀다. 그러나 내색은 할 수 없었다. 그 일은 처음부터 냄새만 풍겼던 일이었다. 그 여자 때문에 요즘 골치가 아프다는 정도로 여운을 남겼을 뿐, 결코 자신이 어떻게 처리하라는 지시는 한 마디도 내린 적이 없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섬으로 아주 보내버렸답니다. 다시 뭍을 밟을 수 없는 곳으로!”
그래서 그렇게 들리는 것일까. 김 이사의 목소리는 다른 때와 달리 격앙되어 있었으며, 기쁨에 들떠 있는 게 분명했다.
“너무 심한 거 아니야? 섬이라니, 돈 몇 푼 주어서 곱게 보내버리면 되는 것을.”
쯧쯧……. 황 회장은 나무라는 투로 혀끝을 차며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잠은 일찌감치 도망간 상태였다. 그렇게 까불더니, 섬으
로 팔려갔다고? 그렇다면 이젠 내 앞의 걸림돌이란 아무 것도 없다는 말이 아닌가. 그는 갑자기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한 번 터져 나온 웃음은 아무리 멈추려고 해도 도무지 멈출 수가 없었다. 꺄악, 꺄악, 꺄꺄꺄꺄…….
#두뇌싸움
강 승길은 심기가 불편했다. ‘불독’의 보고가 계속되고 있었으나 그는 귓등으로 흘리고 있었다. 보고는 이미 결론이 난 상태였던 것이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깜씨’는 어디로 갔단 말인가. 그는 조바심이 일었다. 초조했다. 벌써 김 이사에게 허위로 보고까
지 한 마당이 아닌가. 그러나 ‘불독’은 보고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듯 일어설 줄을 몰랐다.
“그런데 형님, 그 쑥고개의 ‘뱀대가리’라는 놈 말입니다.”
“그 놈이 왜?”
“형님 이야기를 꺼냈는데도 떫다는 표정이든데요.”
불난 데 부채질을 하는 격이라고 할까. 그는 눈치도 없이 소파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이죽거리며 강 승길의 성미를 긁어대고 있었다.
“기회를 봐서 손 한 번 봐줘야 하는 것 아닙니까?”
강 승길은 길게 숨을 내쉬며 천정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그런 것은 지금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런 것이라면 나중에 천천히 처리해도 늦지 않은 것이었다.
그때였다. 노크도 없이 ‘딱부리’가 헐레벌떡 뛰어들었다. 그는 며칠 전 현지를 ‘보쌈’해서 섬으로 팔아버린 뒤 강 승길로부터 포상을 받고는 회장실을 무상으로 출입하는 특권을 누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눈도장이나 찍기 위해 들린 것이 아닌 듯 했다. ‘불독’이 얼굴을 찡그렸으나 그는 개의치 않고 소파에 엉덩이를 걸쳤다.
“무슨 일이야?”
강 승길이 그의 얼굴을 쳐다보며 물었다.
“‘깜씨’의 아이들이 떴습니다!”
‘딱부리’는 흥분한 듯 목소리가 약간 들떠 있었다.
“어디에?”
“지난 번의 그 병원 앞에요.”
“언제부터?”
“오늘 아침부터 진을 치기 시작했답니다. 우리 ‘아이’들이 확인했습니다!”
‘
딱부리’는 의기양양해 있었다. 내친 김에 그는 골치 아팠던 그 일까지도 자신이 공을 세우겠다고 벼르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
점에 대해서는 ‘불독’도 같은 얼굴이었다. 거, 보세요. 꼬리가 길면 밟히기 마련 아닙니까, 형님. 그러나 강 승길은 그들처럼 기쁘지 않았다. 뱀눈을 크게 뜬 채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건 또 무슨 개뼈다귀 같은 소리인가. 그에게는 지금까지 쥐죽은 듯 숨어있던 ‘깜씨’의 ‘아이’들이 갑자기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 자체가 의심스러웠다. 더구나 지난번에 자기를 감쪽같이 따돌렸던 그 병원에 다시 진을 치고 있다는 것은 평소 ‘깜씨’다운 술수가 결코 아니었던 것이었다. 그 배경에는 자신을 속이기 위한 또 다른 계략이 숨어있는 게 분명해 보였다. 그는 어금니를 짓씹었다. 내가 한 번 속지, 두 번 속을 줄 알았냐! 그는 ‘딱부리’에게 빠르게 묻기 시작하였다.
“정확히 누구네 ‘아이’들이야?”
“복만이네 ‘아이’들이라고 하던데요.”
‘딱부리’는 거침이 없었다. 그의 말투에는 아직도 흥분기가 묻어 있었다.
“몇 놈이나 떴어?”
“서너 명 확인했다는 것으로 봐서는 적어도 댓 명 이상 되지 않을까 싶은데요.”
<다음호에 계속>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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