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끼리는 없다 <제33회>
코끼리는 없다 <제33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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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7-12-04 11:05
  • 승인 2007.12.04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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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춥고 긴 여름(8)

거실로 나와 앉은 염 은옥은 문득 두 사람이 견우와 직녀 같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더욱이 자신이 방해꾼이 되어서는 안 될 말이었다. 하지만 권 상사는 곧 안방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집 안팎을 세밀히 살핀 뒤에도 거실에 난 유리창 너머로 자주 바깥 동정을 살피곤 하는 것이었다. 그의 행동이 수상하여 염 은옥이가 왜 그러느냐고 묻자, 그는 큰 소리로 껄껄 웃으며 오히려 집
이 낯설어서 그런다고 딴소리를 해댔다.

“‘독립군’이 오랜만에 지 집구석이라구 찾아들어오니께 이거이 당최 넘의 집처럼 낯설어 가지구유.”

“그래도 어서 안으로 들어가세요, 오늘은.”

염 은옥은 배를 만졌다. 아이가 또 느닷없이 옆구리를 차댔다. 발길질이 힘찼다. 아이의 발길질 때문에 잠이 멀리 도망간 그녀는 다시 출산준비물을 꺼내어 점검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벌써부터 어머니와 권 상사의 아내, 그리고 자신이 하나하나 준비해두었던 것이었다. 그때가 되면 나도 그 사람을 만날 수 있으리라. 그녀는 아이의 배냇저고리와 속싸개, 겉싸개 등을 펼쳤다가 다시 접었다.


# ‘진상’ 처리

살려 주세요……. 현지는 있는 힘껏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그 소리는 입안에서만 맴돌 뿐이었다. 지하실은 사방이 콘크리트 벽으로 꽉 막혀 있었다. 통로란 철제 계단 위의 출입문 외에는 전혀 눈에 띠지 않았다. 그래서 그럴까, 몸에 달라붙는 음습한 공기가 곰팡이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현지는 비로소 자신이 납치를 당했다는, 사태를 깨달았다. 그러자 이번엔 어쩌면 이곳에서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 수도 있겠다는 공포가 온몸을 엄습하기 시작했다.

몸이 떨렸다. 다시 혼미해지려는 정신을 놓지 않기 위해 어금니를 씹었다. 그녀는 경망스러웠던 자신의 행동을 후회했다. 따지고 보면 황 회장의 이름 석 자를 거명하는 그들을 믿었던 것이 잘못의 발단이었다. 모셔오라는 분부가 있었다는 그들의 속임수를 의심조차 하지 않고 지하주차장으로 서둘러 내려가면서 그녀는 오히려 황 회장을 그릇이 큰 인물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동안의 정분을 생각해서 이별주라도 한 잔 마시자는 것으로 착각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착각이라는 것은 승용차에 오르
면서 금세 알 수 있었다. 생면부지인 세 명의 사내는 그녀가 좌석에 앉자마자 곧 말투를 바꾸었다.

“죽기 싫으면 잠자코 있어.”

사내 하나가 자신의 두 팔을 묶을 때에도 그녀는 웬 일인지 최면에 걸린 양 꼼짝할 수가 없었다. 뒤이어 어디를 어떻게 맞았는지 갑자기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그리고는 끝이었다. 코끝에 비위가 상할 정도의 매캐한 액체가 닿았다고 느낀 순간 그녀는 정신을 놓고 말았다. 그 뒤 깨어난 곳이 지하실이었다.

“여기가 어디죠?”

현지는 떨리는 목소리로 몇 번 외쳤다. 그러나 그들은 귀머거리인 듯 그녀의 말 따위에는 귀도 기울이지 않았다.

‘딱부리’는 강 승길로부터 지시를 받은 대로 행동했다. 속전속결이 최선이라는 것을 그는 벌써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이런 일이 어디 한두 번인가. 그는 여자를 앞에 놓고도 눈썹 한 번 까딱하지 않았다. 탁송할 물건처럼 취급했다. 신상 확인이 끝난 뒤 그는 마침내 짧게 명령을 내렸다.

“깝데기부터 벗겨!”

그의 말이 떨어지자 침잠되어 있던 지하실의 음습한 공기가 잠에서 깨어난 듯 위 아래로 한 번 출렁거렸다.

‘아이’들은 민첩했다. 가차 없이 달려들어 여자의 옷을 찢어버렸다. 블라우스가 찢어지고, 스커트가 벗겨지고, 브래지어가 달아나고, 마침내 마지막 남았던 팬티가 몸에서 떨어져 나갔다. 옷이 찢어지는 소리가 비명처럼 지하실을 울렸다.

일 분이 채 지나지 않아서 여자는 금세 알몸이 되었다. 알전등 아래 그녀의 몸은 어느새 감춘 것이 없는 모습으로 변해버렸다.

치부를 가리기 위해 그녀가 본능적으로 몸을 움직였으나 소용이 없었다. 가끔 날숨을 내쉴 적마다 목에 걸려 있는 금목걸이가 반짝거렸다. ‘아이’들은 넋을 놓고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윽고 ‘딱부리’가 앞으로 나섰다. 물건의 품질을 점검하는 검사원 같은 얼굴로 그는 그녀의 가슴과 허리, 둔부 등을 손바닥으로 한 번 쓸어보며 세심히 훑어보았다. 여자는 곧 포기한 듯 미동도 하지 않았다. 화장한 얼굴이 눈물과 땀으로 얼룩이 져 있었다. 그러나 한때는 한 달 임대료가 일천만 원짜리 몸뚱이였던 여자가 아닌가. 마침내 ‘딱부리’는 손을 거두며 만족한 듯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비디오카메라 기사 대기시켜.”

‘딱부리’는 담배를 한 대 붙여 물었다. 그리고는 휴대폰을 빼어들고 출입문 밖으로 나갔다. 그가 피해주자 ‘아이’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서둘렀다. 이런 일에는 벌써 이골이 났다는 투로 여자를 쓰러트린 뒤 곧장 ‘족보대로’ 바지 지퍼를 내렸다.

카메라맨이 이동하며 찍어대는 동안에도 ‘아이’들은 거침없이 여자의 몸 위에 올라탔다. 체위까지 바꾸어가며 땀을 흘렸다. 비디오카메라 감독이 지시하는 대로 호응하고 있었다. ‘아이’들이 차례대로 올라와 헐떡거렸으나 여자는 꼼짝하지 않았다. 눕히고, 젖히고, 자빠트려도 순순히 응했다. 세 번째 ‘아이’가 일을 끝내고 내려왔을 때에야 아주 잠깐 다리를 움찔거렸을 뿐이었다.

바지 지퍼를 올리며 한 ‘아이’가 말했다.

“다 찍었어?”

“네에.”

“오랜만에 물건 하나 제대로 잡은 것 같지 않아? 이만한 라인이면 청계천에서 ‘대박’ 때리지 않겠어?”

“그럴 것 같은데요.”

다른 ‘아이’가 손바닥으로 그녀의 젖가슴을 주물럭거리며 다시 군침을 삼켰다.

“맛도 ‘데낄’이야, 꼭 꼬막 씹는 맛이었다니까.”

“섬으로 보내기는 아깝군.”

현지는 가물거리는 의식을 붙잡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어떻게 된 것인지 몸은 자신의 생각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불에 달군 인두를 집어넣었다 뺀 것처럼 아래가 화끈거렸다. 쓰라렸다. 열여덟 살 때 산에서 처음 경험했던 것처럼 갑자기 아래에 큰 구멍이 뚫린 것 같이 뻐근했다. 그 구멍 속으로 벌레가 기어 들어오는 것 같은 느낌에 현지는 몇 번씩 몸서리를 쳤다. 몸서리를 칠 때마다 피 냄새가 코끝에 느껴졌다. ‘돌림빵’…….

그녀는 비로소 방금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도 모르게 한숨이 터져 나왔다. 이제는 가수의 꿈도, 이 효리나 엄 정화의 모습도 될 수 없다는 것을 절감하였다. 성형수술도 필요 없었다. 그러나 이상스럽게도 그토록 소원하던 그 꿈이 한 순간에 깨어져버렸는데도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황 회장으로부터 헤어지자는 요구가 있었던 것은 약 달포 전쯤이었다. 자신의 행보에 걸림돌이 될 만한 것은 부득불, 눈물을 머금고 모두 치워버려야 한다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그 부분에 자신이 해당된다는 것에 대해서 그녀는 이해할 수 있었다. 걸림돌이라면 응당 비켜서야 하는 게 마땅한 일이었다. 그만큼 매달 응분의 보수도 충분히 받은 셈이었다. 그러나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 한다고 하지 않던가. 그녀는 문득 마음대로 가지고 놀다가 함부로 버려도 되는 장난감이 아니라는 본때를 그에게 한 번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서 즉흥적으로, 장난삼아, 그에게 헤어지는 데 따른 조건을 달았던 것이었다. 배시시, 웃으며 이억을 요구했다.

“그게 무슨 개 같은 소리야. 너는 나에게 매달 일천만 원에 임대되어 있었어.”

그는 펄쩍 뛰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가 조금도 무섭지 않았다.

오히려 노기를 띤 그의 얼굴을 보는 게 재미있었다. 이제는 반대로 자신이 그를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 차례라고 여겨지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오버 차지’는 지불하지 않았잖아요?”

“그런 건 애당초 계약에 없었어!”

“그래서 못 주시겠다아? 알았어요. 그럼 저도 이제부터는 제 생각대로 할게요.”

“생각은 무슨, 얼어 죽을…….”

“저를 바보 취급하셨죠? 그러나 저도 입이 있다는 걸 잊지 마세요.”

그 말에 그는 안색이 바뀌었다. 안절부절 못하는 얼굴이었다. 그런 그의 얼굴을 보며 그녀는 또 배시시 웃었다. 그걸 보는 게 그녀는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보니까 그 이억이라는 돈이 어느새 정말 자신이 꼭 받아 챙겨야할 위로금처럼 사실로 여겨지기도 하는 것이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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